루이스 VS 프로이트 - 유신론자와 무신론자의 대논쟁 C.S. 루이스 연구서
아맨드 M. 니콜라이 지음, 홍승기 옮김 / 홍성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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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목적은 완전히 대립하는 두 관점, 즉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세계관으로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데 있다. (프로이트는 모든 사람을 이 두 범주로 나누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대립하는 관점으로 인생의 기본적인 문제들을 다룰 것이다. (15쪽)

우리는 프로이트와 루이스의 논변들은 타당한 증거를 지니는지, 과연 그럴듯한지를 평가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의 논변이 얼마나 객관적인 증거를 기초로 하고 있는지, 아니면 얼마나 현실을 왜곡한 감정을 기초로 하고 있는지를 평가할 필요가 있다. (78쪽)

루이스와 프로이트는 둘 다 도덕률에 복종하려 했는데, 프로이트는 자기 행동을 다른 사람과 비교 평가하여 자신이 "대다수의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다"고 결론지었다. 루이스는 자기 행동을 도덕률이 요구하는 바와 비교했고, "나 자신의 성격에 무시무시한 것들"이 있음을 발견하고 "질겁했다." 이로 인해 그는 자신이 외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이 깨달음은 그가 무신론을 버리고 영적 세계관으로 이행하는 많은 단계 중의 하나가 되었다. (104쪽)

루이스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강조했다. 세상의 어떤 쾌락도 우리를 만드신 존재와의 관계를 향한 갈망과 절실한 필요를 만족시키거나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를 만드신 분과의 관계를 먼저 구한다면 이를 얻을 뿐 아니라 행복도 넉넉히 얻게 되리라고 루이스는 믿었다. (144-145쪽)

프로이트는 인생에서 지속적인 행복을 발견하리하는 기대를 단념했다. 그는 미래에 낙관적인 사람들에 대해 비이성적이며 "진리와 상충된다"고 생각했다. 프로이트는 평생 ‘우울증 발병‘으로 괴로워하다가 인생의 끝이 다가왔을 때 이런 질문을 던졌따. "인생이 힘들고 기쁨이 없다면, 게다가 너무나 비참하여 죽음만이 우리를 구해 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면 오해 산다는 게 뭐가 좋겠는가?" (169쪽)

무엇이 프로이트의 인생에서 그렇게 많은 관계를 파국으로 이끌었을까? 루이스가 지적한 바로는 우정은 공통의 관심사에 기초를 두는 것으로, 프로이트와 동료들은 많은 관심사를 공유했다. 초기 프로이트 추종자들은 모두 정신분석가였으며 그의 유물론적 세계관을 공유했다. 그런데 왜 갈등이 생겼을까? 프로이트가 사람들을 불신하고 낮게 평가한 것이 그러한 갈등에 이르게 했을지도 모른다. ((243쪽)

슬프게도 프로이트는 자기 이웃을 자신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고통을 주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로 보았다. 프로이트에게 이웃은 그의 신뢰와 사랑을 얻어야만 하는 사람들이었다. 60세 때 프로이트는, 일생 동안 자신을 이용하거나 배신하지 않을 친구들을 찾아다녔다고 말했다. 회심 전의 루이스는 프로이트처럼 조심스럽고 방어적인 태도로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회심 후에는 모든 개인을 영원히 사는 존재로 보았다. "당신은 단지 죽어야 할 운명을 가진 이에게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국가, 문화, 예술, 문명 등은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경솔함이나 무례함이나 우월감을 갖지 않고, 죄가 무엇인지 깊이 알면서도 죄인을 사랑하는 참되고 희생적인 사랑"이 특징이 되어야 한다. 루이스의 사랑의 개념은 그의 인생을 풍요롭게 하였고 그를 매우 다른 사람-"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였다. (249-250쪽)

