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그림자의 춤
앨리스 먼로 지음, 곽명단 옮김 / 뿔(웅진)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올해 노벨 문학상 발표가 있기 전까지 그녀의 이름도, 그녀의 작품도 접해본 적이 없다.

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은데, 출판 시장에서 단편보다는 장편을 선호하고 있는 상황에 이 작가는 단편을 더 많이 써왔다고 하고, 노벨문학상 수상자중 최초의 단편문학작가라고 하니 읽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다.

작가와 작품에 대해 이 정도밖에 모르는 상태에서 책의 첫 페이지를 여는 마음이란, 마치 소개팅 나갈 때의 기분과 비슷하다고 할까?

모두 열 다섯 편의 단편이 실려있는 이 책의 첫 작품 <작업실>의 첫 문장은 언젠가도 페이퍼에 올린 적 있다.

"내 삶을 해결할 방법이 불현듯 떠오른 것은 어느 날 저녁 셔츠를 다림질하고 있을 때였다."

이 문장부터 그냥 마음에 들었다. 평범해 보이는 누구에게도 살면서 해결해야할 문제는 있다는 것을 말해주어 좋았고, 그 문제의 실마리를 셔츠를 다림질하는, 즉 소소한 일상적 행위 가운데 떠올렸다는 것도 좋았다.

그렇게 시작한 <작업실>. 평범한 주부로 살아오며 꿈꾸는 건 가족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는 나만의 시간, 나만의 방이다. 자기만의 작업실을 갖는다는 건 자기 존재감을 다시 세우는 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부푼 기대로 시작하는 작업실 생활에 걸려오는 뜻하지 않는 방해 공작에 여자는 결국 작업실을 나오고, 수십년 가족에 대한 노력 봉사로도 이런 호사를 누리는 댓가로 불충분한가 생각되어 우울해진다.

특별한 이야기 소재를 이용하기보다, 누구나 겪었을 만한 생활의 한 장면을 끌어다가 소재로 쓰되, 누구와도 다른 일 처럼 쓰는 이 작가의 특징은 고달픈 가장인 아버지를 어린 딸의 눈으로 그린 <떠돌뱅이 회사의 카우보이>에서도 드러난다. 보잘 것 없는 일로 식구들을 먹여살리는 아버지에게도 젊은 날이 있었고 그때의 꿈은 지금과 달랐음을,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가 아버지가 옛 지인인 여자를 우연히 만나는 자리에서 눈치 채는 어린 딸.

<휘황찬란한 집>이라는 제목은 역설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듯 한데, 아무 말 없이 집을 나가버린 남편이 언젠가 돌아올지 모른다는, 희망도 아니고 염려도 아닌 그 무엇때문에 다 낡아가는 집을 떠나지 못하는 할머니의 이야기이다. 동네 분위기를 해치고 수준을 떨어뜨린다는 이유로 할머니를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고자 하는 동네사람들의 모습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는 우리들의 모습, 우리 사회의 모습이 아닌지. 제목 (원제는 The shining Houses)은 쓰러져가는 노인의 집을 제외한 다른 집들을 가리키는 것일까.

<태워줘서 고마워>까지 읽고 나니 작가의 특징이 어느 정도 파악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처음의 <작업실>을 제외하곤 어린아이나 청소년이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끌고 가는 형식이라는 것. 그리고 제목에 주목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작업실>처럼 제목이 작품의 내용이나 키워드를 나타낼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이야기 중에 잠깐 등장하는 어떤 소재를 제목으로 세워 간접적으로 주제를 대변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보통은 첫문장이나 마지막 문장에 주제를 담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가의 경우엔 이야기를 다 쓰고 마지막으로 제목을 정하며 마침표를 찍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룻강아지 치유법>은 이 책에 실린 단편중 그래도 가볍고 유쾌한 꽁뜨 느낌이 강한 단편이었지만 그래도 다 읽고 난 후다시 앞부분을 들춰봐야 했던 건 제목의 의미를 내용과 연관지어 다시 생각해봐야 했기 때문이다.

