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한가지.

대학원 4학기, 학교와 집만 왔다 갔다 하며 안되는 실험에 매달리고 있던 때였다.
학교와 집이라지만 학교에 가면 실험실 이외의 다른 곳은 발 돌릴 여유가 없었던 것은, 보통 4학기정도 되면 대부분 실험은 마무리해가며 졸업 논문을 쓰기 시작할 때인데 나는 마무리는 커녕 기본 데이터마저 나오지 않아 전전긍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일이 있었던 때 나는 며칠 동안 저온을 유지하며 진행해야 하는 실험을 해야했기 때문에 실험 장치를 아예 우리 과 공동 저온실에 세팅해놓고 수시로 가서 보고 있었다. 그 날은 주말이었고 밤 10시 쯤, 집에 가기 전 마지막으로 실험 상황을 점검하고 가려고 저온실에 들어갔다. 저온실은 저온 유지를 위해여 상당히 육중한 문으로 되어 있고, 한번 문을 열고 들어가면 복도가 있고, 문이 하나 더 나온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야 실제 저온실이 있는, 즉 이중문으로 되어 있는 곳이었다. 그날 두번째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웬지 심상치 않았다. 바로 뒤로 돌아 문을 다시 열어보니 문이 열리지 않는다. 아무리 손잡이를 이리 저리 돌려봐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갇혔구나...'
안에서 소리질러봐도 아무 소용없다. 그 문 밖으로 문이 하나 더 있기 때문에 복도에서는 내가 지르는 소리가 들릴리도 없고 내가 보일리도 없다. 더구나 주말 밤, 그 시간에 누가 복도에 지나가겠는가.
일단 실험하던 것 부터 봐주고...
저온실에서 해야하는 일을 다 하고 난 다음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하나 생각을 하기 시작했는데 생각해봤자 방법이 없었다. 지금처럼 핸드폰이 있던 때도 아니였고.
으슬으슬 추워지기 시작하고, 나는 어이상실, 멍하니 저온실 여기 저기 둘러보고만 있었는데, 그렇게 한 15분 쯤 지났나? 밖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아, 누군가 들어온다! 대학원 동기 중 하나가 다행히 그 시간에 학교에 나와있었던 모양이다. 내 실험실에 내려가봤더니 불도 켜 있고 내가 일하던 흔적은 있는데 사람은 없어서 집에 같이 가자고 나를 찾으러 다니던 중이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난 그 친구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두번째 이야기,
 
이것은 위의 에피소드가 떠오르면 자동적으로 함께 떠오르는 이야기이다. 위에 말한 실험은 한번 시작하면 최소한 1~2주 걸리는 실험이었는데 나는 그 실험 결과가 예상대로 안나와 똑같은 실험을 몇번이나 되풀이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사실 실험실에서 하는 일의 대부분은, 새로운 실험을 해서 결과를 내는 것 보다는 같은 실험을 수차례 반복하는 일이다.) 마음은 급하고 아무래도 나는 한 학기를 더 다녀야 하나보다 낙심하며 밤이고 낮이고 실험에 매달리며 이번에도 결과가 안 나오면 이번 학기 졸업은 힘들지 않을까 초조해가며 실험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실험 중간에 필요한 용액을 급히 만들려고 보니 그 용액을 만드는데 필요한 시약통이 비어있는 것이다. 그때 우리 실험실은 내가 1기인 신생 실험실. 나 외에 동기 한 명이 있을 뿐이다. 동기에게 물어보니 며칠 전에 자기가 다 썼단다. 아...요즘 말로 '망했다...' 라는 생각밖에 안들었다. 앞으로 1시간 내에 그 용액을 써야 하는데, 아니면 거의 2주일째 진행해오던 이 실험이 끝장나는데... 그때부터 여기 저기, 이 실험실 저 실험실, 나중엔 인근의 다른 학교에까지 전화를 해서 그 시약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 시약을 가지고 있는 곳은 없었다. 그럼 이것 말고 아쉬운대로 대체할 수 있는 시약이 없을까 하고 실험 교재를 막 뒤져보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 실험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고, 네가 미리미리 알아보고 재고를 확인해 놓았어야했던 것 아니냐는 동기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나, 둘이 쓰는 시약인데, 자기가 마지막으로 썼으면 다시 주문을 해놓던가 아니면 최소한 그 시약을 다 썼음을 알려만 주었더라면, 최소한 빈 시약통을 그 자리에 다시 올려놓지는 말았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의 나는, 안그래도 신경이 예민해져있던 탓일까, 그대로 정면 충돌. 이후로 졸업할때까지 둘이 서로 말을 안했다. 둘이 쓰는 실험실에서 그 둘이 말을 안하고 지냈으니 참...  