고통은 매일의 삶 속에서 일어난다. 우리가 고통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고통이 우리 삶의 질에 미칠 영향을 결정한다. 만일 루이스처럼, 어떤 지고한 존재가 우리를 사랑하며 궁극정으로 우리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믿는다면 인내와 희망을 가지고 견딜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물론적 세계관을 고수한다고 한다면, 우리가 부닥치는 혹독한 현실에 굴복하라는 프로이트의 훈계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프로이트의 결론은 이것이다. "신자가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시점이 온다면, 이는 그가 자기 고통에 대한 위로와 위안을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조건적 굴복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는 아마도 길을 멀리 돌아가는 노력을 아낄 수 있을 것이다." (289쪽)

프로이트는 죽음을 두려워했고 자신이 죽을 날짜에 대해 강박관념을 가졌지만, 주치의에게 자기 생이 다하는 때를 알려 줘야 한다고 고집했다. (302쪽)

프로이트는 안락사로 죽기 전날인 1939년 9월 22일에 서재에서 발자크의 책 [파멸의 가죽]을 골랐다. 그는 몇 시간 후에 의사에게 자기 생을 마치게 해 달라고 부탁할 셈이었다. 그가 일생 동안 읽은 수백 권의 책 중에서 왜 하필 [파멸의 가죽]인가? 이 소설의 구성은 단순치 않다. 부와 명성을 갈망하는 ‘젊은 과학자‘인 주인공 라파엘은 스스로를 매우 재능 있지만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 실패한 사람으로 생각하며, 자살을 계획한다.(중략)왜 프로이트는 죽기 직전에 마지막 책으로 특별히 발자크의 이 작품을 선택했는가? 부모의 영적 세계관을 등지고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부와 명성을 획득하기 위하여 과학적 세계관을 수용하게 되었을 때, 프로이트는 스스로 악마와 계약을 맺었다고 느꼈는가? 프로이트는 심리연구를 자신의 연인이라고 말했다. 베르다흐와 발자크의 두 작품 속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프로이트는 자신이 광란적 공포와 두려움 가운데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두려워했는가?(305-308쪽)

그러나 루이스는 그의 슬픔을 애써 감당하면서 "사별이란 사랑의 경험상 보편적이고 필수적인 부분"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고 연애 다음에 결혼이 오듯이, 결혼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죽음이 온다." 루이스가 곧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떻게 생각하고 느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편지들과 당신 그가 읽은 책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중략) ‘죽음을 친구로 그리고 구원자로 볼 수는 없겠는지요? 죽음은 당신을 괴롭히는 육신을 벗어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죄책감을 벗어 버리거나 컴컴한 지하실을 빠져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두려워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이 세상이 당신에게 너무 친절해서 세상을 떠나는 일이 유감스러운가요?" 그런 다음 루이스는 죽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말하며 그녀를 위로하려고 애쓴다. (316-317쪽)

(위의 내용에 이어서)"우리가 뒤에 남기고 떠나는 것들보다 더 좋은 것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당신에게 ‘평안하여라, 애야, 평안하여라. 편히 쉬어라. 이제 잡고 있는 것을 놓아라. 영원한 팔이 너를 품을 것이다. ...... 너는 나를 그렇게 믿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신다고 생각되지 않는지요? 물론 이번이 끝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번이 좋은 연습이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루이스는 이 편지에 "당신의 벗(그리고 당신과 마찬가지로 여행의 끝에 다다른 지친 여행자) 잭"이라고 서명을 남겼다. (3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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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초판본, 양장)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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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윌리엄 스토너 앞에 놓인 장래는 밝고 확실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장래를 수많은 사건과 변화와 가능성의 흐름이라기보다 탐험가인 자신의 발길을 기다리는 땅으로 보았다. 그에게 장래는 곧 웅장한 대학 도서관이었다. 언젠가 도서관에 새로운 건물들이 증축될 수도 있고, 새로운 책들이 들어올 수도 있고, 낡은 책들이 치워질 수도 있겠지만, 도서관의 진정한 본질은 근본적으로 불변이었다. 그는 몸을 바치기로 했지만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곳에서 자신의 장래를 보았다. 장래에 자신이 변화를 겪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으나, 장래 그 자체가 변화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변화의 도구라고 보았다. (36-37쪽)

