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주의 마지막 무렵부터 전두환 군사 독재 마지막까지 40여 년 동안 학교 선생질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 앞에서 죄도 많이 짓고, 고민도 많이 했지요. 산골 학교를 쫓겨다니면서 그 긴 세월을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름다운 산과 골짜기가 있는 곳마다 우리 아이들이 그 자연과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이런 정도로 살았는데도 한때 나는 정권을 비판하는 좋지 않은 글을 쓰는 사람으로 몰려 고생한 경력이 있습니다.
지금은 나이가 일흔일곱. 아! 언제 이렇게 됐나? 마음은 아직도 어린 아이인데! 그저 죽는 날까지 하늘 우러러 부끄럽지 않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을 뿐입니다.

이 오덕 선생이 이 책 <버찌가 익을 무렵> 의 뒤에 후기 형식으로 쓴 글의 일부이다. 하얗게 센 머리, 주름진 얼굴, 쑥 들어간 눈, 하지만 그의 얼굴은 늘 잔잔하게 미소를 머금고 있다. 어린이와 평생을 지내며 어린이들 앞에 권위를 세우려 하지 않고,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어루만져주려 애쓴 이의 얼굴이다. 

마치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의 국어 책을 보는 듯한, 아련하고 부드러운 윤곽의 삽화들, 그리고 딱 그 정도로 정감있는 내용이 마음을 훈훈하게 한다. 동시에 요즘 초등학교의 분위기를 떠올려 보게도 했다. 학교 근처 숲의 버찌나무에 열린 버찌를 따지 말라고 조회시간에 훈계하는 교장 선생님. 잎이 뜯기고 가지가 꺾이고 해서 벚나무가 울고 있다고. 요즘 그런 훈화를 하는 교장 선생님이 계실까?
교장선생님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날이 갈수록 버찌나무의 열매가 버찌나무 아래에 떨어져 밟혀있는 것이 발견되고, 범인을 잡자고 학교 선생님이 시간 날 때마다 자발적으로 보초를 서기도 하지만.
책의 뒤에는 부록처럼 벚나무에 대한 설명과 그림이 그려져 있고, 요즘 우리가 흔히 보는 벚나무는 왕벚이라는 일본에서 들여온 벚나무이고, 우리 나라에 옛날부터 있던 것은 산벚나무라고 친절히 알려준다. 산골 학교에서 아이들과 같이 나날을 보내면서, 학교에서 하고 있는 교육의 방법과 그 내용이 마음에 안들어 괴로와 하였고, '내가 교장이 되면 이런 교육을 하고 이런 교장이 되어야지' 하며 쓴 것이 이 이야기라고 한다. 그러면서 책을 읽는 독자가 될 어린이들에게 당부의 말을 한다. 여러분들도 학교 생활에서 마음에 안 차거나 답답한 일, 억울한 일, 슬픈 일, 기쁜 일, 고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일들을 글로 한번 써보라고. 머리로 만들어 내는 동화를 쓰라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말, 마음 속에 쌓여 있는 생각을 풀어내보라고. 이 오덕 선생의 그 말을 어린이는 아니지만 내가 그 자리에 서서 고스란히 받아 듣는다.   

 

나도 모르게 소리내어 읽으며 재미있어 한 책 <금자를 찾아서>. 충청도 사투리와 경상도 사투리가 이렇게 한 책에 함께 소개되어 있는 어린이책도 흔치 않을 것이다. 확실히 지방 사투리에는 서울 표준말에 비해 운율이 숨어있어 소리내어 읽거나 말해 보면 느껴지는 특유의 흥과 재미가 있다. '금자'란, '金으로 만든 자(尺)'란 뜻. '경주에 가 본 적 있나요?' 로 시작되는 책 앞 부분의 지은이의 말에 의하면, 경주에 있는 금척 고분과 관련있는 '금척설화'라는 전설을 씨앗으로 쓴 이야기라고 한다. 금자가 묻혀 있다고 전해져 내려오는 금척 고분. 경주에 몇 번 가보면서도 나도 아직 가본적이 없다 했더니 지은이의 말에 의하면 일반인들에게 그리 잘 알려진 유적지는 아니라고 한다. 절박한 사정때문에 지금의 충청도, 사는 곳에서 경주까지 금자를 찾으러 떠나는 주인공 돌배의 이야기이다. 이야기 구성도 재미있게 쓰여졌지만, 지은이의 우리말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문장 문장마다 느낄 수 있었다.   

 

추석 전날과 오늘 산소까지 오가는 차 안에서 읽었다.
돌아오는 길, 어느 집 대문 앞의 감나무가 빨갛게 익은 것을 보고 사진으로 담아 왔다. 우리 아파트 앞의 감나무는 아직 푸른 색인데. 
파란 대문 집 앞의 감나무,
파란 대문 집 앞의 감나무......

 

 

 

 

 

 

 

 

 

 

 

  

 

 

 

 

 

 

 

 

 

 

 

 

 

 

비가 오락 가락 하더니 다행히 산소에 있는 동안엔 비가 많이 오지 않아 참 다행이었다. 가고 오는 길은 무지 막혔지만. 