<죽음같은 시간>을 읽으면서 마음이 아팠던 것은, 네 아이중 막내를 사고로 잃은 여자에 대한 동정심보다는, 아홉살의 나이로 동생 셋을 보살펴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던 첫째 아이 퍼트리샤가 막내 동생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해 죽게 했다는 죄책감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그리고 엄마의 슬픔이 자기에 대한 미움으로 해소되고 있는 것을 견디며 다른 곳에 보내질까봐 발버둥 치는 모습때문이었다. 제목의 '죽음같은 시간'이란 자식을 잃은 엄마가 견디는 시간이 아니라 겉으로 태연해야했던 아홉살 아이가 견뎌내고 있는 시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나는 그렇게 해석했다.

<사내아이와 계집아이> 역시 소재 자체는 흔하다고 할 수 있으나 읽고 난 후의 느낌은 그렇지 않다. 아버지의 여우목장일에 관심을 가지고 그 일에 자기고 끼고 싶어하는 적극적인'여자아이'와, 부모의 기대와는 달리 겁많고 서투르고 소심한 '남자아이', 이 남매의 이야기이다. 작가가 하고 싶은 얘기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대신 어떤 간접적인 사건 (예를 들면 여우의 먹이로 쓰기 위해 말을 잡는 과정)을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하는데 오히려 치중하면서, 그러면서도 읽는 사람에게 작가의 의도를 부족함 없이 전달시키는 수법이 놀라왔다. 아이가 무엇에 관심있고 무엇을 잘 하는지보다는, 여자로 태어났느냐 남자로 태어났느냐에 따라 모든 일의 결과가 다르게 해석된다는, 어떻게 보면 흔한 이야기를 짧은 이야기이지만 큰 여운을 남기게 썼다. 여기까지 읽은 중 최고.

<그림엽서>는 다른 작품과 달리 어린이가 아닌 어른이 화자로 나온다. 당장은 억울하다 생각될지라도 소란피우기보다는 그냥 잠자코 살다보면 그냥 살아진다는 말은 남에게 참 편하게 던지는 말이면서, 틀린 말도 아니라는 것을, <붉은 드레스>에서는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작은 사건 하나에 의해 사람의 마음은 천국과 지옥을 넘나들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주일 오후>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흔한 소재의 이야기이지만 처음 읽는 듯한, 처음 발견하는 듯한 느낌을 주게 쓰는 것이 이 작가의 특징이라는 것이 이쯤 오면 확실해진다.

<어떤 바닷가 여행>은 제목과 다르게 실제 이야기 속에서 그 누구도 여행을 가는 사람은 나오지 않는다. 적어도 일차적인 의미의 여행이라면. 할머니, 이모와 함께 사는 여자아이 메이에게 할머니는 보호막인 동시에 자유를 구속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할머니의 죽음, 할머니의 승리, 손녀 메이의 자유가 서로 맞물려 있는 가운데 보호와 구속은 종이 한장 차이, 자유로움과 막막함도 종이 한장 차이였다.

<위트레흐트 평화조약>라는 제목은 주인공의 어릴 때 노트 한 귀퉁이에 써있던 구절이다. 아마 학교에서 그것에 대해 배운 날이었겠지. 되돌아보고 싶지 않던 지난 날 자기 삶의 흔적이 있는 곳을 어른이 되어 다시 찾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 나라 작가 오정희의 단편이 연상될 줄이야. (Utrecht는 실제로 '위트레흐트'보다는 '유트레흐트'에 가까운 발음으로 알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이자 마지막 작품 <행복한 그림자의 춤>은 다른 사람에겐 그림자로밖에 보여지지 않는 노선생의 행복, 속물적인 세상의 잣대 속에서도 꿋꿋하게, 여전히 춤추게 하고 싶은, 마지막 순수를 그렸다고 할까.