그는 자기 어머니나 아버지 같은 사람들이 묻혀 있는 이 황량하고, 나무 하나 없는 자가은 땅으로 시선을 돌려 평평한 땅 너머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태어난 집, 아버지와 어머니가 평생을 보낸 집이 있는 방향이었다. 그는 해마다 땅에 들어가는 비용을 생각했다. 땅은 옛날과 다름없었다. 아니, 그때보다 조금 더 척박해지고, 소출도 조금 더 인색해진 것 같았다.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즐거움이 없는 노동에 평생을 바쳤다. 그들의 의지는 꺾이고, 머리는 멍해졌다. 이제 두 분은 평생을 바친 땅 속에 누워 있었다. 땅은 앞으로 서서히 두 분을 자기 것으로 만들 것이다. 습기와 부패의 기운이 두 분의 시신이 담긴 소나무 상자를 서서히 침범해서 두 분의 몸을 건드리다가, 마침내 두 분의 마지막 흔적까지 모조리 먹어 치울 것이다. 그렇게 해서 두 분은 이미 오래전에 자신을 바쳤던 이 고집스러운 땅의 무의미한 일부가 될 것이다. (151쪽)

나이 마흔 셋에 윌리엄 스토너는 다른 사람들이 훨씬 더 어린 나이이 이미 배운 것을 배웠다. 첫사랑이 곧 마지막 사랑은 아니며, 사랑은 종착역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 두 사람 모두 수줍어하면서 천천히 조심스럽게 서로를 알아갔다.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기도 하고, 서로에게 손을 내밀었다가 물러나기도 했다. 두 사람 모두 상대방에게 억지로 자신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두 사람을 보호해 주던 과묵함이라는 막이 한 층씩 떨어져 나가서 마침내 두 사람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지극히 수줍어하면서도 서로에게 무방비하게 마음을 열고 함께 있을 때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해지는 관계가 되었다. (270쪽)

하지만 윌리엄 스토너는 젊은 동료들이 잘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알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 기억 밑에 고생과 굶주림과 인내와 고통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 그가 분빌에서 농사를 지으며 보낸 어린 시절을 생각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지만, 무명의 존재로서 근면하고 금욕적으로 살다 간 선조들에게서 혈연을 통해 물려받은 것에 대한 지식이 항상 의식 근처에 머무르고 있었다. 선조들은 자신을 억압하는 세상을 향해 무표정하고 단단하고 황량한 얼굴을 보여주자는 공통의 기준을 갖고 있었다. (307쪽)

스토너는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일했다. 나이가 많아서 이상해 보이는 학생들은 열렬하고 진지했으며, 시시한 것들을 경멸했다. 유행이나 관습에 무지한 그들이 공부를 대하는 태도는 스토너가 예전에 꿈꾸던 학생의 모습 그대로였다. 공부를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수단이 아니라 인생 그 자체로 생각하는 모습. 스토너는 지금 이 시절이 지나고 나면 결코 이렇게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때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녹초가 될 때까지 즐겁게 온몸을 바쳐 일하면서 이 시절이 결코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과거나 미래는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실망이나 기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이 끌어낼 수 있는 모든 에너지를 지금 이 순간에 쏟으면서, 이제는 학자로서 자신이 해온 일을 통해 알려지기를 바랐다. (348쪽)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기쁨 같은 것이 몰려왔다. 여름의 산들바람에 실려온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실패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고. 이제는 그런 생각이 하잘것없어 보였다. 그의 인생과 비교하면 가치 없는 생각이었다. 그의 의식 가장자리에 뭔가가 모이는 것이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387-3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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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여자의 열매 - 개정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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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해?‘라고 물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괜찮아‘라고 강인하고 참을성 있게 대답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외로웠다. 외로움 때문에 화가 났다. 내 몸이 보잘것없어 세상의 ㅓㅇ던 것도 나에게 엉겨붙지 않는 듯한 느낌, 어떤 옷으로도 가릴 수 없는 한기, 무엇으로도 누구로부터도 위로받을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용케 스스로에게 숨겨왔을 뿐이라는 생각 때문에 화가 낫다. 언제 어디에서나 혼자이며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미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28-29쪽)

