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자신의 과거를 들추어내어 보란 듯이 써댄다. 그래서 비밀따위는 점점 골동품이 되어간다.
쓰는 자와 읽는 자가 '상처'와 '비밀'이라는 지점에서 만나, 서로의 속을 터 놓고 울고 웃는 독서.
누군가 모든 사람이 작가인 시대가 멀지 않았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책을 쓰는 세상은 어쩌면 정말 '귀머거리와 몰이해의 시대', 진실로 외로운 세상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잊혀지기 싫어서, 누구에겐가 자신의 속을 털어놓고 싶어서, 아니 이 허무한 삶의 한 자락을 세상에 남겨놓고 싶어서 글을 쓴다.
밀란 쿤데라의 이런 말은 떠올려본다. '우리가 책을 쓰는 것은 자기 자식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것은 자기 아내에게 이야기하면 귀를 막아버리기 때문이다.'-247쪽
나는 이럴 때 세월을 느낀다. 어느 날 갑자기 옛날 옛적 잊혀진 사람으로부터 뜻하지 않은 전화를 받을 때, 그리고 그가 행복하지 않은 결혼 생활 끝에 이혼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 날이 어두워지면 아버지의 안전한 집으로 돌아가던, 그 옛날 내 아버지의 사랑스런 딸이 될 수 없음을 문득 깨달을 때, 그리하여 아무도 막지 않는 나의 귀가 시간에 내 스스로 빗장을 잘러버릴 때, 새벽녘 나의 단잠 속에 어렴풋이 들려오던 돌아가신 아버지의 낮은 기핌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올 때, 그동안 떠나 있던 서울이 외지인 미국보다도 갑자기 낯설게 느껴질 때, 그 가깝던 10년지기 친구가 아주 사소한 일들로 이제는 전화를 걸 필요조차 없는 먼 사람이 되었음을 기억할 때, 비 오는 토요일 오후 전람회장에 걸려있는 내 그림 앞에서 애인도 없이 혼자 서성이는, 10년 전 내 모습을 닮은 어느 젊은 여자의 뒷모습을 볼 때, 가까운 친구가 시어머니 욕을 한없이 늘어 놓는 재미없는 아줌마로 느껴질때, 그러나 그 재미없는 일상의 소중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때, 그 일상 속에서 어느 날 갑자기 정전이 되듯, 그렇게 찾아올 죽음을 떠올릴때......-264쪽
<늙을수록 아름다운 사람>
그의 머리카락이 온통 하얗게 되어서, 가을 바람에 서글피 흩날려도 좋다. 그의 이빨이 조금씩 흔들거려서, 틀니를 했어도 좋다. 그러나 그의 걸음걸이는 꼿꼿하고, 그의 눈빛은 그 모진 세월에도 자존심으로 빛나며, 따뜻한 온기를 지닐 것이다. 그가 결혼을 했건 안 했건, 그에게 성공한 자식이 있건 없건, 그는 늘 '홀로'일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젊은 날의 그때와 똑같이, 누군가 돌을 던진 연못의 수면처럼 마음이 흔들릴 것이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다 끝났다고 포기해 버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뒤돌아보며, 동시에 앞으로 한 발자국 걸음을 내디딜 것이다. 그의 몸은 늙어서 이미 사랑할 수 없으나 그의 마음은 해바라기처럼 타오를 것이다. 그는 가끔 옛 애인을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우연히 슬프게도 늙어버린 그 사람을 만난다면 모르는 사람처럼 슬그머니 뒤돌아 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남을 탓하지 않을 것이다, 잘난 척하지도 비굴한 웃음을 웃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살아온 날들에 대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다는 자부심을 지닐 것이다. 그 길이 아니면 저 길도 있었을 텐데, 하고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가야 할 단 하나의 길만 있었음을, 그리고 그 길은 아직 멀어서 죽는 날까지 쉬지 않고 걸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마음밭에 농부가 논에 벼를 심듯 그렇게 평화를 심을 것이다. 그는 젊은이들을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그 젊음을 질투하지는 않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리고 내게도 있었던 그 젊음을 축복할 것이다. 늙을수록 아름다운 사람, 그는 내 생의 목표이기도 하다.-2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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