 

그녀를 일컬어 우리 시대의 체호프라고 한 뉴욕타임스의 평을 과장이라고 하고 싶지 않다. 책장이 휙휙 넘어가는 재미를 추구하며 쓰지 않았을 것 같고, 세상의 이치나 진실이 무엇이라고 가르치려는 마음으로 쓰지 않았을 것 같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살아가면서 해결해야할 문제들을, 셔츠를 다림질하는 일처럼 일상의 일을 통해 말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일상을 새로이 '발견'하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기꺼이 별 다섯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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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3-11-08 0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밥을 하거나 빨래를 하거나 다림질을 하는 때에는 참 마음이 차분하고 가라앉으면서, 이때에 여러모로 아름답거나 좋은 생각이 많이 떠올라요. 이런 느낌을 잊지 않고 글로 잘 옮긴 훌륭한 분 같네요.

미국도 서양도 다른 나라도, 아니 지구별에서 남녀를 가르는 눈이 꽤 있는데, 부모들부터 그런 삶으로 지냈으니 아이들을 더 살가이 맞이하지 못할 테지요.

'위트레흐트'는 위트레흐트가 맞아요. 네덜란드말이거든요. 네덜란드 땅이름이고요. 네덜란드말에서 'u'는 '위' 또는 '의 + 우' 소리가 납니다. 다만, 네덜란드말에는 'ㅌ' 소리가 없어요. 모두 'ㄸ'예요. 그러니, '위뜨레흐뜨'로 적어야 네덜란드말대로 제대로 적은 셈이 되어요.

hnine 2013-11-08 08:35   좋아요 0 | URL
Utrecht로부터 온 네덜란드 친구가 있었어요. 저는 네덜란드 말은 한개도 모르는데 그 친구로부터 들은 기억때문에 그렇게 썼네요. 정확하게 하자면 우리 발음의 '유'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위'는 더욱 아닌 것 같아요.

이 작가의 다른 책도 읽어볼까, 혹시 다른 책을 읽고 이 책만큼은 좋지 않아 실망하게 되지 않을까, 망설이고 있는 중이랍니다.
 

 

21

 

 

 

개학을 며칠 앞두고 서울로 올라왔다. 방문을 열자 집안에서는 묘한 냄새가 났다. 비어있는 공간을 채우고 있는 공기는 바깥의 공기와 다른 성질로 바뀌기라도 하는 것인지. 거의 한 달을 비워두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8월 중순은 여전히 한여름이어서 밖에서는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비 오듯 했지만 그래도 다행히 방에 들어와 방바닥에 등을 대고 누우면 시원했다.

매일 아침 카메라를 들고서 마음이 가자고 하는대로 향했다. 미리 계획같은 것은 없었다. 서울 근교 5일마다 선다는 장에도 갔고, 대학로 연극 공연장에도 갔다. 홍대 앞, 그리고 그 뒤의 달동네를 돌아다닐 때에는 같은 하늘 아래 참으로 다양한 인간이 숨 쉬고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상철이, 형민이와 곧잘 가던 카페에도 가보고, 밤이 되면 마치 건물 전체가 하나의 조명 기구처럼 번쩍거리는 영어 학원가도 돌아다녔다. 인사동 뒷골목, 비 오는 날, 그리고 같은 장소를 맑은 날. 얼마나 많은 사진들이 카메라 속에 담기고 있는지 모르고 마냥 눌러대다가 배터리가 다 되거나 메모리가 꽉 찼다는 신호가 들어오면 그것이 그 날 하루의 마감 신호가 되었다. 정말 많은 사람을 보았다. 사람이 사는 여러 가지 모습을 보았다. 집으로 돌아오면 찍어온 사진들을 다시 보며 파일로 정리했다. 내 컴퓨터 속에는 새로운 폴더가 하나 둘 늘어갔다. 어떤 폴더에는 ‘블루의 안과 밖’이라는 이름이, 어떤 폴더에는 ‘광시곡’, 어떤 폴더에는 ‘꿈을 찍는 사진관’이라고. 폴더에 사진이 쌓여가듯이 하루가 그렇게 차곡차곡 쌓여갔다.