꼬챙이로 붕어빵 틀을 들출 때마다 노릇노릇하게 익어 있는 물고기들을 아이는 지느러미 끝을 잡고 끄집어냈다. 아직 희긋한 붕얻르의 뚜껑은 도로 덮어놓았다. 태어나려면 그 뜨거운 틀 속에서 더 견뎌야 했다. 옆앳것들과 똑같이 견디지 않고는 그 안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75-76쪽)

엄마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그것이었을까, 아이는 생각한다. 어린애처럼 들먹이는 아빠의 어깨를 올려다보면서 괜찮아요, 라고 말해주고 싶던, 그 찢어지는 것 같던 마음이었을까하고 생각한다. 이 마음을 계속해서 갖고 있는 것이 괴로와서 엄마는 이 마음을 버렸을까, 그래서 우리 둘을 떠나버린 것일까 하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동안 아빠는 아이보다도 더 무서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줄곧 무서움을 참고 있었기 때문에 혼자서 더욱 무서웠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98-99쪽)

나는 타인의 그것처럼 그의 흉터를 보았다. 타인에게 호의를 베풀듯이 그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세계가 다른 방식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모든 것을 낯설게, 그리고 오래 바라보았다. 선한 것과 악한 것, 의무와 책임과 방기, 진실과 거짓 따위가 내 눈앞에서 경계선을 무너뜨려갔다. 나는 그 혼란에 더 이상 놀라거나 당혹스러워하지 않았다. 다만 잠자코 바라보았다. 그 간격이 나를 구해주었다. (135쪽)

낯선 사람이 마음을 비집고 들어오는 데에는 잠깐의 시간이 소요될 뿐이라는 것을 그는 처음 알았다. (197쪽)

재미있는 책을 읽다 보면 모든 것이 사라지고 책과 읽는 사람만 남듯이, 그는 오로지 혼자서 세계와 마주해 있다. 그 순간 세계는 광활하지도 복잡하지도 불가해하지도 않다. 손아귀에 잡히는 말랑말랑한 육체처럼 그를 응시하고 있다. (236쪽)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동안 그는 그의 몸속에 미처 상상 못 했던 기억들이 들어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모든 감정에 육체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후회나 슬픔, 분노는 물론 사소하고 자질구레해 보이는 감정들에까지 구체적인 생김새와 감각이 있었다. (283-284쪽)

그것이 어떤 여행이었든, 장기간의 여행이 끝난 뒤 식당에 둘러앉은 일행은 대체로 말이 없습니다. 여행을 시작하던 때의 크고 작은 흥분과 두려움 들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지요. (중략) 마치 산다는 일이 오랫동안 그래왔다는 듯이. 아무도 과장되게 웃거나 짜증 내거나 농을 던지거나 분위기를 바꾸어보려 하지 않습니다. 젓가락을 들었다 놓는 소리, 후루룩 국 넘어가는 소리, 깍두기나 열무김치를 씹는 소리 들만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게 조용히 섞일 뿐입니다. (337-338쪽)

아무거나 들쑤시거나 캐어내서는 안 돼. 들쑤시고 캐어내지 않은 그 뜨거운 불길들이 어느 사이에 열기와 숨막히는 황냄새를 버리고 순연한 빛 덩이로 떠오르도록 하는 거지. 고통이 뷰파인더와 내 몸둥이를 관통해 맑은 슬픔이 되는 절차를 잠자코 바라보기만 하는 거야. 지금 내가 당신을 생각하는 격렬한 마음이 차츰 슬퍼지고, 애절해지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성스러워져서, 어느덧 당신으로부터 묵묵히 떠나갈 것처럼. (3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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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무늬영원 - 개정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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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마,라고 그때 말했어야 했다. 그러지 마. 우리 잘못이 있다면 처음부터 결함투성이로 태어난 것뿐인걸.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설계된 것뿐인걸. 존재하지 않는 괴물 같은 죄 위로 얇은 천을 씌워놓고, 목숨처럼 껴안고 살아가지 마. 잠 못 이루지 마. 악몽을 꾸지 마. 누구의 비난도 믿지 마. (35쪽, 밝아지기 전에)

