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서랍 - 이정록 산문집
이정록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을 써보라는 지인들의 권유에 시인은 시 속에 소설을 뭉뚱그려 품어보겠다고 했단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는 어려운 단어들의 조합 대신 이야기가 흐른다. 다른 시집들을 읽을 때 고개를 갸우뚱하며 한 줄에서 시간을 잡고 있을 때가 있는데 이 시인의 시집을 읽을 땐 갸우뚱 대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그리고 그 대목을 다시 읽어보느라 시간을 잡고 있게 된다.

이번에 나온 그의 산문집, 이번엔 산문에서 시가 보인다. 시인들이 쓴 산문집이라는 것을 처음 읽는게 아닌데 이런 산문집은 처음이다. 어느 페이지랄 것 없이 그저 주욱 베껴써보고 싶다. 눈으로 읽어내리는 것으로 성에 차지 않는다. 문학의 문자도 모르는 나이지만 감히 '문학성'있는 글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어떻게 이렇게 담백하고도 감동을 주는 글을 쓸 수 있을까. 화려한 감동이 아니다.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대단히 멋진 문구가 아니다. 그저 '아!'하고 혼자만 들을 수 있는 탄성 정도의, 무채색 감동이다.

 

시인들에게 시란 대체 무엇일까. 책을 받고 아무데나 펼쳐본 곳이 하필 이곳이었다 (200쪽).

 

쓰는 게 아니라

받아 모시는 거다.

시는, 온몸으로 줍는거다.

 

 

 

그 마음 하나로

감나무 밑을 서성거렸다.

손가락질은 하지 않았다.

바닥을 친 땡감의 상처, 그 진물에 펜을 찍었다

홍시 너머 푸른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사랑의 주소는 자주 바뀌었으나,

사랑의 본적은 늘 같은 자리였다.

 

개인적으로 마지막 두줄은 없어도, 아니, 없었으면 더 좋을 것 같으나, 아무튼 그가 어떤 마음으로 시를 써오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시를 지어냄으로써 그것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고, 그것을 다스리려 하지 않고, 받아 모시고, 온몸으로 줍는다는 그 마음.

시인은 우주의 아주 잡스럽고 비밀스런 곳까지 다가가서 살림을 차리는 연애주의자이자 바람둥이라고 하고(223쪽), 설렘과 그늘에 민감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단다 (228쪽). 나이와 상관없이, 여전히 설레는 일이 있고, 남이 보지 못하는 (우주의 잡스럽고 비밀스런 곳까지) 그늘을 볼 줄 알고 그것에 마음 움직일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란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첫 페이지부터 벌써 푹 빠져 버려 다른 일을 놓아버렸다. 어머니 얘기, 고향 얘기, 이 책에서만 보는 이야기가 아님에도 말이다. 시인이 뒤에서 따로 얘기하지만 그는 어여쁘다, 곱다, 슬프다, 기분 좋다 등의 말을 쓰지 않고, 한 치 건너 다른 얘기를 하면서 그 마음을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었다. 시의 원천인 어머니. 시인이 무엇에 대하여 한 말씀만 해달라고 하면 "너 시 쓸라고 그러지. 얘는 인자 쓸 것 되게 없나보네." 그러신단다. 그런거 아니라고 했더니 "웃기지 말어. 네가 쓰는 시라는 거 거짐 내 얘기 받아 적은 거라고, 먼젓번에 왔던 글 쓴다는 네 선배가 그러드라. 너 그러니께 이 어미헌티 잘혀. 글삯 받으면 어미한티도 한몫 떼주고 말이여." (17쪽) 이런 부분을 읽으면서는 어찌나 웃음이 나오던지. 같은 고향이셨던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 목소리, 그 사투리가 떠올라 마음이 뭉클해지기도 했다. 아무도 없는 샘가 도랑에 뜨거운 물을 버리면서 "훠어이 훠어이, 얼른 비켜라. 뜨건 물 나가신다."라고 말씀하시며 양팔을 흔드셨다는 시인의 할머니는 또 어떤가. 도랑 속 작은 생명들이 다칠까봐 헛손질로 위험 경고를 하신 것이란다. 말로 떠들고, 글로 난체하는 환경보호, 자연사랑이 이에 비길까.

