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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 - 사육 외 2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1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승애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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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에 겐자부로의 책을 읽은 건 고작 『익사』뿐이다. 책 한 권을 읽고 작가에 대해 안다고 하기는 어렵다. 몇 편의 책을 읽어봐야 작가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되는게 아닐까. 오에 겐자부로하면 일본의 작가 중 노벨문학상 두번째 수상 작가라고 알고 있다. 작가의 작품을 더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차에 작가가 직접 골라 엮은 총 23편이 자선 단편 선집을 읽는 일은 꽤 즐거운 시간이었다. 오에 겐자부로라는 작가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그의 단편 선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초기 단편과 중기 단편 그리고 후기 단편으로 묶여져 있으며 작가의 등단작인 「기묘한 아르바이트」에서부터  자선 단편선집의 표제작인 「사육」을 비롯  「'레인트리'를 듣는 여인들」 연작과  「새로운 사람이여 눈을 떠라」연작 등이 실려있다.

 

  전체적인 작품의 느낌을 보자면, 꽉 막힌 공간에서의 감금과 현실과의 순응에 대한 글이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장애자인 아들에 대한 글이 꽤 많은데, 아들에 대한 사랑과 애틋함들이 짙게 배어 있는 작품들이었다. 가족 중에 장애인이 있으면 평생의 부담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부모인 자신이 죽을때까지 아이를 돌볼 수 있지만, 죽음 이후의 자식에 대한 삶을 걱정하다보면 앞이 깜깜해질거라는 것도 안다. 그래서일까, 연작 「조용한 생활」에서 딸의 시점으로 쓴 이야기는 가슴이 뭉클하게 만든다. 장애인인 오빠 '이요'를 데리고 결혼하겠다는 이야기였다. 방 두 개, 거실과 부엌이 딸린 아파트를 확보할 수 있는 남자를 고르겠다고 하는 딸. 거기에서 조용한 생활을 하겠다는 이야기였다. 장애인인 오빠를 생각하는 여동생의 애틋함 혹은 지체장애자의 성적인 '폭발'에 대한 염려를 볼 수 있었다. 언젠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장애인 남자애가 하나 있었는데, 그 아이는 주로 놀이터 부근에서 어정거렸다. 사춘기 아이고 눈빛도 다른 아이들과는 달라서 당시 어린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들에게 요주의 인물이기도 했다. 어느 책에선가도, 장애인들이 성적으로 더 예민할 수 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물론 우리의 편견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혹시 그럴지도 모르는 오빠에 대한 염려로 오빠가 걷던 길을 따라 걸었던 여동생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었다.

 

  작품들 중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이 책의 표제작이기도  한  「사육」이라는 작품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의 어느 시골 마을의 소년. 도망가던 적의 비행기가 숲에 떨어져 살아남은 검둥이 포로가 한 명 있었다. 마을 어른들은 검둥이 포로를 데리고 와 창고에 가둬두었고, 마을 소년들은 검둥이가 신기해 창문으로 엿보고 음식을 가져다 주면서 말이 통하지는 않지만 그와의 우정을 나누는 이야기였다. 산골 소년들은 처음에 검둥이 포로를 보고는 진귀한 가축 혹은 머리가 좋은 동물로 생각하고 사랑했다는 이야기였다. 산골 소년들의 순수함. 결국엔 생각의 차이로 파멸에 이르고 말지만, 아마 소년의 손에 새겨진 흉터처럼 그에 대한 기억들이 평생을 가지 않을까.

 

'레인트리'라고 부르는 이유는 밤에 소나기가 내리면 다음 날은 한낮이 지날 때까지 그 우거진 잎사귀에서 물방울을 떨어뜨려 주기 때문이에요. 다른 나무들은 비가 와도 금방 말라 버리는데 이 나무는 잔뜩 우거진 손가락만 한 잎사귀에 물방울을 저장해 두는 거죠. 정말 슬기로운 나무 아닌가요? (307페이지,  「슬기로운 '레인트리'」중에서)

 

 

  '레인트리'라는 나무가 있던가. 아무래도 '레인트리'를 주제로 한 연작때문에 '레인트리'가 궁금할 수 밖에 없었다. 검색해 보았지만 자세히 나오지 않고, 미국 자귀나무라고 하는 모양인데, 내가 알고 있는 자귀나무와 책속에서 언급하는 '레인트리'와는 조금 차이가 나는 것도 같았다. '레인트리'는 작가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모호하고 비밀스럽게 그리고 자주 언급되는데, 후기 아주 나중의 작품에서야 그가 처음 '레인트리'라는 나무를 보았던 장소와 느낌에 대해 나온다. 자신의 기억속의 장소, 그곳에 있던 나무. 그 곳의 기억들이 다양한 작품에서 다양하게 변주되어 나타난것 같았다.

