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너무 좋아요 - 황주리 에세이
황주리 글, 그림 / 생각의나무 / 2001년 5월
품절


사람들은 자신의 과거를 들추어내어 보란 듯이 써댄다. 그래서 비밀따위는 점점 골동품이 되어간다.

쓰는 자와 읽는 자가 '상처'와 '비밀'이라는 지점에서 만나, 서로의 속을 터 놓고 울고 웃는 독서.

누군가 모든 사람이 작가인 시대가 멀지 않았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책을 쓰는 세상은 어쩌면 정말 '귀머거리와 몰이해의 시대', 진실로 외로운 세상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잊혀지기 싫어서, 누구에겐가 자신의 속을 털어놓고 싶어서, 아니 이 허무한 삶의 한 자락을 세상에 남겨놓고 싶어서 글을 쓴다.

밀란 쿤데라의 이런 말은 떠올려본다. '우리가 책을 쓰는 것은 자기 자식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것은 자기 아내에게 이야기하면 귀를 막아버리기 때문이다.'-247쪽

나는 이럴 때 세월을 느낀다.
어느 날 갑자기 옛날 옛적 잊혀진 사람으로부터 뜻하지 않은 전화를 받을 때, 그리고 그가 행복하지 않은 결혼 생활 끝에 이혼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 날이 어두워지면 아버지의 안전한 집으로 돌아가던, 그 옛날 내 아버지의 사랑스런 딸이 될 수 없음을 문득 깨달을 때, 그리하여 아무도 막지 않는 나의 귀가 시간에 내 스스로 빗장을 잘러버릴 때, 새벽녘 나의 단잠 속에 어렴풋이 들려오던 돌아가신 아버지의 낮은 기핌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올 때, 그동안 떠나 있던 서울이 외지인 미국보다도 갑자기 낯설게 느껴질 때, 그 가깝던 10년지기 친구가 아주 사소한 일들로 이제는 전화를 걸 필요조차 없는 먼 사람이 되었음을 기억할 때, 비 오는 토요일 오후 전람회장에 걸려있는 내 그림 앞에서 애인도 없이 혼자 서성이는, 10년 전 내 모습을 닮은 어느 젊은 여자의 뒷모습을 볼 때, 가까운 친구가 시어머니 욕을 한없이 늘어 놓는 재미없는 아줌마로 느껴질때, 그러나 그 재미없는 일상의 소중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때, 그 일상 속에서 어느 날 갑자기 정전이 되듯, 그렇게 찾아올 죽음을 떠올릴때......-264쪽

<늙을수록 아름다운 사람>

그의 머리카락이 온통 하얗게 되어서, 가을 바람에 서글피 흩날려도 좋다.
그의 이빨이 조금씩 흔들거려서, 틀니를 했어도 좋다.
그러나 그의 걸음걸이는 꼿꼿하고, 그의 눈빛은 그 모진 세월에도 자존심으로 빛나며, 따뜻한 온기를 지닐 것이다.
그가 결혼을 했건 안 했건, 그에게 성공한 자식이 있건 없건, 그는 늘 '홀로'일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젊은 날의 그때와 똑같이, 누군가 돌을 던진 연못의 수면처럼 마음이 흔들릴 것이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다 끝났다고 포기해 버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뒤돌아보며, 동시에 앞으로 한 발자국 걸음을 내디딜 것이다.
그의 몸은 늙어서 이미 사랑할 수 없으나 그의 마음은 해바라기처럼 타오를 것이다.
그는 가끔 옛 애인을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우연히 슬프게도 늙어버린 그 사람을 만난다면 모르는 사람처럼 슬그머니 뒤돌아 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남을 탓하지 않을 것이다, 잘난 척하지도 비굴한 웃음을 웃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살아온 날들에 대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다는 자부심을 지닐 것이다.
그 길이 아니면 저 길도 있었을 텐데, 하고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가야 할 단 하나의 길만 있었음을, 그리고 그 길은 아직 멀어서 죽는 날까지 쉬지 않고 걸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마음밭에 농부가 논에 벼를 심듯 그렇게 평화를 심을 것이다.
그는 젊은이들을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그 젊음을 질투하지는 않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리고 내게도 있었던 그 젊음을 축복할 것이다.
늙을수록 아름다운 사람, 그는 내 생의 목표이기도 하다.-2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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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하니 2006-09-11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슬퍼요,,,,,
세상에 마음을 흔드는 말들이 이렇게 많으네요? 읽어봐야지....

비자림 2006-09-11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여러 상념에 젖게 하는 글을 만났네요. 찜!

hnine 2006-09-11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니님, 제가 그런 부분만 발췌해놓았는지도 모르겠네요. 가을에 어울리는 글들이 아닌가 생각되어요.
비자림님, 황주리 화가의 그림을 이렇게 책에서뿐만 아니라 직접 전시회에서 만나보고 싶어요.
 
날씨가 너무 좋아요 - 황주리 에세이
황주리 글, 그림 / 생각의나무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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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작가의 사진들에 붙여진 몇 마디 설명으로 더욱 그 작품이 와 닿듯이, 좋아하는 화가의 그림을 보면서 읽는 그, 혹은 그녀의 글을 읽는 것은 더욱 만족감을 준다.

