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지음, 이다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20년 4월
평점 :
품절


트와일라잇 무도회장에 흑인은 없다. 농가 어린이들의 얼굴에는 무언가 충격과 각성의 표정이 어려 있다. 우리 백인이 이렇게 춤을 출 수 있다니 하는 반응이다. (중략) 이 공간에는 인종차별은 아니지만 공격적인 백인다움의 분위기가 흐른다. 중서부 시골에서 열리는 대개의 공공 행사에서 흔히 느낄 수 있는 분위기다. 흑인이 참가한다고 해서 푸대접을 받지는 않겠지만 그보다 흑인은 이런 곳에 올 생각조차 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다. (83쪽)

린치의 영화가 보여주는 이처럼 기이한 ‘진부한 일상의 아이러니‘의 해체는 내가 세상을 바라보고 분류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었다. (중략) 린치적인 표정은 상황이 도저히 정당화할 수 없는 시간 동안 길게 유지되어야 한다. 흉측한 채로 그대로 고정된 채 동시에 한 열일곱 가지 별개의 의미를 드러내기 시작해야 한다. (134-135쪽)

린치의 영화에 ‘영화의 해석은 필연적으로 다각적이다‘ 같은 요점이 있다고 결론짓는다면 큰 실수다. 린치의 영화는 그런 영화가 전혀 아니다. 유혹적이지도 않다. 적어도 상업적인 의미에서는 편안하거나 선형적인 영화가 아니며 하이콘셉트, 혹은 ‘기분이 좋아지는‘ 영화도 아니다. (중략) 우리가 어떤 수준에서든 영화가 우리로부터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우리는 특정한 내부적 방어 체계를 세워 우리 자신을 얼마나 내어줄지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요점, 혹은 쉽게 알아챌 수 있는 의도가 없는 린치의 영화는 이런 잠재의식의 방어 체계를 해체하고 다른 영화와 달리 린치가 우리 머릿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한다. 그래서 가장 훌륭한 린치의 영화들은 종종 감정을 동요하게 만들고 악몽을 꾸게 하는 것이다. (147-148쪽)

무의식을 전달하기 위한 진정한 매체는 언어가 아닌 영상이며, 그 영상의 경향이 사실주의든 포스트모더니즘이든 표현주의든 초현실주의든, 무엇이 됐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진실로 느껴지느냐, 전달받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대박을 터트리느냐 하는 것이다. (194쪽)

물론 이런 혐오의 일부는 손쉽게 설명 가능하다. 질투, 우상 파괴, 정치적 올바름의 반발, 그리고 우리 부모들 상당수가 업다이크를 존경한다는 사실, 부모가 존경하는 대상을 비방하기는 쉽다. 그러나 우리 세대의 상당수가 업다이크와 기타 GMN을 싫어하는 진정한 이유는 이 작가들의 급진적 자아도취, 나아가 자아도취적인 자신과 등장인물에 대한 무비판적 찬양과 관련이 있다. (216쪽)

수학이 일반적으로 예술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이유는 그 미를 감상하기 위해 너무 많은 피라미드적 훈련과 연습이 필요하기 때문일 수 있다. 수학은 학습된 취향의 궁극에 있을지 모른다. 또한 수학의 진리가 절대적이고 전적으로 추상적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여전히 이 분야를 무미건조하다고 생각하며 수학을 하는 사람들을 사회성 떨어지는 괴짜라고 생각하는 것일 수 있다. (중략) 낮은 수준의 수학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키는 기이한 공포와 불쾌감이야말로 수학 멜로드라마의 대두를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게 되는 이유다. 이 장르가 순수수학에 생명을 불어넣고 이 분야의 비상한 아름다움과 열정을 평범한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면 독자들에게도 수학에도 이로울 것이다. (233-235쪽)

글을 쓸 때 픽션은 더 겁이 나지만 논픽션은 더 어렵다. 논픽션은 현실에 기반하고 있고 오늘날 느껴지는 현실은 압도적으로, 회로가 터질 정도로 거대하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반면 픽션은 무에서 나온다. 그런데, 말하자면, 사실 두 장르 모두 겁이 난다. 둘 다 심연 위에 걸친 줄을 타는 느낌이다. 그런데 그 심연이 다르다. 픽션의 심연은 침묵, 허무다. 반면 논픽션의 심연은 ‘완전 소음‘, 즉 모든 개별 사물과 경험의 들끓는 잡음, 그리고 무엇을 선택적으로 돌보고 표현하고 연결할지 어떻게, 왜 할지 등에 대한 무한한 선택의 완전한 자유다. (265쪽)

이 수상집의 작가들은 같은 말을 더 잘, 더 간결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내가 서비스적 ‘가치‘라고 할 때 그것이 무슨의미인지는 지금까지 말한 대로이며, 정치 문제나 갈등을 빚는 문제와 동떨어진 주제에 관한 에세이들도 여기에 해당된다. 여러 에세이들이 단지, 가장 높은 경지의 예술적인 지성을 가진 사람들이 특정한 사실 집합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중략) 독자 여러분의 ‘결정자‘가 생각하는 ‘최고‘를 가장 솔직하고 편파적으로 정의한다면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이 글들은 내 눈에 보이는 대로의 이 세상에서 내가 사유하고 살아가고 싶은 방식의 본보기, 거푸집이 아닌 본보기다. (280-28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