 

  작가는 단편 속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사람의 인생이란 결국 죽음을 향한 행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 아무튼 그 오랜만의 단편의 주제는 '레인트리'였다.' 324페이지) 라고. 비탄을 뜻하는 'grief'와 대학시절 친구의 죽음, 그로 인한 비탄. 그리고 어느 음악가가 만든 '레인트리'라는 곡.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는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마음이 급해서 한 작가에게 오랫동안 머물러 있지 못했다. 중년이 지나고 나니 내게 남겨진 노년에서 죽음에 이르는 시간 동안 집중해서 읽을 수 있는 작가의 수가 대충 보였다. (427페이지)

 

  오에 겐자부로는 맬컴 라우리의 책과 윌리엄 블레이크의 책을 읽으며 작가들의 작품에서 촉발된 메타포를 가지고 단편들을 썼다고 했다. 아들의 눈에 드러났던 참으로 황량하고 서늘했던 비탄의 덩어리들을 보고 아들과 화해할 수 있었던 것도 블레이크의 시가 매개가 되었다고 했다. 그가 인용한 블레이크의 시는, '오오 그분은 우리의 비탄grief을 부숴 버리는 그 기쁨을 내어 주신다 우리의 비탄이 사라지기까지 우리 곁에 앉아 탄식하신다'(453페이지,  「순수의 노래, 경험의 노래」중에서) 였다. 장애를 가진 큰 아들과의 공생과 블레이크의 시에서 환기된 영감을 하나로 엮어 일련의 단편집을 완성했다고 표현했다.

 

  이런 이야기들이 많아서일까. 장애를 가진 아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심정이 고르란히 드러난 글에서 소설이 아닌 작가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느꼈다. 장애를 가진 아들, 커가는 아들에 대한 아내의 두려움과 혹은 염려. 아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깨우침. 삶을 바라보는 작가의 올곶은 시선들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세상, 인간에 대해 나의 삶과 연관 지어 정의집을 만들어 보고 싶기도 했다. (512페이지,  「새로운 사람이여 눈을 떠라」중에서)

 

  오에 겐자부로를 읽고 싶으나 어디서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모르는 독자에게 이 단편집을 꼭 권하고 싶다는 번역자의 말처럼, 오에 겐자부로라는 작가에 대해서 좀더 다가선 느낌이다. 그가 반전반핵에 앞장서 왔고, 개인적인 삶에서 오는 깊은 성찰을 만날 수 있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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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밥도둑
황석영 지음 / 교유서가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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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하게 오래전에 먹었던 음식들이 생각나는 요즘이다. 나이탓일까. 어렸을 때 엄마가 해주셨던 음식, 그때는 그 음식이 지겨워 먹고 싶지 않았는데 지금에서야 생각나는 건 왜일까. 엄마의 음식을 먹지 못하기 때문일까. 우울하고 슬플때 엄마가 해준 음식을 간절하게 먹고 싶을때가 있다. 그 전에는 왜 그런 느낌을 갖지 못했을까. 엄마의 음식이 생각나는 날이면, 그 음식을 기억하며 만들어본다. 비슷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데도 그 맛이 나지 않는다. 물론 지금은 먹을게 많아 제대로 된 참맛을 느끼지 못하는 수도 있다. 병원에 계신 엄마에게 가며 엄마가 좋아할 만한 음식을 만들거나 사서 가는 발걸음은 늘 무겁다. 그 음식들을 우리집에서 같이 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때문인지도 모른다. 

 

  엄마는 김치를 잘 담그셨다. 어디 김치 뿐일까. 엄마가 해준 아귀찜, 홍어찜, 명절 음식인 두부와 무를 썰어 쇠고기로 국물을 낸 탕국(우리는 탕수국이라고 불렀다), 평소에 해주시던 물이 잘박하게 들어있이 시원한 맛이 일품인 콩나물. 오래전엔 너무 짜서 먹지 않았던 간장 게장과 빨갛게 고추가루로 맛을 낸 꽃게장. 생각해보니 엄마의 음식이 많았구나. 다른 건 대충할 줄 아는데 간장 게장은 아직까지도 엄마의 맛을 내지 못하겠다. 엄마만의 비법이 있었을까. 또한 딸기를 뭉근하게 끓여낸 딸기 고추장까지. 병원에 계신 엄마에게 몇 번이나 물었으나 딸기 고추장은 아직까지 시도해보지 못했다.

