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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그림자의 춤
앨리스 먼로 지음, 곽명단 옮김 / 뿔(웅진)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올해 노벨 문학상 발표가 있기 전까지 그녀의 이름도, 그녀의 작품도 접해본 적이 없다.
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은데, 출판 시장에서 단편보다는 장편을 선호하고 있는 상황에 이 작가는 단편을 더 많이 써왔다고 하고, 노벨문학상 수상자중 최초의 단편문학작가라고 하니 읽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다.
작가와 작품에 대해 이 정도밖에 모르는 상태에서 책의 첫 페이지를 여는 마음이란, 마치 소개팅 나갈 때의 기분과 비슷하다고 할까?
모두 열 다섯 편의 단편이 실려있는 이 책의 첫 작품 <작업실>의 첫 문장은 언젠가도 페이퍼에 올린 적 있다.
"내 삶을 해결할 방법이 불현듯 떠오른 것은 어느 날 저녁 셔츠를 다림질하고 있을 때였다."
이 문장부터 그냥 마음에 들었다. 평범해 보이는 누구에게도 살면서 해결해야할 문제는 있다는 것을 말해주어 좋았고, 그 문제의 실마리를 셔츠를 다림질하는, 즉 소소한 일상적 행위 가운데 떠올렸다는 것도 좋았다.
그렇게 시작한 <작업실>. 평범한 주부로 살아오며 꿈꾸는 건 가족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는 나만의 시간, 나만의 방이다. 자기만의 작업실을 갖는다는 건 자기 존재감을 다시 세우는 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부푼 기대로 시작하는 작업실 생활에 걸려오는 뜻하지 않는 방해 공작에 여자는 결국 작업실을 나오고, 수십년 가족에 대한 노력 봉사로도 이런 호사를 누리는 댓가로 불충분한가 생각되어 우울해진다.
특별한 이야기 소재를 이용하기보다, 누구나 겪었을 만한 생활의 한 장면을 끌어다가 소재로 쓰되, 누구와도 다른 일 처럼 쓰는 이 작가의 특징은 고달픈 가장인 아버지를 어린 딸의 눈으로 그린 <떠돌뱅이 회사의 카우보이>에서도 드러난다. 보잘 것 없는 일로 식구들을 먹여살리는 아버지에게도 젊은 날이 있었고 그때의 꿈은 지금과 달랐음을,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가 아버지가 옛 지인인 여자를 우연히 만나는 자리에서 눈치 채는 어린 딸.
<휘황찬란한 집>이라는 제목은 역설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듯 한데, 아무 말 없이 집을 나가버린 남편이 언젠가 돌아올지 모른다는, 희망도 아니고 염려도 아닌 그 무엇때문에 다 낡아가는 집을 떠나지 못하는 할머니의 이야기이다. 동네 분위기를 해치고 수준을 떨어뜨린다는 이유로 할머니를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고자 하는 동네사람들의 모습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는 우리들의 모습, 우리 사회의 모습이 아닌지. 제목 (원제는 The shining Houses)은 쓰러져가는 노인의 집을 제외한 다른 집들을 가리키는 것일까.
<태워줘서 고마워>까지 읽고 나니 작가의 특징이 어느 정도 파악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처음의 <작업실>을 제외하곤 어린아이나 청소년이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끌고 가는 형식이라는 것. 그리고 제목에 주목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작업실>처럼 제목이 작품의 내용이나 키워드를 나타낼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이야기 중에 잠깐 등장하는 어떤 소재를 제목으로 세워 간접적으로 주제를 대변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보통은 첫문장이나 마지막 문장에 주제를 담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가의 경우엔 이야기를 다 쓰고 마지막으로 제목을 정하며 마침표를 찍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룻강아지 치유법>은 이 책에 실린 단편중 그래도 가볍고 유쾌한 꽁뜨 느낌이 강한 단편이었지만 그래도 다 읽고 난 후다시 앞부분을 들춰봐야 했던 건 제목의 의미를 내용과 연관지어 다시 생각해봐야 했기 때문이다.