몇 개의 사진을 골라내어 USB에 옮겼다. 현상소에 가서 그 사진들을 출력해왔다. 그 다음부터는 밖에도 나가지 않고 집안에 틀어박혀 그림을 입혔다. 사진과 사진을 이어 붙여 콜라주를 하기도 하고, 예전에 해본 것처럼 사진의 일부를 도려내거나 못으로 긁어내어 질감의 변화로 느낌을 달리해보기도 했다. 사진 위에 표백제를 몇 방울 떨어뜨려 탈색의 효과를 내보기도 했다. 사진을 찍는 것과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가끔 엄마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아니, 가끔이 아니라 자주, 그러니까 하루에 두 번 정도. 엄마의 품속을 혼자서라도 느껴보려고 애써보았고, 그렇게 오롯이 앉아 있던 엄마의 모습을 눈앞에서 그려보기도 했다. 이전의 내 기억 속의 엄마는 누워계신 모습일 때가 대부분이었다. 누워계신 외의 다른 모습으로 그려질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 해 여름, 나는 그렇게 나고 있었다. 지난 일들을 떠올리며 지금의 나와 연관 지어 볼 때도 있었다. 그것이 앞으로 어떻게 이어질지 생각해볼 때도 있었다. 그런데 그건 아주 가끔이었고, 도리질 치지 않고도 어느 새 나는 하던 일로 돌아와 있었다. 정신 팔려 있었다고 해도 되고, 몰입해있다고 해도 될 것 같은 시간들. 그리고 가끔, 엄마가 보고 싶었다. 산 속의 외딴 방에 오롯이 앉아있던 엄마,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던 엄마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었다.

보고 싶다고 바로 볼 수 없기는 하지만, 예전과 달리 엄마가 어딘가 멀지 않은 곳에 계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참 신기하다. 지금 내가 보고 듣고 겪는 것들이 전부가 아닐 것이다. 나중에 지나서 알게 될 그 길을 지금 나는 지나고 있는 것인지도.

오늘 만든 사진 폴더의 이름은 ‘호두나무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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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3-11-06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꾸준히 노력하시는 님

hnine 2013-11-07 07:35   좋아요 0 | URL
별로 꾸준하지 못해요. 더 잘 써보려다가 그냥 이대로 마치자는 뜻으로 여기에 올리기 시작했답니다.

2013-11-06 15: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

 

 

돌아다닐 때에는 햇빛 따가운지도 모르고 다녔는데 한 바퀴 돌고 돌아오니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찬물을 대야에 담고 거기에 얼굴을 푹 담그기. 이건 어렸을 때 강진이랑 종종 하던 일이다. 시원하다. 머릿속까지 쨍 한다.

“강석 학생, 누가 찾아 왔어.”

보살님 목소리가 얼굴을 담그고 있던 물속을 뚫고 들어왔다.

‘누가?’

물속에서 머리를 드니, 그 잠깐 동안 마치 다른 세계에 있다가 원래 세상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너! 여길 어떻게 알고?”

마담이었다. 저 녀석은 항상 이렇게 귀신처럼 갑자기 나타난다.

그날 우리는 절 주위를 한참 돌아다녔다. 어딜 가도 사람이 한명 이상 눈에 띄는 곳이 없다. 그것도 나이 많으신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이 허리를 구부리고 밭에 앉아 뭔가를 하고 있는게 사람 구경의 전부이다. 동네를 뛰어다니며 노는 아이들이라든지, 가방을 메고 학원에 다녀오는 아이들이라든지, 그런 광경은 좀처럼 구경할 수가 없는 곳.

