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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구들 - 여성은 왜 원하는가
캐럴라인 냅 지음, 정지인 옮김 / 북하우스 / 2021년 5월
평점 :
르느아르 그림 속의 풍만한 여성의 몸은 왜 현실이 되지 못하는가. 여성의 욕구와 몸은 왜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기 보다 ‘분석’되고 ‘해석’되어야 하는가. 겉으로 나타나는 것 보다 훨씬 폭넓고 오래된 감정, 억압, 문화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 캐럴라인 냅은 자신의 경험을 출발점으로 하여 여자들의 욕구
아래 가려진 비밀을 발굴해내기 위해 고고학자처럼 분투하였고 그 결과로 이 책을 내었다.
제목 '욕구들'이란 원제 ‘Appetites’를
번역한 것으로, 흔히 음식과 관련해서 쓰이는 단어이나 사전 상에서 찾아보면 그보다 넓은 의미를 가졌다. 저자는 우리에게 가득함과 만족, 완전함의 느낌을 주리라고 상상하는 실체와 행동을 Appetites라고
보았고, 번역자는 ‘욕구들’
이라고 번역하여 제목으로 하였다.
우리의 욕구는 무엇일까. 우리가
갖고자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여성 개개인이
체중에 골몰하는 일은 체중 외에 더 복잡다단한 불만의 원인들을 보이지 않게 가리는 역할을 할 때가 많다. 허리선의
상태를 고민하는 것이 영혼의 상태를 고민하는 것보다는 더 쉬운 법이니까. (44)
진짜 욕구를 알아내기란 쉽지 않다. ‘사고’와 ‘성찰’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렵고, 그래서 밖에서 주어진 틀에 쉽게 덮여지며, 갈수록 비대해져가는
소비시장의 확대와 편승하여 간단하게 해결되고 만다.
여성의 몸은
이 사회가 메시지를 쓰는 장소 (로잘린드 카워드 <여성의
욕망>)
태어나서부터 남자 아이는 아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주목받는 반면 여자 아이의 경우엔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에 관하여 뿌리 깊게
인식된다. 그 어떤 존재란 무엇인가. 타인을, 특히 남성을 편리하게 도와주고 지지해주는 것과 관련된 존재이다. 제공자의
이미지.
단 하나의 경우. 사회에서
여성이 주인공이 되는, 여성이 대우를 받는 경우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쇼핑'이다. 여자들로 하여금 내가 주체라는 의식을 느끼게 하고 세계가 나를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것은
쇼핑, 특히 고급 소비재 쇼핑을 하는 순간이다.
저자는 열여덟살에 우연한 계기로 거식증의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 하루 800kcal라는 제한된 식이를 지키는 지독한 결단력으로 지탱해간 고통의 세월이었다. 왜? 거식증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을까. 미래에 대한 불안, 정신적인 불안은 한 종류가 아니라 너무나 다양하고
광범위한 모든 허기들로 작용하였고, 감당하기 어려운 이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하나의 불안 (체중)에 다 집중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굶기와 강박의 의의가 된 것이다. 굶는 것은 괴롭지만 굶어서 괴로운 것보다 다른 사람들이 굴복하는 이 풍성한 음식들을 거부하는
나 자신이 거의 초월적이라고 느끼는 을 택한 것이다.
그 허기가 나에게는
공기와도 같았으며 나는 허기가 선사해주는 의지의 확인이 필요했고 어떤 극단적인 실험 중 실제로 효과를 발견한 과학자가 느낄 법한 조용한 놀라움을
품은 채 허기가 내게 미치는 영향을 측정했다. (168)
이렇게 불안이 왜곡되고 은밀한 방식으로 표현되어야 하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수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큰 발전 없이 여전히 여성들에게 무언가를 주입시키고 가르치는
사회이고 문화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조정 (rowing)을
시작하게 된 것은 모든 결정을 거식증이 내리는 명령에 따랐고 그리고 남아 있던 에너지를 겨우 일에 쏟아부을 수 있던 무렵의 캐럴라인의 삶에 변화를
가져온다.