추석은 이렇게 저물어가고, 이제 여름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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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0-09-23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소 다녀오시는 길에도 책을 읽으셨군요.
이오덕 선생의 버찌가 익을 무렵, 저도 오래 전 읽은 기억이 나요.
파란대문앞의 감나무가 탐스럽네요. 소소한 이런 것에도 눈길을 주시는 나인님.^^
여기도 오늘 아침부터 빗줄기가 오락가락, 기온이 제법 내려갔어요.
선선해요. 가을이네요!
나인님, 몸살 나지 않으셨어요? 내일은 좀 쉬세요.^^

hnine 2010-09-23 08:21   좋아요 0 | URL
이 오덕 선생에 대해 귀로만 많이 들었지 실제로 그분이 직접 쓰신 작품을 별로 읽은 것이 없는 것 같아 한번 읽어보았어요. 역시 프레이야님은 두루두루 독서의 범위가 넓으세요. <버찌가 익을 무렵>은 정말 저희 초등학교 국어책을 연상시키는 책이었어요.
대전은 추석 전날, 추석 당일도 비가 왔어요. 아버님 산소 모신 경기도 쪽으로 가니 이슬비 정도 오다 말다 하여 다행이었지요.
그런데 이젠 정말 여름 다 갔다 싶지요?
추석 잘 쇠고 돌아오셨기를 바랍니다.

순오기 2010-09-23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오덕 선생님 글과 오미경의 금자를 찾아서 읽으셨군요.
오미경 작가는 이금이 작가와 같은 충북 청원 출신이라 충청도 사투리가 리얼하지요.^^

파란 대문집의 감나무 보기 좋아요~ 이젠 정말 가을이에요!

hnine 2010-09-23 17:30   좋아요 0 | URL
오미경 작가의 글을 아마 저는 처음 읽지 않나 싶은데요, 아마 금척전설이라는 짧은 이야기 꼭지 하나 가지고 저렇게 재미있게 이야기를 엮으셨네요. 얼마나 생생하게 글을 쓰셨는지, 꼭 드라마를 한편 보는 것 같기도 했어요. 경상도 사투리도 얼마나 잘 써놓으셨던지, 기회되시면 한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세실 2010-09-25 07:11   좋아요 0 | URL
오미경작가라....왠지 아는분 같다는.
중앙도서관 근무할때 이용자이기도 했고, 지난번 어떤 모임에서 우연히 만났다는..그분이 그분이라면 말이죠.
저도 금자..책 읽어봐야 겠습니다.

순오기 2010-09-25 12:02   좋아요 0 | URL
금자를 찾아서는 봤어요.^^
오미경씨 '교환일기'랑 '신발귀신나무'도 괜찮아요!

Grace 2010-09-24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It's a heartache도 듣고, 하얀 튤립 사진도 백합인양 쳐다 보고, 달필이던 학생수첩을 보며 가볍기만 했던 나의 학창시절에 부끄러워도 해가며, 몇몇 아동문학가들의 이름들도 새겨보고...박인희, 사이먼 가폰컬, 겨운새운...등등 오전을 내내 그러고그러고 한참을 허대다 갑니다. 잎사귀 다 떨어진 나뭇가지에 홍시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감나무를 보면 저는...미친답니다.^^ 가득가득한 훌륭한 서재입니다!

hnine 2010-09-24 15:26   좋아요 0 | URL
구석구석 다 보아주시니 고맙고 또 부끄럽습니다.
감나무 풍경을 좋아하시는군요. 저도 그래요 ^^

양철나무꾼 2010-09-25 0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시댁은 감나무도 대추나무도 아직 초록색이던데 말이죠.
감나무가 있는 풍경,왠지 정겨운 걸요~^^


hnine 2010-09-25 07:06   좋아요 0 | URL
같은 지역이라도 감나무가 서있는 위치에 따라 익은 정도가 달라지기도 하더라고요. 저희 집 앞의 감나무도 아직 푸르딩딩~ 해요. 차례상에 올린 감도 아직 푸른기가 조금 남아 있는 것이었지요.

세실 2010-09-25 0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오덕 선생님의 후기를 읽으면 괜히 부끄러워 집니다.
"그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을 뿐입니다."
저도 그렇게 살도록 노력해야 겠습니다.......

감이 주황빛으로 물들어 가네요. 아 예뻐라.
이곳은 아직 초록빛이예요.


hnine 2010-09-25 20:41   좋아요 0 | URL
다른 사람 이목을 신경쓰기보다는 나 자신에게, 그리고 하늘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하루하루를 산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오덕 선생님 같으신 분도 저렇게 말씀하셨겠지요.
감나무가 키는 저렇게 높아도 가지는 약해서, 감이 익은 것 보고 섣불리 따보겠다고 감나무에 올라갔다가는 큰 일 난다고 제 남편이 늘 하는 소리랍니다. 한번 올라갔다가 떨어져서 큰일 날뻔 했대요 ㅋㅋ

비로그인 2010-09-25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전만하더라도 한낮에는 꽤 더웠는데 이제 "여름" 이라는 단어를 말하는 것이 무색할만큼 가을이 이~만큼 우리 앞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런 느낌을 전해주는 사진이네요.

바람이 꽤 쌀쌀해졌습니다. hnine님, 건강 유의하시고요.

hnine 2010-09-25 22:44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잘 다녀오셨어요?
이렇게 금방 쌀쌀해질 것을, 그렇게 더위로 힘들어했네요.
마루에서 이불 다 차버리고 자던 아이도 이제 방으로 들어가서 이불 꼭꼭 덮고 자요 ^^
몸도 마음도 건강한 가을이 되어야겠어요.

비로그인 2010-09-26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절 잘 보내셨어요?
ㅎㅎ감이 참 사랑스럽게도 달려있네요.
어렸을 적 교과서 얘길 하시니까...한참(?푸히히)을 되짚어 올라가서 정감을 느껴보고 왔습니다.
콩깍지의 콩들이 여물어 각자가 살 터를 찾는 내용이었는데...ㅎ

hnine 2010-09-26 11:59   좋아요 0 | URL
아, 저 그 얘기 생각나요. 그림도 생각나요. 우리 국어 책에 참 뭉클한 얘기들이 많았어요, 그치요?
명절은 뭐, 숙제하는 기분으로 보냈지요. 숙제 무사히 잘 마쳤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