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무늬영원 - 개정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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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마,라고 그때 말했어야 했다. 그러지 마. 우리 잘못이 있다면 처음부터 결함투성이로 태어난 것뿐인걸.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설계된 것뿐인걸. 존재하지 않는 괴물 같은 죄 위로 얇은 천을 씌워놓고, 목숨처럼 껴안고 살아가지 마. 잠 못 이루지 마. 악몽을 꾸지 마. 누구의 비난도 믿지 마. (35쪽, 밝아지기 전에)

당신이 이해할 수 없었던 점은, 그녀가 질투한 것들이 어김없이 당신의 결점들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당신이 고지식하고 고집이 센 것을, 그래서 신통찮은 전공을 택할 것을, 서른을 넘기도록 제대로 된 연애 한번 해보지 못한 것을, 부모와-특히 아버지와-관계가 좋지 않아 경제적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한 것을, 그래저래 그 나이 먹도록 원룸 월세를 내며 불안정하게 살고 있는 것을 그녀는 질투했다. (49쪽, 회복하는 인간)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동안 크게 색깔과 형태를 바꾸지 않고 살아가지만, 어떤 사람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몸을 바꾼다. 지난 십 년 동안 내가 만나온 인아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이젠 알 것 같다. (96쪽, 에우로파)

오랜 시간 계속되어온 습관이었으므로, 그 여자는 훈자를 생각하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그 여자가 생각하고 싶은 것은 훈자가 아닌 훈자였다. 훈자가 아닌 훈자를 생각하는 일은 훈자인 훈자를 생각하는 일보다 힘이 들거나 거의 불가능했다. (117-118쪽, 훈자)

먹빛 하늘이 서서히 밝아집니다. 이렇게 푸른빛이 실핏줄처럼 어둠의 틈으로 스며들 때면, 내 몸속의 피도 다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내 의지, 내 기억, 아니, 나라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워집니다. 한차례 파도가 밀려 나간 사이 잠깐 드러난 부드러운 모래펄처럼, 우리가 여기 머무는 시간은 짧은 순간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문득 당신의 그림이 보고 싶어집니다. (153-154쪽, 파란 돌)

가진 건 없지만 걱정도 안 되고, 생활이 단순하니까 마음도 편해......난 아마 나이를 거꾸로 먹나 봐. 이십대엔 머릿속에 온통 그런 생각만 들어 있었거든. 직장, 저축, 집, 가족, 나이에 어울리게 가져야 하는 그런 거. 하지만 이젠 오히려 내 것이란 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시간이며 돈이며 삶이며...... 다 누군가에게 잠깐 빌려다 쓰는 것 같아. (187쪽, 왼손)

모든 일에는 교훈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느 그런 자세로 살아왔다. 서른세 살이 될 때까지 악운이나 과오 앞에서 언제나 침착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든 통찰하고 교훈을 얻으려는 그 습관 덕분이었다. (생략) 난 언제나 그렇게,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감당해내려 하는 어리석음이 단점이었어. 순간적인 판단력도 부족했어. 항시 냉철하여, 때로는 잔인할 수도 있어야 하는데. 교훈이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지 나는 그때 알았다. 인생은 학교가 아니다. 반복되는 시험도 아니다. 내 왼손은 으스러져버렸고, 그게 끝이었다. 배울 것도 반성할 것도 없었다. 어떤 의미도 없었다. (216쪽, 노랑무늬영원)

모든 상황에는 조건이 있다. 우리의 평화는 내 건강을 전제한 것이었다. 조건이 달라지면 상황도 달라지낟. 그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만일 내가 그 사고로 죽었다면 우리의 다정함이 더럽혀지지 않았을 테지만, 나는 살아남았다. 나는 지겹도록 아팠고, 내가 지겨운 만큼 그도 지져워했다. 나를 지겨워하는 그가 나도 지겨웠다. 서로의 얼굴이 지겨워서 종종, 암묵적으로 서로의 눈길을 피했다. (234쪽, 노랑무늬영원)

만나고 싶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의 그가 아니라, 그때의 그를, 아니, 실은 그때의 나를, 그 여자를. 고집 세고, 무엇에도 물들지 않은, 그래서 성숙하지 않은 그 여자를. 그러다가, 뜻밖에도 불에 덴 듯 깨닫는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자신을. 그, 아무것도 모르던 때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거라고 생각하는 자신을. (284쪽, 노랑무늬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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