당신이 이해할 수 없었던 점은, 그녀가 질투한 것들이 어김없이 당신의 결점들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당신이 고지식하고 고집이 센 것을, 그래서 신통찮은 전공을 택할 것을, 서른을 넘기도록 제대로 된 연애 한번 해보지 못한 것을, 부모와-특히 아버지와-관계가 좋지 않아 경제적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한 것을, 그래저래 그 나이 먹도록 원룸 월세를 내며 불안정하게 살고 있는 것을 그녀는 질투했다. (49쪽, 회복하는 인간)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동안 크게 색깔과 형태를 바꾸지 않고 살아가지만, 어떤 사람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몸을 바꾼다. 지난 십 년 동안 내가 만나온 인아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이젠 알 것 같다. (96쪽, 에우로파)

오랜 시간 계속되어온 습관이었으므로, 그 여자는 훈자를 생각하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그 여자가 생각하고 싶은 것은 훈자가 아닌 훈자였다. 훈자가 아닌 훈자를 생각하는 일은 훈자인 훈자를 생각하는 일보다 힘이 들거나 거의 불가능했다. (117-118쪽, 훈자)

먹빛 하늘이 서서히 밝아집니다. 이렇게 푸른빛이 실핏줄처럼 어둠의 틈으로 스며들 때면, 내 몸속의 피도 다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내 의지, 내 기억, 아니, 나라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워집니다. 한차례 파도가 밀려 나간 사이 잠깐 드러난 부드러운 모래펄처럼, 우리가 여기 머무는 시간은 짧은 순간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문득 당신의 그림이 보고 싶어집니다. (153-154쪽, 파란 돌)

가진 건 없지만 걱정도 안 되고, 생활이 단순하니까 마음도 편해......난 아마 나이를 거꾸로 먹나 봐. 이십대엔 머릿속에 온통 그런 생각만 들어 있었거든. 직장, 저축, 집, 가족, 나이에 어울리게 가져야 하는 그런 거. 하지만 이젠 오히려 내 것이란 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시간이며 돈이며 삶이며...... 다 누군가에게 잠깐 빌려다 쓰는 것 같아. (187쪽, 왼손)

모든 일에는 교훈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느 그런 자세로 살아왔다. 서른세 살이 될 때까지 악운이나 과오 앞에서 언제나 침착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든 통찰하고 교훈을 얻으려는 그 습관 덕분이었다. (생략) 난 언제나 그렇게,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감당해내려 하는 어리석음이 단점이었어. 순간적인 판단력도 부족했어. 항시 냉철하여, 때로는 잔인할 수도 있어야 하는데. 교훈이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지 나는 그때 알았다. 인생은 학교가 아니다. 반복되는 시험도 아니다. 내 왼손은 으스러져버렸고, 그게 끝이었다. 배울 것도 반성할 것도 없었다. 어떤 의미도 없었다. (216쪽, 노랑무늬영원)

모든 상황에는 조건이 있다. 우리의 평화는 내 건강을 전제한 것이었다. 조건이 달라지면 상황도 달라지낟. 그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만일 내가 그 사고로 죽었다면 우리의 다정함이 더럽혀지지 않았을 테지만, 나는 살아남았다. 나는 지겹도록 아팠고, 내가 지겨운 만큼 그도 지져워했다. 나를 지겨워하는 그가 나도 지겨웠다. 서로의 얼굴이 지겨워서 종종, 암묵적으로 서로의 눈길을 피했다. (234쪽, 노랑무늬영원)

만나고 싶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의 그가 아니라, 그때의 그를, 아니, 실은 그때의 나를, 그 여자를. 고집 세고, 무엇에도 물들지 않은, 그래서 성숙하지 않은 그 여자를. 그러다가, 뜻밖에도 불에 덴 듯 깨닫는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자신을. 그, 아무것도 모르던 때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거라고 생각하는 자신을. (284쪽, 노랑무늬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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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다는 것 - 묻고 응답하고 실천하는 믿음
강영안 지음 / 복있는사람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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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믿음이 과거에 중심을 두고 있고 소망이 미래에 중심을 두고 있다면, 사랑은 현재에 중심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믿음이 과거에만 머물고 소망이 미래에만 머물며 사랑이 현재에만 머문다고 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3:13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것인데"라고 말합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이기 때문에 미래에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현재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앞서고 무엇이 바탕이 되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믿음의 결과가 사랑이고 사랑의 결과가 소망이라고 말하겠습니다. (17쪽)

