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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평점 :
"어휴, 눈물이 나려고 해..."
어제 새벽에 읽기 시작해서 같은 날 저녁, 집 앞 카페에 가서 다 읽고 나오며 옆에 있는 남편에게 말했다.
길지 않은 삶을 사는 동안 스스로 인간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남자의 이야기는 길지 않았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그 남자의 수기는 모두 세편으로 나뉘어 있고, 수기의 앞과 뒤에는 남자의 수기를 책으로 엮은 사람의 서문과 후기로 구성이 되어 있다. 여기의 '그 남자'란 알려져있다시피 다자이 오사무 자신.
왜 그는 자신을 인간으로서 실격이라고 여겼을까. 그의 말처럼 그는 인간을 두려워 한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인간이 영원히 공감할 수 없을 거라는 자신 속의 무엇에 대해 절망한 것일까.
늘 인간에 대한 공포에 떨고 전율하고 또 인간으로서의 제 언동에 전혀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자신의 고뇌는 가슴속 깊은 곳에 있는 작은 상자에 담아두고 그 우울함과 긴장감을 숨기고 또 숨긴 채 그저 천진난만한 낙천가인 척 가장하면서, 저는 익살스럽고 약간은 별난 아이로 점차 완성되어 갔습니다. (19쪽)
다른 사람들과의 거리감을 덮어버리기 위해 웃기는 소리 하기를 자처하지만, 좌절하고, 외롭고, 그 거리를 견뎌내지 못해 술과 여자, 마약, 심지어 자살 시도까지 하기에 이른다.
적당히 뻔뻔하고, 자기 합리화도 해가며, 왜 그는 그렇게 살지 못했을까. 인간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너무 빨리, 너무 예민하게 알아버린 죄일까.
이 작품의 의의는 아마도 적당히 닳고 타협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마음 속 어딘가에 남아 있는 그 흔적을 건드려주고 일깨워 주는데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패배적이고 염세적이고 퇴폐적이라고, 자기 파멸에 이르는 이야기라고 말하면서도 그의 작품을 내치지 못하고 오히려 품에 안게 되는 이유이다.
고리대금업으로 부자가 된 아버지가 부끄러웠고, 그런 아버지의 부를 업고, 가진 자로서 특권을 누리고 사는 자신도 부끄러웠다. 어릴 때부터 수재로 불릴 만큼 머리가 좋았지만 그렇게 쉽게 학교에 진학하고 잘 생긴 외모때문인지 여자들의 관심이 늘 따라다니는 것도 그는 불편했다. 남에게 어떤 소리를 들어도, 어떤 대우를 받아도 화를 내지 못하고 내 탓이라고 여기는 그의 마음 속에는 상처가 깊어가고, 이런 그가 감동할 정도로 순수한 여자를 만나 함께 살아가며 조금씩 마음의 평화를 찾아가지만 그 여자가 어느 날 다른 남자로부터 겁탈을 당하는 것을 보고도 여자를 지켜내지 못하고 다시 그는 허물어진다.
이 남자의 세편의 수기만으로 이 작품이 구성되어 있다면 그야말로 단순한 '수기'에서 그칠 수도 있었을 것을, 어쩌면 필요없어보이는 서문과 후기를 끼워넣음으로써 작품의 격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든다.
정작 다 읽고 눈물이 나오게 한것은 사실 이 작품이 아니라 뒤에 나오는 단편 <직소>를 읽고 나서였다.
자기 고백식 문체, 1인칭 시점으로 써내려간 이 작품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작품의 맨 마지막 줄에야 나오지만 읽으면서 누구든지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이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이 누구인지, 왜 결국엔 사랑하고 존경했던 그를 팔아넘겨 죽음에 이르게 할 수 밖에 없었는지. 자학과 통탄의 눈물로 써내려간 듯한 문장때문에 중간에 멈추지 못하고 마지막 문장에 이르기까지 한숨에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작가는 이번에도 예수의 입장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고 흠모하다 못해 팔아넘긴 유다의 편에 서서 쓰는 쪽을 택하였다. <인간 실격>에서처럼 그는 인간의 약한 모습, 혹은 약점을 보여주는데 더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인간 실격>에 희극 명사, 비극 명사 알아맞추기 놀이, 반대말 알아맞추기 놀이가 나온다. '죄'의 반대말은 '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제목 <죄와 벌>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을 비슷한 말이 아니라 반대말을 염두에 두고 붙인 제목일지 모른다면서.
한동안 혼자서 이 놀이를 즐기게 될지 모르겠다. 꽃의 반대말은? 꿀, 아니야, 여자야. 아니, 달이지. 삶은 희극 명사일까 비극 명사일까? 희극 명사 아닐까? 아니지, 그렇게 되면 모든게 희극이 돼버리잖아. 검정의 반대말은 하양, 그러나 하양의 반대말은 빨강...그럼 나는? 나는 희일까, 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