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과 다른 사람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4
세스 노터봄 지음, 지명숙 옮김 / 민음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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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여덟 권의 책들이 기다리고 있는 책꽂이로 가서 나는 하필 이 책을 처음으로 뽑아들었다. 처음 보는 작가이고 책 제목 물론 처음 듣는다. 제목도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 단지 책 두께가 너무 두껍지 않다는 이유였을까? 이 정도 두께의 책들은 다른 책들도 있었는데.

 

 

 

 

 

열 여섯 살 소년 필립이 1인칭 화자로 나오는 이 작품을 소설이라고 부르기엔 다른 소설들과 너무 뚜렷이 구별된다. 필립은 열살 되던 해 일흔 살 된 알렉산더 삼촌 집을 처음 방문한다. 6년 후 다시 삼촌 집을 방문하는데 이번엔 2년 동안 삼촌과 함께 지내게 된다. 결혼도 하지 않고 큰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으며 살아가는 삼촌은 필립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 주는데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의 그 모호함은 이 삼촌의 이야기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던 셈이다. 마침내 필립은 삼촌의 집을 나와 혼자만의 길을 떠나는데, 이 과정에서 만나는 여러 사람들때문에 이 책의 제목 "필립과 다른 사람들" 이 비롯되었다. 우리 말로 옮겨 놓으니, "필립과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이라는 뜻인지, "필립과는 다른 사람들"이라는 뜻인지, 제목만 읽으면 그 뜻이 뚜렷하지 않지만.

뚜렷한 목적이 있는 여행이 아니었다. 필립의 여정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아마도 필립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나보다 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날때마다 메모까지 하며 읽었는데, 어느 만큼 읽고 나자 내가 잘못 짚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메모를 그만 두었다. 누구를 만났는지는 그닥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달까. 잉그리트, 재클린, 마반테르, 후작의 어린 딸, 중국인 소녀, 페이, 비비안, 이들은 모두 필립 그 자신의 다른 모습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중국인 소녀를 찾아가는 방랑길이라고는 하지만 필립이 찾고자 한 것은 중국인 소녀라기보다 중국인 소녀로 대변하는 자아 정체성이었던 것이다.

 

청소년이 주인공으로 나오고 무언가를 찾아 길을 떠난다는 구성의 다른 여러 소설들을 떠올려본다. 재미있는, 재미만 있는 소설과 이 작품의 다른 점을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다. 문학적 가치를 위해 스토리텔링에 무엇이 더 들어가야하는지, 문학이라고 말하는 그 범위 속엔 얼마나 다양한 인간의 사고 방식과 사고의 결과가 엉켜 들어가 있는지에 대해서 새삼 깨닫게 된다.

필립은 방랑의 길을 통해 무엇을 배웠을까 결론을 찾고 싶어하는 나의 마무리 지음은 또한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방랑의 길을 떠난다는 것, 길 위에서 느끼고 생각한 것, 그것이어도 충분하달 수 있을텐데.

아무튼 문제의 중국인 소녀를 만나 짧은 시간을 함께 하면서 필립은 알게 된다. 소녀는 곧 떠날 것이라는 걸.

나는 내가 이 게임에서 패자가 될 거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왜냐하면 내가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에. (210쪽)

더 사랑하는 사람이 패자가 되는, 사랑이라는 게임.

이어서 중국인 소녀가 필립에게 해주는 말에 밑줄을 그었다.

삶이란 사랑을 위해 마련된 기회라고.

 

이 세상은 지극히 사악하고 절망적이고 비극적이며 파멸 지향적이지만, 바로 그로 말미암아 그토록 경이롭고 연민을 자아내고 그리고 극도로 사랑스럽고 아름답다는 신념을 가질 때에만 비로소 그점을 인지할 수 있게 되리라 믿어. (210쪽)

 

자기를 돌봐주던 유모와 바람이 나서 가출한 아버지가 시내에 집중 투하된 폭탄에 맞아 사망하고, 그 후 재혼한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저자. 나중에 수도원 산하 기숙학교에 보내지지만 적응을 못하고 방탕과 방랑의 시간을 보낸 사람이다. 네덜란드 태생이지만 미국에서 페가수스 상을 수상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고 한다.

 

책 표지 그림은 에곤 실레의 그림이다. <어떤 소년> 이라는 제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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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0 18: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10 1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5-12-10 18: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48권을요? 대단하세요. 앞으로 차곡차곡 읽으시는 거죠?
한 겨울 독에서 김장 김치 꺼내먹는 기분일 것 같아요.
표현이 좀 그런가요? 켁~ㅋㅋ

저도 작가가 처음 듣는다 했는데 `산타아고 가는 길`을 쓴 작가네요.
그책은 검색해봐서 아는데...
h님 이리 쓰시니 관심이 가네요.^^

hnine 2015-12-10 19:37   좋아요 1 | URL
원래 펭귄 클래식 세계문학 시리즈를 모으고 있기에 그걸 사려고 했는데 마침 품절이더라고요.
그래서 민음사에서 나온 것을 봤더니 A, B, C...이렇게 50여권씩 나뉘어 있더군요. 제가 산건 E 시리즈, 48권이랍니다. 제 돈 주고는 못샀고요, 생일선물을 빙자해서 남편으로부터 뜯어냈어요 ㅋㅋ
역시 stella님은 이 작가의 작품을 아시는군요. 맞아요, 산티아고 가는 길을 쓴 작가라는데 작가 자신의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여행과 여행기에 관심이 많았다고해요.