 

  엄마의 음식을 기억하는 나처럼 많은 사람들이 간직한 추억의 음식이 있을 것이다. 기억속의 음식을 기억하는 일은 그 시절을 추억하는 것과도 같다. 그때 먹었던 음식, 그때 나누었던 이야기들. 함께 했던 시간들이 이렇게 애틋하게 기억되리라고는 그때는 생각못했었지. 이렇게까지 간절하리라고 어떻게 생각했을까. '누군가와 함께 먹었던 음식의 맛에 대한 그리움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고 황석영 작가는 말했다. 그렇다. 나도 이 책을 읽는데 오래전에 가족들과 함께 먹었던 다정한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 시간들은 그리움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음식, 생소한 음식과 함께 황석영의 그리움의 시간들을 함께 했다.

 

 

 

장아찌를 떠올리면 밥 한 덩이가 얼마나 맛있는 음식인가를 확인하게 된다. 그러고는 굶주림 속에서 살아나온 사내의 등덜미에 흐트러진 하얀 비듬 생각이 나고, 그가 남긴 딸자식의 눈빛이 생각난다. (79페이지)

 

  작가는 장아찌의 맛을 떠올리며 추억의 시간을 말했다. 깻잎이며, 취, 머윗잎, 겨울에 김장하고 남은 작은 무, 마늘, 양파 등에 간장 졸인 물을 부어 만든 장아찌는 어쩌면 엄마의 맛이다. 엄마의 맛을 따라가고자 나이가 들면서 만든 음식들이다. 작가의 말처럼, 짭짤한 장아찌를 먹고 났을 때의 개운함과 입맛이 돋우어진 느낌들. 아직도 냉장고에 켜켜이 쌓여진 장아찌에 밥 한 그룻이 생각날 정도 였다.

 

  북한 출신인 어머니가 돌아가시기전 들고 싶었다던 노티라는 음식과 먹을 것 부족하던 피난 시절에 어머니가 해주셨던 장떡의 추억들은 지나간 우리의 고통의 시간을 갖게 했다. 이 때는 모든 것이 부족할 때였구나. 먹는 것보다 더 힘들었을 죽느냐 사느냐의 고통의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때 먹었던 음식들이 생각나는 건 그 시간들을 함께 했던 사람들이 그립기 때문일 것이다. 벗을 떠나보낸 뒤 그와 함께 즐기던 음식들의 맛을 잃었고, 마지막 여행길에 그가 먹고 싶었다던 아욱된장국이 올라올 때면 어쩐지 수저가 무겁다고 말했던 마지막 문장에 그만 코끝이 시큰해지고 말았다.

 

  하필이면 이 책을 읽을 때 배가 고픈 상태였다. 평소라면 독서하며 보냈을 저녁 시간에 이 책 속의 추억의 음식으로 인해 배에서는 꼬르륵소리가 요동을 쳤다. 결국 다 읽지 못하고 음식을 입에 넣었다. 그럼에도 추억의 음식을 먹지 않아서 일까, 작가의 말처럼 개량화된 음식을 먹어서 일까, 속이 헛헛했다. 엄마가 해주시던 음식들이 못내 그리웠다. 막 지은 고슬고슬한 밥에 장아찌 얹어 먹고 싶은 건 비단 나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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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 2016-03-24 15: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어떤 비싸고 보기 좋은 음식보다 엄마 음식이 세상에서 제일로 좋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 결핍에서 오는 간절한 그리움일 수도 있겠어요.

Breeze 2016-03-26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분들이 그렇게 느끼실 겁니다. ^^
 
[시스터캐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시스터 캐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6
시어도어 드라이저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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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는 법. 그럼에도 가지고 싶은 것을 향해 부나비처럼 나아가는 사람이 있을 터. 혹은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도 분명히 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삶에 대한 욕망. 그로 인한 돈의 가치를 알게 되면 욕망의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 그러고 보면 삶이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가장 밑바닥에서의 삶은 고통스럽기 그지 없다.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하루를 버티기 위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을 읽었다.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문제작이자 그의 첫소설이다.