화가 황 주리의 세번째 산문집.

제목이 주는 이미지와 책 속의 내용이 제법 잘 어우러진다는 생각을 했다.

"날씨가 너무 좋아요." 이 좋은 날씨에 나는 외롭고, 그리고 자유롭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 같은.

그녀의 그림은 군더더기 없이 딱 떨어지는, 그러면서도 날카로운 메시지를 준다. 밝은 원색의 그림 속에 판화 같이 정리된 선들. 고정된 화면에서 던져지는 그녀의 묵언의 외침이 마음속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울려 퍼지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자유롭지만 외로운, 자유로운 만큼 외로와야 한다는 걸, 나도 수년전에 어렴풋이 깨달은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조금 덜 자유롭더라도 난 이런 외로움은 끝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서울과 뉴욕을 오가며, 놓치기 쉬운 순간들을 그림으로 포착하여 남기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화가로서의 삶. 책 속에서 그녀는 외친다 '아! 슬프고 지루하고 행복하고 고통스러운 삶이여' 라고.

검은테 안경 너머 그녀의 그림처럼 군더더기 없는 그녀의 마스크, 그리고 이 책에 실려 있는 여려 점의 '자화상'이라는 제목의 그림들을 다시 한번 찬찬히 넘기며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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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림받은 성적표 - 고등 학생, 우리들이 쓴 시 보리 청소년 6
고등 학생 81명 시, 구자행 엮음 / 보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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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 시기를 그저 좋~은 때라고만 부를 수 있을 것인가. 나 자신도 돌이켜보건대, 꼭 그렇지만은 아니었음을.

부산의 고등학생 81명의 자작시들의 엮음집 이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것들도 아니고, 꾸미거나 치장하려 들지도 않은, 무심해 보이는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담은 솔직하고 풋풋한 시들이다.

 

 

종이 울린다

동시에 매로 문을 두드리며

고함치는 소리가 들린다

 

문은 닫히고

이상 자유는 용서 받지 못한다

 

매시간 10분전이 고비다

그때 마다 몇몇 죄수가 탈옥을 시도한다

그러나 결과는 종아리에 그이는 붉은

 

죄수명단을 들고 교관이 들어와 인원 수를 체크한다

압박감에 시달려 탈옥을 체념한

허리를 굽히고 눈을 감으며

엎드리는 죄수는 늘어만 간다

 

종이 울린다

동시에 죄수 수십 명이

발광하며 뛰쳐나간다

 

문은 열리고

그러나 자유여야 밖은 온통 학원

다른 감옥으로 옮겨지는 종소리일 뿐이었다.

( . 라는 구속 영장 全文)

 

우리학교 벚꽃은

소나무 옆에 있다

아이들은 벚꽃만 본다

그런 아이들을 보면서

소나무는 서운해진다

( 우리학교 벚꽃 全文)

 

주목 받는 벚꽃보다는 그 옆의 소나무에 감정이입이 되어 쓴 시이다.

 

기성 시인들의 시도 좋지만, 기성이 되기 전의 이런 시인들의 시는 또 다른 느낌으로 와 닿는다. 시인을 만드는 사회와 교육, 입시 제도, '덕분'이라고 해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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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06-09-05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풍경들이 눈 앞에 떠오르는 살아있는 시입니다.
지금에서야 아련한 추억으로 남지만 절대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네요.
불쌍한 아이들...

hnine 2006-09-05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시라도 쓰는 동안 어떤 카타르시스가 되긴 되겠지요 그나마.

씩씩하니 2006-09-05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이 이렇게 느낄 정도루 힘이 들다니..이런 생각 해봅니다,..
많이 안스러워요...울 애들 크기 전에 제도적으로 뭔가 바뀔까요??

hnine 2006-09-06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우리 아이들도 맞이할 시기일텐데, 꿋꿋하게 잘 버텨나갈 수 있는 좀 낙천적인 성품을 길러주어야겠어요. 제도적으로 뭔가 바뀔까요...글쎄요 ^ ^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홍신자 지음 / 명진출판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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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홍 신자 라는 이름과 함께 자유를 위한 변명이라는 책이 널리 읽혀졌던 적이 있었다 (1993년 출간). 스물 일곱 살의 늦은 나이에 느닷없이 무용가의 길로 나선 작가의 독특한 여정과 명상을 통한 자유의 부르짖음이 생소하면서도 참신하게 다가왔었다. 그 때 아마 한참 그런 류의 책들이 많이 보급되던 때가 아닌가 싶다.