stella.K 2015-12-10 20:02   좋아요 1 | URL
앗, 맞아요. 생일이었군요!
저 보다 조금 뒤에 곧 hnine님 생일이었던 것 같은데...
지났죠? 늦었지만 축하해요.
생일 선물로 대박 선물도 받으시고 부럽습니다.
지금도 행복하시겠어요.^^

hnine 2015-12-10 20:11   좋아요 1 | URL
우헤헤~ 고맙습니다 ^^
나머지 시리즈 A,B,C,D까지 다 사려면 앞으로 네번의 생일을 지내야 한다는...그래도 뭐, 좋아요 ^^

컨디션 2015-12-11 15:00   좋아요 0 | URL
우왕~ hnine 님 생일선물로 책을 받으셨군요. 그것도 이렇게 왕창 ! !ㅎㅎ 남편 분을 얼마나 조르셨는지는 몰라도ㅋㅋ 이런 생일 선물하는 남편, 정말 훈남 그 자체가 아닐까 싶습니당. 정말, 부럽습니당. ^^
말 나온 김에 제 신세를 좀 늘어놓자면, 며칠 전부터 남편 다리-종아리부위-를 하루 십오분 마사지 서비스(?)에 들어갔는데 하루 일당 1000원씩 해서 한달이면 3만원이니까, 그걸로 맘껏(??) 책 사보래요. 치사하게 그 한도 내에서만요. 제가 이런 남자랑 삽니다요.ㅠㅠ 근데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면 불평할 것도 없어요. 남편 말도 맞으니까요. 사놓고 안본 책들이 얼마나 많으냐고.. 컨디션 너, 하는 꼬라지로 봐선 평생을 봐도 다 못볼 책이다..이러는 데.. 뭐 딱히 변명의 여지가 없더라구요. 흫흑..

hnine 2015-12-11 15:20   좋아요 0 | URL
에궁, 제 남편 훈남 아니고요 ㅠㅠ 하루 세마디 한다는 경상도 남자랍니다. 제가 조르고 졸라서 산거 맞고요. 그래도 사줬으니 오바하면서 고맙다는 말 여러번 하고 있지요.
십오분 마사지 서비스에 1000원은 남편분께서 그냥 하시는 말씀일것이고 아마 그것에 비하지 못할 만큼 고마와하실거예요. 저 처럼 전집 중 일부가 아니라 진짜 전집 전권을 사주실지도. (다른 남편들에겐 이렇게 너그러워지는 우리들 ㅋㅋ)

해피북 2015-12-10 18: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이 색깔별로 하얀 책장에 꽂혀있는게 정말 탐스럽습니다 ㅎㅎ 그리고 헤르만헤세의 `크눌프`가 떠오르네요^~^

hnine 2015-12-10 19:40   좋아요 1 | URL
저 그책 아직 안읽었답니다 헤세의 크눌프요. 제목이 너무 귀에 익어 마치 읽은 듯 착각하는 책 중 한권이지요.
전집도 아니고 전집의 일부만 구입했는데도 저리 꽂아놓으니 보기는 좋더라고요 ^^ 그래서 번호순도 아니고 책등 색깔별로 꽂아놓고 사진까지 찍고 좋아했답니다.

[그장소] 2015-12-10 20:48   좋아요 0 | URL
저도 이책들을 보고싶은데로 사서 막 읽는 편이거든요..번호상관없이..

[그장소] 2015-12-10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48권을 나란하게 놓음 ㅡ저런 모습이 연출되는군요!
예..쁘..다능!!^^
그리고.축하드려요.생일 을 ~(라이브로..노래아~?)
ㅋㅋㅋ 오늘 목이 쉬어서..내년에...진심 축하드려요 ~^^♡

hnine 2015-12-10 20:31   좋아요 1 | URL
야금야금 읽어보려고요.
생일은 지났지만 어때요, 이렇게 축하해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첫 책으로 위의 책을 읽었고 다음으로 고른 책이 뭔지 아십니까? 자그마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랍니다 ㅋㅋ
두툼한 책이 1,2,3 이렇게 세권이지요. 제가 한동안 리뷰를 못올리거나 다른 책 리뷰가 올라오더라도 이해해주세요.

[그장소] 2015-12-10 20:47   좋아요 0 | URL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ㅡ시작을 축하드릴께요.
집중할 시기이니만치 ..기다리죠..얼마든~^^
다녀오셔서..아님 중간에 답답할적에 ..올리셔도
이야기할수있구요~
기대할께요!^^♡♡♡

살리미 2015-12-23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서재 너무 부러워요^^

hnine 2015-12-23 22:15   좋아요 0 | URL
서재 따로 없고 그냥 마루 책꽂이 한부분인걸요.
오로라님 책꽂이 구경도 하고 싶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