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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과 다른 사람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4
세스 노터봄 지음, 지명숙 옮김 / 민음사 / 2008년 11월
평점 :
마흔 여덟 권의 책들이 기다리고 있는 책꽂이로 가서 나는 하필 이 책을 처음으로 뽑아들었다. 처음 보는 작가이고 책 제목 물론 처음 듣는다. 제목도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 단지 책 두께가 너무 두껍지 않다는 이유였을까? 이 정도 두께의 책들은 다른 책들도 있었는데.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5/1210/pimg_7149951631323252.jpg)
열 여섯 살 소년 필립이 1인칭 화자로 나오는 이 작품을 소설이라고 부르기엔 다른 소설들과 너무 뚜렷이 구별된다. 필립은 열살 되던 해 일흔 살 된 알렉산더 삼촌 집을 처음 방문한다. 6년 후 다시 삼촌 집을 방문하는데 이번엔 2년 동안 삼촌과 함께 지내게 된다. 결혼도 하지 않고 큰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으며 살아가는 삼촌은 필립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 주는데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의 그 모호함은 이 삼촌의 이야기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던 셈이다. 마침내 필립은 삼촌의 집을 나와 혼자만의 길을 떠나는데, 이 과정에서 만나는 여러 사람들때문에 이 책의 제목 "필립과 다른 사람들" 이 비롯되었다. 우리 말로 옮겨 놓으니, "필립과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이라는 뜻인지, "필립과는 다른 사람들"이라는 뜻인지, 제목만 읽으면 그 뜻이 뚜렷하지 않지만.
뚜렷한 목적이 있는 여행이 아니었다. 필립의 여정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아마도 필립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나보다 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날때마다 메모까지 하며 읽었는데, 어느 만큼 읽고 나자 내가 잘못 짚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메모를 그만 두었다. 누구를 만났는지는 그닥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달까. 잉그리트, 재클린, 마반테르, 후작의 어린 딸, 중국인 소녀, 페이, 비비안, 이들은 모두 필립 그 자신의 다른 모습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중국인 소녀를 찾아가는 방랑길이라고는 하지만 필립이 찾고자 한 것은 중국인 소녀라기보다 중국인 소녀로 대변하는 자아 정체성이었던 것이다.
청소년이 주인공으로 나오고 무언가를 찾아 길을 떠난다는 구성의 다른 여러 소설들을 떠올려본다. 재미있는, 재미만 있는 소설과 이 작품의 다른 점을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다. 문학적 가치를 위해 스토리텔링에 무엇이 더 들어가야하는지, 문학이라고 말하는 그 범위 속엔 얼마나 다양한 인간의 사고 방식과 사고의 결과가 엉켜 들어가 있는지에 대해서 새삼 깨닫게 된다.
필립은 방랑의 길을 통해 무엇을 배웠을까 결론을 찾고 싶어하는 나의 마무리 지음은 또한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방랑의 길을 떠난다는 것, 길 위에서 느끼고 생각한 것, 그것이어도 충분하달 수 있을텐데.
아무튼 문제의 중국인 소녀를 만나 짧은 시간을 함께 하면서 필립은 알게 된다. 소녀는 곧 떠날 것이라는 걸.
나는 내가 이 게임에서 패자가 될 거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왜냐하면 내가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에. (210쪽)
더 사랑하는 사람이 패자가 되는, 사랑이라는 게임.
이어서 중국인 소녀가 필립에게 해주는 말에 밑줄을 그었다.
삶이란 사랑을 위해 마련된 기회라고.
이 세상은 지극히 사악하고 절망적이고 비극적이며 파멸 지향적이지만, 바로 그로 말미암아 그토록 경이롭고 연민을 자아내고 그리고 극도로 사랑스럽고 아름답다는 신념을 가질 때에만 비로소 그점을 인지할 수 있게 되리라 믿어. (210쪽)
자기를 돌봐주던 유모와 바람이 나서 가출한 아버지가 시내에 집중 투하된 폭탄에 맞아 사망하고, 그 후 재혼한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저자. 나중에 수도원 산하 기숙학교에 보내지지만 적응을 못하고 방탕과 방랑의 시간을 보낸 사람이다. 네덜란드 태생이지만 미국에서 페가수스 상을 수상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고 한다.
책 표지 그림은 에곤 실레의 그림이다. <어떤 소년> 이라는 제목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