이 책은 저자의 나이 예순 둘에 쓴 것으로, 여전히 춤과 명상, 내 몸과 마음의 자유를 누리려는 걸음을 계속하면서 쓴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이 책에서 특이한 점은 우리의 이 주는 메시지의 중요성에 대한 역설이다. 몸은 마음보다 훨씬 정직하며 몸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순간 그것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쓰고 있다. 마음 다스리기를 위해 몸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아니,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몸을 어떻게 섬기고 보살펴야 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해 놓았다. 1. 식사시간에는 책을 덮어라. 2. 오랜 친구를 만난 듯이 음식을 대하라. 3. 자기 체질에 맞는 음식을 선택 하라. 4. 왼손으로 먹어라. 5. 50번 이상 씹어서 혀에서 식도, 위로 넘어가는 느낌을 상상하라. 6. 좋아하는 그릇을 마련하라. 예를 들어, 만일 다시 태어나 새롭게 살고 싶다는 사람이 있다면 두말없이 단식을 권하겠다고 한다. 단식을 그저 단순히 살을 빼기 위한 다이어트 프로그램이 아니라, 자기와의 싸움이며, 반죽음의 상태, 절실해진 내면과 육체의 만남이며, 세상에 나온 이후로 영혼이 맞이할 수 있는 가장 큰 침묵의 시간이라고.

 

인간도 근원적으로 자연의 일부이므로, 자연스럽게 본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집중하는 것, 거기에 참자유가 있다는 것.

 

70%쯤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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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9-04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유를 위한 변명> 좋았죠?
항구에 정박중인 배는 어쩌구 하던 구절이 그 책 맨 앞장에 적혀 있었던가요?
홍신자 씨의 책을 읽고 글 속에서 소개받아 <마하무드라의 노래>를
샀던 기억이......^^

비자림 2006-09-04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홍신자의 글을 읽고 난데없이 춤을 배우고 싶은 욕구가 일더라구요.
멋있는 분이세요.^^

hnine 2006-09-05 0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자유, 본성, 본연의 소리, 집중, 뭐 이런 키워드들의 책이면 요즘 저에게는 필이 팍! 꽂힙니다 ^ ^ <마하무드라의 노래> 저도 한번 읽으볼까 합니다.

비자림님, 뭔가를 배우고 싶은 욕구가 일게 하는 책, 좋은 책 맞지요? 요즘 고미숙남의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라는 책 읽고 있는데, 제 전공이 아닌 분야에 대한 공부 욕구가 살 살 일어나더라구요.

가을산 2006-09-05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덕에 몸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어요.

hnine 2006-09-05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 저도요 ^ ^
 
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 - 소노 아야코의 경우록(敬友錄)
소노 아야코 지음, 오경순 옮김 / 리수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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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키지 않는 일에는 더 이상 구애받고 싶지 않다>
인생의 절반을 살았고 이제부터 후반부에 접어든다는 생각을 하면 내키지 않는 일에는 더 이상 구애받고 싶지않다는 생각이 절실하다. 그것은 선악이나 도덕과도 전혀 별개의 사고이다. 단 일분이라도 한 시간이라도, 아름다운 것, 감동할만한 것, 존경과 경이로 바라볼수 있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추하다고 느끼거나, 때로는 업신여기고 싶은 마음으로 내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다.

-40쪽

<세상의 악평이 주는 이점>
'세상의 악평'은 오히려 우리들에게는 더 바랄 나위 없이 좋은 기회입니다. 그런 이유 없는 비난과 싸우고 있는 한, 인간은 추락하지 않게 되고 용기가 넘쳐나게끔 되어 있습니다.-137쪽

<잘 모르는 일들에 화내지 않는다>
평상시 굳게 믿고 있는 가치가 어긋나게 되면 화를 내는 사람과 상쾌한 기분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 듯하다. 나는 후자 쪽인데, 그 이유는 내가 무책임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화를 내는 쪽은 책임감이 강하며 새로운 사태에 항상 자신이 충분히 관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좋은 생각을 갖고 있다고 자신하기 때문에 앞길이 가로막히면 화를 내게 된다. 그러나 나는 대부분의 일들은 나와는 관계가 없다는 생각이다. 내 집 부엌이나 손바닥만한 야채밭 관리에 대해서는 굉장히 말이 많지만, 내가 소속한 단체의 운명, 국가의 운명, 21세기 지구의 운명은 솔직히 말해 어떻게 되든 알 필요도 없다. '어떻게든 마음대로 생각하라'라는 입장이다.-222쪽

<반드시 홀로 해야 하는 일>
자신의 생활 방식이나 장차 나아갈 방향을 타인이나 조직, 혹은 사회나 국가가 결정해주길 바라는 자세만큼 위험 천만한 것은 없다. 자신과의 내면의 싸움이란 언제나 홀로 하는 것임을 어른들은 청소년들에게 가르치지 않으면 안된다.-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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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하니 2006-09-03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오지랍이 넓어서 어쩐대요? 그래서 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지 않나봐요,,훌쩍...
좋은 사람이길 포기하면 편안해질꺼란 말씀은 동감해요,,
가끔 그렇게 노력을 하기도 하구요..
대부분의 일이 나와는 상관없다구 생각할 때 얼마나 자유로워질까요....
꼭 읽어볼래요,,,

hnine 2006-09-03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사실 이 책 읽으면서 100% 모두 공감하지는 않았어요. 세상이 너무 삭막해질 것 같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