어쩌다 '파스타'라는 드라마를 보다가 떠오른 이야기들이다. 전후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공효진이 저온실에 갇히는 장면이 나오더라. 그리고 그 일로 인하여 못쓰게 된 요리 재료 때문에 그걸 구하러 다른 레스토랑 여기 저기 찾아 다니는 장면이 나오더라. 대학원 2년 동안 잊지 못할 두 사건을 뽑으라면 위의 두 사건인데, 한번에 그 사건들을 연상시키다니. 

그런데 드라마 중의 어떤 파스타 요리를 보아도 난 전혀 먹고 싶은 생각은 안든다. 예전에 3년 동안 그 파스타를 정말 얼마나 물리게 먹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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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2-01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스타 저 장면 나오는 날 '딱' 봤어요.^^ 근데 언제 하는지 몰라서 못 봐요.
그런 일이 있긴 있는 거군요.
생명의 은인과 말 안하고 지낸 친구는 지금도 연락하거나 만나시나요?^^

hnine 2010-02-01 17:20   좋아요 0 | URL
저도 오늘 낮에 재방송하는 것 봐서 어떤 요일에 하는지 모르겠네요. 그런데 아무튼 요즘 그 드라마가 인기더라고요.
생명의 은인 친구, 그리고 말 안하고 지내던 친구, 지금은 다 연락하고 잘 지내요 ^^

이네파벨 2010-02-01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음 졸이는 에피소드네요.

저온실 사건은 정말이지......섬뜩!

친구분이 마침 거기까지 찾으러 오셔서 너무 다행이예요. 그에 비하면....그 당시에는 결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으셨겠지만....실험을 완수하니 못하니, 어쩌면 졸업을 하니 못하니 하는 일도 사소한 것일 수도 있겠죠?

hnine 2010-02-01 17:23   좋아요 0 | URL
그 친구 아니었더라면 정말 어찌되었을지 정말 끔찍해요. 어쩌면 학교 졸업이 아니라 인생 일찍 졸업했을지도...ㅋㅋ

꿈꾸는섬 2010-02-01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조카는 과학이 제일 어렵대요. 과학 실험 결과가 꼭 정답처럼 나오질 않아서 너무 어렵다네요. 근데 정말 그 친구분 아니었으면 큰일날뻔 하셨어요.ㅎㅎ

hnine 2010-02-01 17:26   좋아요 0 | URL
꿈꾸는 섬님께서 공부하는 것 도와주기로 하셨다는 그 조카 말씀이신가요? 직접 실험을 자주 해봤나보네요. 실험 결과가 꼭 정답처럼 나오질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니 그것 부터가 대단한 것이라고, 그것이 과학의 출발이라고 전해주세요.

무스탕 2010-02-01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그 말 안하고 지낸 친구가 생명의 은인이라거나.. ^^;;

'파스타'가 '공부의 신' 하는 날이랑 같던가요? 울집은 공부의 신팬들이 많아서리 못봐요. ㅎㅎ

hnine 2010-02-01 17:29   좋아요 0 | URL
생명의 은인이라는 친구는 아이 둘 키우며 잘 살고 있고, 말 안하던 친구는 지금 대학 교수님이 되어 있으시지요 ^^
아, '공부의 신'도 요즘 인기 있던데, 전 아직 한번도 못 봤네요. 아무리 드라마 제목이라도 '공부'란 말이 들어가는 것은 싫어요 ㅋㅋ

비로그인 2010-02-01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그 상황속에서도 실험을 하시다니 ~ 정말 놀랍도록 차분하십니다. 아마 그 문을 열고 들어간 동기도 놀라시지 않았을까 싶네요. 어휴 그 안에 갖혀있는 상상만해도 다리에 힘이 쫙 빠지네욥!!~

hnine 2010-02-01 17:31   좋아요 0 | URL
저 하나도 안 차분한데, 그 상황에서는 그냥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되더라고요 ^^ 다음부터는 그 저온실 들어갈 때 문을 꽝 닫지 않고 열어놓고 들어갔다 나왔지요. 원래 그러면 안되는데 겁이 나서요.