<죽음같은 시간>을 읽으면서 마음이 아팠던 것은, 네 아이중 막내를 사고로 잃은 여자에 대한 동정심보다는, 아홉살의 나이로 동생 셋을 보살펴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던 첫째 아이 퍼트리샤가 막내 동생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해 죽게 했다는 죄책감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그리고 엄마의 슬픔이 자기에 대한 미움으로 해소되고 있는 것을 견디며 다른 곳에 보내질까봐 발버둥 치는 모습때문이었다. 제목의 '죽음같은 시간'이란 자식을 잃은 엄마가 견디는 시간이 아니라 겉으로 태연해야했던 아홉살 아이가 견뎌내고 있는 시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나는 그렇게 해석했다.
<사내아이와 계집아이> 역시 소재 자체는 흔하다고 할 수 있으나 읽고 난 후의 느낌은 그렇지 않다. 아버지의 여우목장일에 관심을 가지고 그 일에 자기고 끼고 싶어하는 적극적인'여자아이'와, 부모의 기대와는 달리 겁많고 서투르고 소심한 '남자아이', 이 남매의 이야기이다. 작가가 하고 싶은 얘기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대신 어떤 간접적인 사건 (예를 들면 여우의 먹이로 쓰기 위해 말을 잡는 과정)을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하는데 오히려 치중하면서, 그러면서도 읽는 사람에게 작가의 의도를 부족함 없이 전달시키는 수법이 놀라왔다. 아이가 무엇에 관심있고 무엇을 잘 하는지보다는, 여자로 태어났느냐 남자로 태어났느냐에 따라 모든 일의 결과가 다르게 해석된다는, 어떻게 보면 흔한 이야기를 짧은 이야기이지만 큰 여운을 남기게 썼다. 여기까지 읽은 중 최고.
<그림엽서>는 다른 작품과 달리 어린이가 아닌 어른이 화자로 나온다. 당장은 억울하다 생각될지라도 소란피우기보다는 그냥 잠자코 살다보면 그냥 살아진다는 말은 남에게 참 편하게 던지는 말이면서, 틀린 말도 아니라는 것을, <붉은 드레스>에서는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작은 사건 하나에 의해 사람의 마음은 천국과 지옥을 넘나들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주일 오후>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흔한 소재의 이야기이지만 처음 읽는 듯한, 처음 발견하는 듯한 느낌을 주게 쓰는 것이 이 작가의 특징이라는 것이 이쯤 오면 확실해진다.
<어떤 바닷가 여행>은 제목과 다르게 실제 이야기 속에서 그 누구도 여행을 가는 사람은 나오지 않는다. 적어도 일차적인 의미의 여행이라면. 할머니, 이모와 함께 사는 여자아이 메이에게 할머니는 보호막인 동시에 자유를 구속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할머니의 죽음, 할머니의 승리, 손녀 메이의 자유가 서로 맞물려 있는 가운데 보호와 구속은 종이 한장 차이, 자유로움과 막막함도 종이 한장 차이였다.
<위트레흐트 평화조약>라는 제목은 주인공의 어릴 때 노트 한 귀퉁이에 써있던 구절이다. 아마 학교에서 그것에 대해 배운 날이었겠지. 되돌아보고 싶지 않던 지난 날 자기 삶의 흔적이 있는 곳을 어른이 되어 다시 찾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 나라 작가 오정희의 단편이 연상될 줄이야. (Utrecht는 실제로 '위트레흐트'보다는 '유트레흐트'에 가까운 발음으로 알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이자 마지막 작품 <행복한 그림자의 춤>은 다른 사람에겐 그림자로밖에 보여지지 않는 노선생의 행복, 속물적인 세상의 잣대 속에서도 꿋꿋하게, 여전히 춤추게 하고 싶은, 마지막 순수를 그렸다고 할까.
그녀를 일컬어 우리 시대의 체호프라고 한 뉴욕타임스의 평을 과장이라고 하고 싶지 않다. 책장이 휙휙 넘어가는 재미를 추구하며 쓰지 않았을 것 같고, 세상의 이치나 진실이 무엇이라고 가르치려는 마음으로 쓰지 않았을 것 같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살아가면서 해결해야할 문제들을, 셔츠를 다림질하는 일처럼 일상의 일을 통해 말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일상을 새로이 '발견'하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기꺼이 별 다섯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