사람 소리보다 짐승 소리가 더 자주 들리기도 한다. 컹컹 개 짖는 소리, 새벽엔 새 우는 소리, 이름 모를 곤충들이 우는 소리, 꿩 소리.

이런 저런 얘기들을 마담에게 들려주며 한참 돌아다니는 동안에도 마담은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어느 덧 해가 슬슬 넘어가고 있는데도 마담은 돌아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보살님께서 마담것까지 저녁을 차려주시기에 먹고 난 후였다.

“강석이 너한테 할 말이 있어.”

무슨 말이기에 저렇게 할 말 있다고 선전포고를 하고서 꺼내야 할까 궁금했다.

“원래 일정대로면 나 내일 미국으로 떠나야 하는 날이야.”

그때까지도 마담이 무슨 말을 하는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방학 다 끝나가는데 여행이라도 가냐?”

“그보다 더 원래 일정이라면 내가 아니라 네가 미국으로 떠나야 하는거지.”

그제서야 나는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미술대회 본선 출전 자격이 취소되지 않았다면 바로 내일이 그 해외 단기 연수를 떠나는 날이었다. 그런데 그게 마담이랑 무슨 관련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아버지 핑계를 대었지만 사실 꼭 미대에 가서 화가로 이름을 날려보고 싶은건 나야. 중학교때부터 죽어라 학원 다니며 연습했어. 아버지가 못이룬 꿈을 내가 이뤄내고도 싶었고. 그런데 기회는 나처럼 노력한 것도 아닌 너에게로 돌아가는 걸 참을 수가 없었어. 솔직히 죽고 싶더라.”

마담은 내 얼굴 대신 우리가 앉은 개울가의 돌을 하나 집어 바닥에 괜한 줄을 그으며 말을 계속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네가 그동안 하고 다닌 일을 알게 되었어. 싸움질에, 경찰서 출입, 더구나 함께 어울리던 패거리 중 한 녀석이 자살했다는 것 까지. 내가 아버지에게 먼저 그 얘기를 꺼냈지. 그런 경력이 있는데 해외 연수 자격에 문제가 없겠느냐고. 그런 녀석이 외국 나가서도 행실이 바르지 못하면 나라 망신 아니겠냐고.”

듣고 있자니 얼굴로 피가 다 몰리는 것 같았다. 어디, 끝까지 다 들어나보자고 버티고 있었다.

“그 다음부터는 아버지가 다 알아서 하시더군. 대회 측에 문의를 빙자하여 네 과거를 다 알리셨고, 결국 너는 자격이 취소되고, 대타로 내가 가게 되었어.”

그건 나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나 대신 누군가 가겠거니 했는데 그게 마담인 줄은.

“여긴 왜 왔냐?”

내가 궁금한 건 그거였다. 내일 예정대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면 될걸 여기를 찾은 이유를 모르겠어서이다.

“내가 견딜 수 없었어. 이건 아니다 싶었고.”

마담의 목소리가 좀 떨린다 싶었다. 나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여름해인데도 산 속이라 그런지 금방 어두워지고 있었다.

산 속에서 밤이 되면 눈에 안 보이는 바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아주 가만 가만 부는 바람, 그래서 도시 같으면 부는지도 모를 그런 바람의 소리도 들린다. 바람이 나뭇잎을 건드리고 가면 나뭇잎 소리가 나고, 물을 밀고 가면 물소리가 난다.

마지막 버스도 놓친 마담과 내 방에 나란히 누워서 바람소리 물소리를 듣고 있었다. 마담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니면 잠이 들었는지 아무 기척이 없었다.

그러다 설핏 잠이 들었나 싶었는데 밖에서 뭔가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에 깜짝 놀라 깨었다.

‘뭐지?’

뭐가 땅으로 떨어지는 소리였는데 이 밤중에 뭐가 떨어진단 말인가? 옆에 보니 마담은 그 소리에도 깨지 않고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나가보기가 웬지 좀 겁이 나서 그냥 누워있기로 했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방문 밖에 뭐가 떨어져있는지부터 확인하리라.