책의 뒷부분에 가면 시를 짓는 것에 대한 저자의 낮으면서 힘있는 목소리가 따로 작은 제목으로 표시내지도 않고 실려 있다.

좋은 시인은 뼈로 가고자 합니다. 단도직입을 건너 단순무식으로 갑니다. 나쁜 시인은 살로, 옷으로, 장식으로 가고자합니다... 복잡한 치장으로, 요란한 유식으로 갑니다. (248쪽)

시만 그럴까. 어줍잖은 글 한줄 쓰면서 우리는 얼마나 치장과 포장에 신경을 쓰고 있는지.

시나 이야기를 지을 때 요구되는 상상력이라는 것도 불현듯 어느 곳에서 해괴망측하게 왕림하는 것이 아니며,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이 서로 어깨를 부딪치며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252쪽) 내가 바라보고 겪어온 모든 시간 속에, 모든 상처 속에 시는 살아 있는 것이다.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

 

 

내 몸이 너무 성하다.

 

<서시>라는 제목의 이 시 속 '마을', '흠집'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러면서 내 몸이 너무 성하다라고 하는 뜻이 무엇인지 헤아려본다. 그래서 시인은 흠집 많은 사람을 보면 기가 죽는다고 한다. 꽃다운 상처, 그건 싹수없는 용 문신과는 격이 다른 것이라고.

미숫가루보다도 잘 풀어지는 정신, 결의를 놓치면 언제나 흩어져버리는 게 마음이라서, 좋은 게 좋다고 느끼는 순간, 타락의 수챗구멍에 처박히고 마니까, 시인은 감히 외친다. 모나게 살자!

모나게 살자

샘이 솟는 곳

차고 맑은 모래처럼

 

 

모서리마다

빛나는 작은 칼날

찬물로 세수를 하며

 

 

서리 매운 새벽

샘이 솟는 곳

차고 맑은 모래처럼

이 책을 읽는 동안 자칫 풀어지고 노곤해지려는 정신에 일침을 가하는 듯했다. 냉기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서리 매운 새벽의 차고 맑은 모래를 감싸는 샘물에서는 김이 무럭무럭 솟는다는 말도 잊지 않으면서.

 

시를 포함하여, 자신이 이루려는 것을 마음 속에 품고 사는 것은 어떠한 것인지 보여주는 다음의 시도 한번 쓰윽 읽고 넘어가기에는 아깝다.

어미의 부리가

닿는 곳마다

 

 

별이 뜬다

 

 

한 번에 깨지는

알 껍질이 있겠는가

 

 

밤하늘엔

나를 꺼내려는 어미의

빗나간 부리질이 있다

반짝, 먼 나라의 별빛이

젖은 내 눈을 친다

시를 쓰면서 되뇌는 문장은 "새가 난다" 인데, "어떤 새가, 어찌어찌 난다"라고 수식을 달지 않도록 다잡는다고 한다. "무엇 같은, 어떤 빛깔의 새가, 뭣 같은 몸짓으로, 어찌어찌 난다"라고 덕지덕지 휘황한 금박장식을 달지 않도록 펜 끝을 세운다고. 즉 시의 퇴고는 첨(添)이 아니라 삭(削)이어야 한다고.