상미 2010-02-01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월,화 본 방송은 공부의 신을 보고, 어제 낮에 파스타 재방송 봤어.
네 기억속 사건이 다 나왔네.
두번째 사건은 내 기억 속에도 어스름하게 있는거 같아.벌써 몇년전이니...

hnine 2010-02-01 17:33   좋아요 0 | URL
너도 기억하는구나 ㅋㅋ
파스타의 셰프, 이 선진인가?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나에게는 영 비호감이더구만. 나는 아무래도 '나쁜남자' 스타일이 안 맞나봐.

조선인 2010-02-02 0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삼촌댁에 놀러갔더니 다짜고짜 절 실험실에 데려가 일주일째 거기서 먹고 자고 '안 씻고' 있는 제자를 소개시켜주는 거에요. 삼촌은 그 제자가 정말 미더운데 아직 자기 딸이 어리니 조카사위라도 삼고 싶다는 거에요. 문제는 그 때 제가 겨우 중3. 3년 뒤 대학 들어가면 바로 사귀어보라고 삼촌이 너무 진지하게 권하시는데, 저보다도 그 제자분이 더 황당하셨을 듯.
실험실 에피소드 말씀하시니 저도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 끄적. ㅎㅎ

hnine 2010-02-02 15:10   좋아요 0 | URL
삼촌께서는 그 학생의 '장래'를 보고 소개시켜주시려 한 것이겠고, 처음 본 사람의 눈에는 '안 씻고' 있는 행색이 당연히 먼저 눈에 들어오겠지요.
실험실에 있다 보면 남학생들은 일주일 쯤 집에 안가고 숙식을 학교에서 하는 일은 다반사지요. 저는 끽해야 하루 밤샘 해본 것이 전부인데...
조선인님 그런 추억이 있으셨군요, 그리고 가끔 생각나시는군요 ^^

무스탕 2010-02-02 16:28   좋아요 0 | URL
꽤 예전에, 제가 한 22살이나 23살정도에 할머니께서 입원을 했었어요. 그 병원에 언니 대학 동아리 선배가 전문의 과정으로 있었는데 어느날 병실에 들어와서 정맥주사 놓으면서 할머니한테 '손녀 저 주세요' 그러는거에요. 전 옆에서 테이프 끊어주고 있었지요. 울할머니는 언니를 달라는줄 알고 대꾸도 안했는데(그때 언니가 연애중이었거든요) 저를 달라는 말이었다는.. ^^;
잘 하면 의사 손주사위 보시는거였는데 말이에요. 흐흐흐
조선인님의 황당추억을 들으니 저도 생각이 나서요 :)

hnine 2010-02-02 17:27   좋아요 0 | URL
아니, 할머니께서는 왜 언니를 달라는 얘기로 들으셨을까요.
그런데 이거 더 계속 이야기 해달라고 조르고 싶은 이야기인걸요? ^^

무스탕 2010-02-02 22:45   좋아요 0 | URL
더 없어요. 이걸루 끝이에요 ^^
그 의사샘이 언니 선배였으니 언니를 두고 말했다고 생각하셨나봐요.
할머니는 좋아지셔서 퇴원하셨고 그 의사샘이랑은 더 이상 본적이 없어요. ㅎㅎ
나중에 할머니는 그 샘이 말한 손녀가 저라는걸 알고 슬쩍 아까워 하셨다는 후문이.. 캬캬캬~~~

hnine 2010-02-03 08:05   좋아요 0 | URL
지금의 남편 분을 위해서는 잘 된일인지도 모르겠군요 ^^

같은하늘 2010-02-09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라마는 보지 않으니 모르겠고 나인님의 경험은 잊지못할 에피소드네요.
그래도 다행인건 말안하는 친구가 생명의 은인은 아니라는겁니다.^^

hnine 2010-02-09 17:55   좋아요 0 | URL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저 위의 생명의 은인이라는 친구보다, 말 안하던 친구와 지금 더 자주 연락하며 지내고 있다는 것이지요. 웃기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