 

다른 날보다 늦잠을 자고 일어난 아침. 방문을 열고 밖을 나가보았지만 바닥엔 아무 것도 특별한 것이 떨어져 있지 않았다. 뒹구는 나뭇잎, 나뭇가지들, 그뿐이었다.

아침을 차려다 주신 보살님께 여쭤보았다. 자다가 방문 밖에 뭐가 쿵 떨어지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고.

보살님은 빙그레 웃으셨다.

“나가 봐. 뭐가 떨어져 있나.”

“일어나자마자 봤지요. 떨어진 거 없다니까요.”

“한 밤중에 저 호두나무에서 꽃이 떨어지면 그렇게 크게 들릴 때가 있지.”

“네? 꽃이 떨어지는 소리였다고요?”

내가 머물고 있는 방 바로 앞에는 커다란 호두나무가 있기는 하다. 그런데 나는 그때까지 호두나무 꽃이 피었는지, 꽃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눈여겨 본적이 없었다.

나가보니 정말 꽃이라고 불러줄까 싶은, 푸른 빛 도는 꽃송이가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게 떨어지면서 그렇게 큰 소리를 냈을 것 같지 않았다.

보살님이 방에서 나오시며 한 말씀 덧붙이며 가셨다.

“목 뒤에 빗방울 떨어지는 것이 어떤 때는 죽비가 한 대 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는 법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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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눈을 떴을 때 옆에서 누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장씨 아저씨였다.

“이제 깼구나. 지금이라도 깨워서 병원에 데리고 가야하나 하던 참인데.”

장씨 아저씨가 내 방을 다녀가신 후 나는 심한 감기인지 몸살인지를 모를 증세로 열이 오르고 땀에 젖어 끙끙 앓았던 모양이다. 만져보니 입고 있는 옷이 축축하게 젖어 있고 내 옆에는 물수건과 작은 대야가 놓여 있었다. 아저씨가 방에 다녀가신 다음 날인 어제 낮에 비를 맞으며 산 속을 돌아다녔던 기억이 났다.

‘꿈이었구나......’

한잠 푹 자고 나서 이제 괜찮다는 말에 장씨 아저씨는 그래도 못 미더워하시더니 감기 몸살 약을 주시고는 내가 약을 먹는 것을 보시고서야 아저씨 방으로 돌아가셨다.엄마를 보았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엄마가 나에게 와주셨다. 열 살 때 엄마는 영영 나에게서 떠난 줄 알았는데 엄마는 나를 보고 계시다. 내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를 지켜주고 계시다.

꿈은 나에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누구든 꿈을 꾼다. 잠자는 동안 꿈을 꾸고 잠에서 깨어나면서 꿈에서도 깨어나지만 나는 꿈에서 깨어났으되 깨어났다고 할 수 없는 이상한 기운 속에서 지내고 있었다. 머릿속 어느 한편은 아직도 꿈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어서 항상 꿈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밥을 먹을 때에도 책을 볼 때도 산책을 할 때도, 심지어는 누구와 얘기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꿈에서 벗어나있는 순간은 없었다. 그건 마치 누군가 늘 나를 지켜봐주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고, 내가 나가 있는 동안에도 집에 항상 나를 기다려주는 누군가가 있는 그런 느낌이기도 했다. 나에겐 참 낯선 느낌이었는데 차츰 나에게 이상한 힘을 주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일상은 이전과 다를 바 없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걷는데 쓰고 있었다. 카메라는 손에 들고 작은 수첩과 연필은 뒷주머니에 꽂고 웬 종일 쏘다녔다. 오늘은 어디로 가볼까 계획을 세워본 적이 없다. 그냥 내키는 대로, 그야말로 발길이 가는대로, 그날 기분대로 움직여 가면 되었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한, 무언가 카메라에 담을 거리를 찾고 있는 한 심심하거나 지루하지는 않는 법이었다. 내 손에 카메라가 들려 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 이 세상의 빛깔은 같지 않다. 카메라가 없을 때 내 눈에 비치는 이 세상이 무채색이라면 카메라를 들고 있을 때는 그보다 훨씬 다양한 색깔로 보인다. 이렇게 찍은 사진들이 메모리를 꽉 채우면 절 아래 PC방에 가서 내 블로그의 폴더에 옮겨 놓는 것 까지. 그 일을 나는 반복하며 어제 같은 오늘, 어제와 같지 않은 오늘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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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아주 지독한 안개였다. 아니, 안개라기보다는 마치 물속을 걷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앞으로 나가면서 얼굴도 몸도 점점 더 젖어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딜 걷고 있는 것인지 뚜렷하지가 않았다. 아는 길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낯설지도 않은 것 같은, 그런 산길이다. 몸이 점점 더 축축해져 와서 이제 그만 방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 그냥 앞으로 앞으로 걸어 나가다 보면 뭔가 나오겠지 하며 계속 걷다보니 저 앞에 뿌옇게 집인지 암자인지 모를 뭔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안개 속에 잘못 본 것일까? 다시 보아도 분명 연기가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다.‘누가 있어 저기. 누가 살고 있는 거야.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잖아.’

