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가 그 포도 (grape)야?'
고등학교 때 책 제목을 듣고 생각했다.
'설마, 애들 책도 아니고. 유명한 작가의 장편 소설인데 제목에 먹는 과일 이름을 넣었겠어? 더구나 분노의 포도라니, 말이 안되잖아, 포장도로를 말하는 그 포도 (pavement) 라면 몰라도.'
이후로도 나는 이 책 또는 영화 제목을 들을때마다 갸우뚱하며 한번씩 더 생각해볼뿐이었는데 드디어 오늘 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제목의 포도는 pavement 가 아니라 grape이라는 걸.
번역본 책이지만 표지에 딱 하니 나와있는데. The Grapes of Wrath 라고.
(이제야 알다니 좀 창피하긴 하다.)

두권 짜리. 지루해도 참고 읽어야지 시작했는데, 첫 페이지 첫 문장부터 눈길을 끈다.
오클라호마 시골의 붉은색 땅과 회색 땅에 마지막 비가 부드럽게 내렸다. 이미 상처 입은 땅이 빗줄기에 다시 베이지 않을 만큼.
뭐지, 이 감성적이고 시적인 표현은? 상처 입은 땅이 빗줄기에 다시 베이지 않을 만큼?
이렇게 시작하여 1장은 대화없이 배경 묘사만 하고 넘어가는데 연거퍼 두번을 읽었다. 그리고, 원문이 궁금해서 Youtube에 올라와있는 원문 낭독본을 찾아서 앞부분만 들어보았다.
(맞는지 모르겠지만)
To the red country and part of the gray country of Oklahoma, the last rains came gently, and they did not cut the scarred earth.
The plows crossed and recrossed the rivulet marks.
The last rains lifted the corn quickly and scattered weed colonies and grass along the sides of the roads so that the gray country and dark red country began to disappear under a green cover.
In the last part of May, the sky grew pale and the clouds that had hung in high puffs for so long in the spring were dissipated.
감옥에서 막 석방되어 나온 주인공 톰 조드가 일자리를 찾아 아버지가 사는 농가로 가기 위해 트럭을 빌려타고 가는 장면이 곧 나온다.
감옥에서 나와 자유의 몸이 되어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가는 것을 첫 장면으로 하는 것부터가 이 소설의 큰 줄기를 반영하는 것인가, 넘겨 짚어가며 읽는다.
정오가 가까워지면서 태양이 트럭의 그림자를 파고들었다. (18쪽)
이 문장도 그렇고, 아직 몇 페이지 읽지 않았는데도 작가의 세심한 표현과 문장력이 눈에 들어온다.
어쩌면 생각보다 덜 지루하게 읽을지도 모른다는 좋은 예감을 가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