나는 예전에
여자로서 결코 느껴보지 못했던 무언가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조화롭게 어우러진, 강하고 온전한 하나로서의 몸, 마음과 연결되어 있고
마음에 반응하는 몸, 살아가기에 훌륭한 장소인 몸이었다. (241)
나는 직장에서
여자 화장실로 슬그머니 들어가 거울 앞에서 몰래 이두근을 굽혔다 폈다 했고, 그 모습이 내게 준 작은
전율은 (근육이야!) 한때 야위어가는 내 모습을 보며 느꼈던
전율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것은 자기 돌봄과 자기 파괴의 차이, 내어주는
것과 쥐고 놓지 않는 것의 차이였다. 그 변화는 실로 극적이었다. 음식에
대한 강박관념을 갖게 된 후 처음으로 경험한, 말라가는 것이 아닌 육체적 변화였다. (269)
여성의 욕구는 그 말 그대로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싶은지를 의미해야
한다. 이렇게 사회와 문화에 의해 규정되어 지고, 한번도
우리의 욕구에 의해, 그것을 어떻게 성취하고 경험하고 느끼는지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 어떻게 포장되어야 하는지에 매달려 남에게 찬탄을 이끌어내는 능력을 갖추라고 학습되지 말고 말이다.
남이 원하는 대상이 되기 위해,
생의 소중한 부분을 갈아 넣으며 살고 있는 여성이 아닌 사람, 있을까?
우리가 선택되는
대신 선택할 수 있었다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257)
만약 우리가
만족과 성공의 내적인 척도들 에도 외적인 척도들만큼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문화에서 살기만 했더라면.
동시에 공 아홉
개를 공중에 띄운 채 던지고 받고 해야 한다는 강박을 덜 느꼈더라면, 그리고 그 공들이 바닥에 떨어졌을
때 그토록 쉽게 자신을 비난하는 성향이 덜했더라면.
만약 우리가
실제로는 상당히 크지만 개탄스러울 정도로 잘 사용하지 않는 우리 자신의 힘을 행사하기만 했더라면.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의 관점과 용어로 욕망을 정의하기만 했더라면.
만약 우리가
우리의 외양에 대해, 우리의 몸무게에 대해, 우리의 옷차림에
대해 너무 그렇게 신경 쓰지만 않았더라면. (298)
선진 국가에서 태어나 자라고 교육받은, 현대 여성도 이런 생각을 한다.
우리는 지금도 끊임없이 읽고 배우고 느낀다. 그리고 글로 말로 표현해야 함을 깨닫는다. 고립되지 않고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서, 자유롭기 위해서.
고통은 고립
속에서 창궐하고 은밀함 속에서 번성한다. 단어들은 고통의 숙적이며, 괴로움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그 괴로움을 진정시키는 첫걸음이고, 여자가 힘겹게 발을 옮기며 헤쳐 나가는 진흙
수렁-자기 혐오와 죄책감의 몸부림, 공허함과 욕구의 메아리-에 관해 말하는 것은 그 수렁을 빠져나가기 위한 선결 조건이다. (304)
마지막 장의 제목은 “희망을
향해 헤엄치기”.
어느 정도의
공허함과 불만족은 삶의 불가피한 부분일 뿐 아니라 유용한 부분이기도 하다는 것.
허기는 비록
불편하기는 해도 연료와 비슷하다. 우리가 계속 무언가를 추구하게 만들며, 그 작은 걸음마를 계속하게 힘을 주며, 잊고 있다가 문득 생각난
듯 새로운 영토로 우리를 떠밀어 주는 것이다. (370)
저자는 그 고통의 세월을 이렇게 끌어안으며 새로이 본다.
완전히 확신하는
답, 최종적인 휴식의 장소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침내
모든 욕구를 이해하고 충족하는 일, 가장 높은 봉우리에 도달하는 일이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 흡족함의 순간들, 별안간 몸과 마음과 정신이 나란히 연결되는
순간들이 있고, 마치 우주가 보낸 선물처럼 기대하지 않고 있을 때 찾아오는, 내가 잘 먹여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들이 있다.
마침내 이 삶에서
얻는 가장 좋은 것일지도 모를 순간들이 있다. 금세 지나가는 순간들이.
(371)
이 책의 마지막 문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