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게, 나는 왜 시를 다시 쓰기 시작했을까?" 혼잣말처럼 기행이 말했다. 그건 어쩌면 불행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는 언제나 불행에 끌렀다. 벌써 오래전부터, 어쩌면 어린 시절의 놀라웠던 산천과 여우들과 붕어곰과 가즈랑집 할머니가 겨우 몇 편의 시로 남게 되면서, 혹은 통영까지 내려가서는 한 여인의 마음 하나 얻지 못하고 또 몇 편의 시만 건져온 뒤로는 줄곧 기행을 매혹시킨 불행이란 흥성하고 눈부셨던 시절, 그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의 결과물이었다. 다시 시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사랑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불행해지는 것쯤이야 두렵지 않아서. (32쪽)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여름, 그는 폐허 위에서 모든 것을 다시 배워야만 했다. 잔해에서 쓸 만한 벽돌을 골라내는 법, 경사진 철로를 따라 밀차를 밀고 가는 법, 물을 많이 마시지 않고도 탈수를 피하는 법...... 그리고 희망과 꿈없이 살아가는 법까지도. (64쪽)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있는 것, 어떤 시를 쓰지 않을 수 있는 것, 무엇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있는 것.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인 능력은 무엇도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었다. 상허의 말처럼 들리는 대로 듣고 보이는 대로 볼 뿌누 거기에 뭔가를 더 덧붙이지 않을 수 있을 때, 인간은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 (85쪽)
"그런 게 바로 평범한 사람들이 짓는 죄와 벌이지. 최선을 선택했다고 믿었지만 시간이 지나 고통받은 뒤에야 그게 최악의 선택임을 알게 되는 것, 죄가 벌을 부르는 게 아니라 벌이 죄를 만든다는 것." (88-89쪽)
"(중략) 그렇다면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삶에 대해 말할 수 있나요? 전쟁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평화를, 상처를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회복을 노래할 수 있나요? 전 죽음에, 전쟁에, 상처에 책임감을 느껴요. 당신 안에서 조선어 단어들이 죽어가고 있다면, 그 죽음에 대해 당신도 책임감을 느껴야만 해요. 날마다 죽음을 생각해야만 해요. 아침저녁으로 죽음을 생각해야만 해요. 그러지 않으면 제대로 사는 게 아니에요. 매일매일 죽어가는 단어들을 생각해야만 해요. 그게 시인의 일이에요. 매일매일 세수를 하듯이, 꼬박꼬박." (165쪽)
그 눈 때문에 깊은 밤, 기행은 이따금 이깔나무와 소나무와 가문비나무의 숲으로 가곤 했다. 숲속에서 귀를 기울이노라면 작고 가벼운 것들이 차곡차곡 쌓이는 소리가 들렸고, 때로는 그것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가지가 꺾이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런 밤이면 숙소로 돌아온 뒤에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눈송이들처럼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던 인생의 자잘한 일들이 시간의 더께를 뒤집어쓴 채 그의 마음을 짓눌렀다. 왜 그래야만 했을따? (170-171쪽)
거기서 불타는 한 권 한 권은 저마다 하나의 세계였다. 당연히 서로의 주장은 엇갈리고, 지향점은 다르고, 문체는 제각각이다. 그렇게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이고, 현실은 그 무수한 세계가 결합된 곳이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세계가 있고, 또 추악한 세계가 있다. 협잡이 판치는 세계가 잇고, 단아하고 성실한 세계가 있따. 어떤 세계는 지옥에, 또 어떤 세계는 천국에 가깝다. 이 모든 세계가 모여 다채롭고도 영롱하게 반짝이는 빛을 발하면 그것이 바로 완전한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책 한 권이 불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인 한 명이 사라리는 게 아ㅣ다. 현실 자체가 몰락하는 것이다. (190-191쪽)
그리고 서희가 사람들로 북적대는 혜산역 대합실 한켠에서, 어떤 두려움이나 부끄러움도 없는 선한 표정으로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라고 시를 읊조리기 시작하던 순간을 기억했다. 그 순간, 자신이 어떤 기분이었는지, 그 시의 한 음절 한 음절이 어떻게 자신의 귀에 와 박혔는지, 그리고 이제 더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그 아름다운 언어가 어떻게 쇠도끼 날처럼 자신의 머리통을 내리쳤는지. 그래서 어떻게 자신과 시를 둘로 쪼개놓았는지. 이제 시는 자신의 것도,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불행과 시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214쪽)
기행은 밤만 계속 이어지는 북극의 겨울을 생각하고, 그런 밤을 처음 맞이하는 어떤 사람이 있어 그가 아침과 빛을 간절하게 희망하게 되는 것을 생각했다. 또 이 세상에 태어나 어른들이나 책에서 배운 바와 마찬가지로 그 밤에도 끝이 있으리라는 것을 그가 믿는 것과, 그 믿음에도 불구하고 기나긴 밤 안에서 그가 죽게 되는 것을 생각했다. 그때에는 기나긴 밤, 깊은 어둠은 무심하게도 계속 흘러가겠지. (2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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