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곳이 생겼다 - 호원숙의 여행 이야기
호원숙 지음 / 마음산책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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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번 여행은 어머니에 대한 관찰도 포함된다. 어머니에 대한 살뜰한 배려와 돌봄보다는 멀리서 어머니를 바라보는 것이 좋다. 또 남편에 대한 연구, 앞으로 여생을 어떻게 풍요롭게 잘 지낼 것인가를 그의 행동을 보고 연구한다. 그러나 나의 그런 생각은 곧 부질없다고 느껴진다. 그냥 보는 대로 느끼고 마음을 풀어놓자. 연구할 필요도 없고 관찰은 또 무슨 필요? 기운이나 느끼고 오자. (19-20쪽)

나라야니 강을 건넌다. 어머니가 먼저 배를 탄다. 강을 건넌다는 것은 무엇인가. 마치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연습 같다. 안개에 싸여 폭이 그리 넓지 않은 강이건만 아득하다. 아침이기 때문인가 모두들 조용하다. 천천히 노를 젓는 소리와 끼룩끼룩 오리들 소리도 이승에서 들리는 소리 같지 않고 마치 환청과 같다. (44쪽)

시내에서 떨어진 숙소로 가는 길은 비포장도로로 자작나무 숲이 쭉쭉 뻗어 밤인데도 희끗희끗 빛을 내며 번득인다. 피곤감이 사라지며 눈이 번쩍 뜨인다. 시베리아의 자작나무 숲이구나. 이 숲을 보러 온 것이다. 야생동물의 눈처럼 번드깅는 하얀 자작나무는 정신이 번쩍 나게 하고 가슴이 서늘해지는 힘이 있다. 그냥 하얀 것이 아니라 마치 나무마다 조각을 한 듯 날카로운 문양이 들어 있다. (96쪽)

자신의 실수로 카메라를 잃어버렸는데 누구를 탓하랴. 너무 아낀 것도 죄라면 죄다. 물건에 대한 지나친 애정도 죄다. 꽃에 대한 지나친 친밀감도 잘못이라면 잘못이다. 그냥 바라보았어야 했다. 예쁜 꽃들을 멀찍이서 바라보며 유유히 걸어갔어야 했다. 머릿속에 담아두었어야 했다. 악착같이 내 물건에 담아두려고 했던 건 소유욕 때문이었다. (103쪽)

내가 이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것이 길이다.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길, 나라와 나라를 건너가는 길을 보고 싶었다. 버스나 기차 속에서 하염없이 밖을 내다보며 동경했던 유럽의 땅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여행의 목적은 충분했다. (123쪽)

너무 멀리 왔나 보다. 집 생각을 하니 아득하다. 생각을 하려 해도 잘 되지 않는다. 그냥 여행에 집중하자고 스스로에게 타이른다. 다행히 모두들 무사히 내려 기다리는 버스를 탄다. (164쪽)

폼페이 유적 무너진 집터에서 주는 비애감도 없었다. 그러나 그 성에서 내려다보이는 불가리아의 집들과 강들이 사랑스러웠다. 역사적인 유적이 감동을 자아내려면 시간과 예술성 그리고 역사적인 이야기가 있어야 하는 것 같았다. (173쪽)

솔직히 말하면 이런 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혼자서 멍하니 기다리는 시간. 나는 인천공항에서 두 시간 가까이 어정거리는 시간을 즐긴다. 약간의 고독감도 좋지 않은가. 비행기 안에서 주리를 트는 시간도 그리 나쁘지 않다. 이번 여행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상상해본다. (202쪽)

가이드는 내리막길이 힘들다고 했다. 그리고 길이 없어 등산 가이드를 꼭 따라가야 한다고 했다. 타국의 산속, 길 없는 길을 간다. 끝이 보이지 않는 돌밭에 길이 있을 수 없다. 눈물이라도 찔금찔금 흘리니까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어떻게 되겠지 뭐 하는 배짱이 생긴다. 앞서가는 여자들이 참 대단하게 느껴진다. (256쪽)

여행에서는 무엇보다도 잔재미가 중요하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유럽의 역사나 이슬람과 기독교의 종교전쟁이나 패권의 역사보다는 골목 바닥에 깔린 반들반들한 돌의 감촉을 더듬는 것이 좋다. 그 돌바닥이 알고 있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는 것도 좋다. (273쪽)

샤울레이 십자가 언덕으로 간다. 메밀밭 유채밭의 넓은 벌판에 십자가 무더기 언덕이 있다고 한다. 수백 년 동안 박해로 죽은 사람, 무덤도 없이 어딘가에서 죽어간 사람을 위해 사람들이 십자가를 갖다 놓아 언덕을 이루었다. 그 십자가의 수효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2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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