 

"물끄러미. 단번에 쏘아보고 마는 눈빛이 아니라, 거두지 않겠다는 마음의 눈빛,물끄러미,

단숨에 내닫는 길이 아니라 구부러져 가더라도 끝까지,

엄살과 과장과 감상적 포즈를 배척하고,

이미 다 보여준 밋밋한 마무리가 아니라

치고 올라가는 기법으로 꿰어 차 올리는 결말"

 

이것은 내나름대로 다섯 줄로 요약한, 저자가 말한 ' 작법'인데 '인생 작법'이라고 이름 붙쳐도 좋겠다. 아니, 이것도 다 엄살과 과장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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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4-30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 아주 괜찮은가 봅니다.
시 속에 소설을 뭉뚱그리고, 시 작법인데 인생 작법이라!
딱 저에게 맞는 책 같습니다. 기억하고 있겠슴다.^^

hnine 2012-04-30 13:38   좋아요 0 | URL
인생작법이란 말은 제가 붙인 소감인데 아무튼 stella님께도 한번 읽어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앞 부분엔 시인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어떻게 시인이 되었는지, 그걸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뒷부부엔 슬을 쓴다는 것에 대한 시인의 생각이 들어가있고요. 장황하게 늘어놓지 않는다는 주의가 일단 마음에 들었답니다.

비로그인 2012-04-30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군요! 저한테도 꼭 맞는 책 같은데요? 히히~
시는 온몸으로 줍는 것이라... 뭐든지 간에 위에서 군림하려고 하면 안 되나봐요. 얼마 전에 끝난 노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도 심사위원이 참가자들한테 그런 얘기를 곧잘 하더라구요. 노래를 컨트롤 하려고 하지 말고, 노래가 자기를 컨트롤하게 만들어야 한다고요.
벌써 점심시간이네요! 뭘 먹을까... 고민고민 ( '')..

hnine 2012-04-30 13:39   좋아요 0 | URL
넵, 꼭 읽어보십시오~
점심때 고민하는 것은 저도 그렇답니다. 그나마 제일 잘 먹는게 점심이라서, 이것 저것 골고루 빠지지 않게 먹느라고 고민이랍니다 ㅋㅋ

파란놀 2012-04-30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은 그냥 "새가 난다"고만 말해요.
그러다가 가끔, 살을 붙이기도 하는데,
아이가 말을 차근차근 배우며 어버이 말투를 따라
새가 하늘을 난다느니, 저 산 너머로 난다느니 하고
말하기도 해요.

hnine 2012-05-01 06:25   좋아요 0 | URL
아이들처럼 말에 살을 붙여서 느낌을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딱 그 정도여야 하는데 어른이 된 우리들은 그 이상의 목적으로 살을 붙이는 것 같아요.

보내주신 사진책 잘 받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책꽂이에 꽂아놓지 않고 가족들 눈에 잘 띄는 곳에 두고 오고 가며 수시로 보려 합니다.

반딧불이 2012-05-01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뜰한 마음이 묻어나는 글, 혼자만 들을 수 있는 탄성을 지르며 잘 읽었습니다. 읽고나니 입가에 미소가 번지네요.

hnine 2012-05-02 07:40   좋아요 0 | URL
이 책을 읽는 동안의 저의 느낌이 반딧불이님에게도 전달되었다면 저도 기쁩니다. 더구나 미소가 번지셨다면.
꽤 훈훈한 책이랍니다. 그러면서 하고 싶은 핵심은 놓치지 않더군요.
반딧불이님의 오늘 하루도 그런 날 되셨으면 합니다.

프레이야 2012-05-01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스투유~~ 나인님^^
이정록시인의 시 참 좋아서 이 책도 급호감, 담아갑니다.
님의 글은 이시인처럼 대개 절제되고 탄력있어 제가 너무 좋아해요.
이 페이퍼에는 시인에 대한, 글에 대한, 작법에 대한 애정이 담뿍 느껴져 더더 좋아요.

hnine 2012-05-02 07:42   좋아요 0 | URL
'절제' 라는 것에 제가 좀 집착하는 것도 같아요. 장황하고 화려한 것보다 간결하고 절제된 것에 마음이 더 끌리더군요.
프레이야님 올리신 이 시인의 시집에 대한 글도 읽었습니다. 제 마음 속의 시인 리스트에 한명 더 보탰답니다 ^^

2012-05-05 0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05 1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