 

  시골에서 살던 열여덟의 처녀 캐리가 시카고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더 나은 삶, 도시에서의 삶으로 향한 발걸음이었다. 언니집에 기거하며 직장을 구할수 있을거라는 부푼 꿈을 안고 도착했다. 언니는 여동생이 직장을 얻어 숙식비를 주면 그것으로 집세를 조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직장을 구하러 다녔다. 공장, 판매점 들을 돌아다녔지만 경험이 없는 캐리는 마음처럼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잠깐 다녔던 공장도 주급이 겨우 4달러 50센트였다. 언니에게 숙식비로 4달러를 주고 나면 교통비도 하기 힘들었다. 캐리가 직장을 구하러 다닐때 백화점을 보았다. 장신구, 의류, 귀금속등으로 반짝이는 통로를 걸으며 써보고 싶지 않은 것, 갖고 싶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그녀의 욕망을 자극했다. 그러나 그녀는 한낱 구직자일뿐이었다.  

 

  소설에서 백화점은 캐리에게 다가가고 싶은 욕망의 실체다. 갖고 싶은 것, 누리고 싶은 것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찬 곳. 그녀가 기차에서 만났던 바람둥이 드루에의 방문에 거부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드루에가 입고 있는 옷, 그녀에게 옷을 사라고 주겠다는 돈. 옷을 사고 싶고, 모자도 사고 싶었던 캐리는 그의 유혹을 견디기 힘들었다. 언니 집을 나와 드루에의 정부로 살아가는 일도 아무렇지 않았다. 다만 그녀에게 결혼하자고 말하지 않는 그의 진심을 어느 정도 눈치챌 뿐이었다.  

 

  캐리의 환심을 사고 싶은 이는 드루에 뿐 아니라 그가 알고 있는 술집의 지배인 허스트우드도 마찬가지였다. 아내와 딸, 성년이 되는 아들은 돈만 원할 뿐 그의 존재를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 젊고 아름다운 캐리를 본 후 그녀가 드루에와 함께 살고 있음에도 그녀를 욕망했다. 드루에가 출장을 간 사이 캐리의 환심을 샀고 그녀를 드루에게서 빼앗아오고 싶어 했다. 이런 즈음에 드루에의 비밀 모임에서 모금의 일환으로 연극을 하게 되었고 캐리는 그 연극에 참여하게 되었다. 자신이 맡은 역할에 깊이 빠져 연극을 했던 캐리는 곧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캐리의 삶에서 두 남자 드루에와 허스트우드는 그녀의 욕망을 자극한 사람들이었다. 처음 드루에가 가진 부를 욕망했었고, 이후 허스트우드의 사랑과 부를 욕망했다. 그녀가 허스트우드를 따라 시카고에서 뉴욕을 향했을 때도 어쩌면 허스트우드는 캐리의 욕망을 눈치챘는지도 몰랐다. 그녀가 원하는 것을 주고 싶었고, 그녀의 사랑을 얻고 싶었다. 화려한 뉴욕에서의 삶. 잘 나갈때는 아무런 고통없이 살 수 있지만, 직장을 잃고 말았을때 가진 돈이 자꾸 줄어들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고통의 시작이다. 화려하고 예쁜 옷들을 살수 없고,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없으며, 극장에 연극을 보러가는 일도, 호텔에서 차 한 잔을 즐기는 일도 사치가 될 뿐이다. 서로가 사랑했던 순간의 기억은 잊고 이제는 서로의 존재가 귀찮을 뿐이다. 돈이 없으면 그렇게 된다. 왜 나가서 일자리를 찾지 않을까. 왜 나에게만 의지할까. 돈이 없는데 왜 자꾸 누리려 하는 걸까.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입으려면 자기가 나가서 돈을 벌어오면 좋겠다, 이렇게도 생각한다.

 

  사랑했던 순간이 지나고 이들에게 남은 것은 이제 이별 뿐인지도 모른다. 집세를 낼 수 없을만큼 돈이 떨어지고 캐리가 일자리를 구해 나가야 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그래, 오래전에 연극을 했었지. 연극배우를 하면 어떨까. 경험은 거의 없지만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얻었던 코러스 자리. 이어 주어진 단역은 주급 10달러에서 주급 150달러로 상승했고 그녀의 위상도 높아졌다. 반면 캐리가 버리고 간 허스트우드는 어땠을까. 겨우 몇달러로 살아가야했던 그는 먹을 것을 절약하고 잠잘 곳을 구해야 했다. 가지고 있던 돈이 떨어지자 구걸까지 해야 했다.

 

  나는 캐리에 대한 욕망에 어느 정도 공감하면서, 한편으로 허스트우드에 대한 안타까움이 컸다. 그가 이렇게까지 비참한 생활을 해야 하는 것. 나락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 결국 캐리에 대한 욕망때문이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작가는 냉정했다. 허스트우드가 캐리에게 버림받고 거리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게 놔두는 장면에서 였다. 그저 살아가는 게 고통일 뿐인 삶. 자신이 욕망했던 삶이 이토록 비참한 결말을 가져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기에.   