순서로 보자면, 우리 속에 먼저 믿음이 심겨지고, 이로부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나오고, 이를 통해서 소망이 가능합니다. (20쪽)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믿음은 단순한 믿음의 내용을 수용하거나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삶의 방식‘a way of life의 변화로 드러납니다. (34쪽)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앞에서 잠시 언급하나 대로 삭개오는 자기 집에 머물러 온 예수께 자신이 가진 재산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혹시 부당하게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아 주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참된 믿음을 갖게 된 사람이 보일 수 있는 행동입니다. (60쪽)

그러므로 사실은 예수께서 먼저 찾아 나섰고, 삭개오에게도 찾아 나서도록 열망을 불어넣어 주신 것입니다. 이 열망이 곧 믿음이 되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면서, 동시에 예수를 만나 그분을 알고자 찾아 나서는 열망의 결과입니다. (중략) 오늘 우리에게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어떠한 반응을 보일까요? 예수를 우리 삶의 처소에,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실까요? 그리하여 그분이 걸어가는 삶의 길을 따라 걸어가게 될까요? 아니면 우리 삶에 오시되,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는 문제들을 해결해 주고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우리가 원하는 일은 우리에게 맡겨 두기만을 원하게 될까요? (66-67쪽)

‘내 안에 삭개오가 했던 것처럼 그분을 찾고 탐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가?‘ 이미 예수를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예수를 더욱 알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알고 그분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에 관한 정보를 가진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69쪽)

생각하는 단계를 통해서 예수가 누구인지, 나는 누구인지, 만일 내가 나에게 전해진 메시지를 수용하면 그것이 나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생각하는 단계에 들어섭니다. 나의 희망과 두려움이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지적으로 알고 동의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무엇보다도 내가 절실하게 원하고, 내 자신을 맡기고 의탁하며 신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83쪽)

내가 타자에게 열릴 때, 타자가 나를 찾아와 줄 때, 타자에게 귀 기울이고 타자의 말을 들을 때,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스스로 생각하고 결단함으로 나는 믿음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91쪽)

하나님께서는 삶의 모든 부분에서, 다시 말해 도덕적이고 법적이며 사회적인 정의와 공의를 이스라엘 사람들이 실천하시기를 원했습니다. (128쪽)

사람이 의롭게 됨 곧 의인이 되고 그리하여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은, 유대인처럼 율법을 따름으로나 이방인처럼 양심을 따름으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다는 것을 바울은 로마서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앞서고, 그로 인해 ‘의롭다 하심‘이 있고, 그 뒤에에 비로소 의로운 사람 곧 의인에게 기대할 수 있는 정의롭고 공평한 행위가 가능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윤리의 독특성입니다. (136-137쪽)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제는 내 뜻대로 살지 않고,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의 진리로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윤리가 있습니다. 이 윤리는 자연적 본성에 따라 나 중심으로 살아가던 삶에서 하나님 중심과 이웃 중심으로 삶의 축이 바뀐 윤리입니다. (151쪽)

이 믿음은, 단 한 번의, 한 순간의 믿음일 뿐만 아니라 처음 믿을 때 생긴 믿음이 죽을 때까지 쉬지 않고 삶의 실천을 통해 지탱되고 유지되는 믿음입니다. 이때 실천은 믿음에 근거를 둔 실천이고 믿음은 실천으로 열매 맺는 믿음이라 하겠습니다. 바울처럼 우리도 이 땅에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 고백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153쪽)

믿음은 한번 믿고 ‘아멘‘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믿었으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믿는지, 왜 믿는지, 어떻게 믿어야 할지, 끊임없이 묻고 따지고 알기를 계속 추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믿음은 지성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잘 믿기 위해서 더욱더 지성을 요구합니다. (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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