다리 한 짝 들어 올려 걸음을 떼어놓는 것도 쉽지 않다고 느껴져 올 무렵이었다. 아무리 걸어도 바로 눈앞에 보이는 그 연기 피어오르는 집에 가까워지질 않았다. 마치 계속 헛발질을 하고 있던 것처럼. 하지만 이마에선 이렇게 땀이 흐르고 있는데. 이렇게 힘들여 걷고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 걸었다. 그러다가 다리에 뭐가 툭 걸리는 것 같더니 내 몸은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한동안 그러고 있다가 겨우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바로 눈앞에 그 집이 있었다. 다 와서 넘어진 모양이었다. 문고리를 잡아당기기 위해 몸을 간신히 일으키고 있는데 안에서 먼저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고 누군가 나오고 있었다.

엄마다. 엄마였다.

돌아가실 무렵의 그 창백한 얼굴 그대로, 엄마는 거기, 그 집의 방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계셨다.

“엄마! 엄마 맞아요?”

엄마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엄마, 왜 여기 있어요?”

입은 꼭 다문 채 엄마는 그냥 가만히 앉아 나를 보고만 계셨다.

“엄마,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그래요?”

엄마가 무슨 말씀이라도 하셨으면 좋겠는데 그냥 가만히 보고만 계신다.

“엄마, 내가 보고 싶어 왔어요? 그래서 그렇게 쳐다만 보시는 거예요?”

이렇게 말하고는 엄마 무릎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렇게 울지는 않았는데 나는 아이가 된 것처럼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왜 우는지도 모르게 나는 그동안 한참 참았던 눈물 보따리가 터지기라도 한 듯 그렇게 울었다. 그리움이었을까? 아니면 원망이었을까, 외로움이었을까. 나는 어떤 명목 아래 그렇게 눈물을 감추고 살아왔던 것일까.

그때였다.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계시던 엄마가 나를 일으켜 세우신 것은. 내 어깨를 가만히 일으켜 세우셨다. 그리고는 나를 꽉 안으셨다. 그렇게 엄마 품속에 안겨있으니 마치 한데 있다가 따뜻한 집에 들어갔을 때의 느낌이 들었다. 한동안 헤매다가 편안한 쉴 자리를 찾아 앉은 것 같았다.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나는 어쩌면 엄마에 대한 기억을 외면하고 살고 싶었던 지도 모른다. 기억을 떠올려봐야 아무 소용없으니까, 내 자신이 더 찌질 해지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엄마는 나를 계속 보고 계셨나보다. 내가 잘 커나가기를 바라보면서 내 옆에 계셨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그걸 알려주고 싶으셨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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