 

  도시의 빈민이 더 살기 어렵다고들 한다. 한때 잘나갔던 사람도 어느 순간에 이처럼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배우로서의 삶,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음에도 행복하지 않았던 캐리는 오로지 갈망만 할 뿐이었다. 행복을 꿈꿀 뿐이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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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마더스
도리스 레싱 지음, 강수정 옮김 / 예담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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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리스 레싱이라는 이름때문에 『그랜드마더스』를 읽고 싶었다. 할머니의 생애를 다루었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랜드마더스』라는 제목때문이었다. 할머니의 생애, 엄마의 삶을 바라보는 화자가 따로있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했던 것. 이 책이 영화 「투마더스」의 원작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영화 예고편을 보았었다. 둘도 없는 친한 친구와 그 아들들이 친구의 아들들과 관계를 맺는다?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으로 보였다. 나오미 왓츠라는 여배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 영화를 보고 싶었다.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파격적인 내용때문에 뒤로 미루었던 영화였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볼걸 그랬다. 소설을 읽고나니 영화가 궁금해졌다.

 

  소설속에서는 로즈와 이안, 릴과 톰이 침대속에서의 상황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밤에 침대로 왔다 갔다는 이야기만 간단하게 표현됐다. 난 이들이 관계를 맺었을까? 맺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걸 보니 잠을 잔건 맞구나. 과연 이런 관계가 가능한 것인가. 어떻게 친구의 아들과 관계를 맺는단 말인가. 더군다나 두 명의 친구, 두명의 아들이 서로의 아들들과 말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데 이들의 관계를 자세히 살펴보면 조금쯤은 수긍할 수도 있겠다. 어렸을때부터 서로의 거울처럼, 쌍둥이 자매처럼 둘도 없는 친구사이였던 로즈와 릴. 바로 앞집에서 살며 각자의 남편들과 서로 한가족처럼 왕래하며 서로의 아들들을 친아들처럼 키우는 사이였다. 남편들이 소외감을 느낄 정도로 로즈와 릴은 친구였고, 로즈의 남편 헤럴드가 다른 도시로 근무지를 옮겼을때 릴과 떨어지기 싫어 남편 혼자 떠나보낼 정도였다. 친구사이라는게 아무리 친하고 헤어지기 싫어도 결국엔 가족을 위해 떠나지 않는가.

 

  시간이 흘러 아들들은 열일곱이 되었다. 이안은 아버지의 부재로 릴처럼 로즈를 의지했다. 그 마음을 착각했던 게 아닐까. 친구 아들이 자신의 침대로 들어왔을때 왜 거부하지 않았을까. 엄마 친구는 또다른 엄마일텐데. 이런 이유 때문인지 로즈와 이안, 릴과 톰의 관계는 금기시되는 근친상간적 느낌이 강했다. 서로의 남편들이라면 차라리 덜할텐데, 서로의 아들들이라고 하면 이건 좀 다르지 않나. 이안이 엄마의 침대에 있는 장면을 보았을때 톰은 왜 릴에게로 향했는지. 톰과 이안은 사랑이라고 표현하던데. 이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비틀린 사랑. 영원히, 아무도 모르게 이 사랑이 지켜지길 원했을까.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 서로를 향한 마음을, 서로의 아들에게로 향한게 아니었을까. 모성애의 또다른 모습을 변질시킨건 아니었는지. 누구보다도 사랑했다고 하는 이들의 말이 모순되는 순간이었다.

 

 

 

  아흔이 넘은 작가는 우리들에게 사랑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질문을 건넨다. 금기시되는 사랑도 사랑의 한 종류일 것인가. 백인과의 관계에서 아이를 가진 흑인 처녀의 사랑은 과연 사랑이었는지, 전쟁속, 단 며칠간의 만남에서의 사랑이 영원할 수 있을까가 그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두번째 소설은 「러브차일드」라는 소설이다. 진취적인 어린 청년 제임스. 그는 정치와 문학에 눈을 떴다. 전쟁이 터지고 맞지 않은 군화를 신고 전쟁에 참여했다. 그의 맞지 않은 군화는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전쟁의 힘겨움을 표현한 것 같았다. 그가 탔던 군함이 케이프타운 항구에 도착했다. 나흘간을 머물 예정인데 저택의 아름다운 젊은 부인은 군인들에게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고 파티까지 열어 주었다. 제임스에게 안주인인 대프니는 여신이자 님프였다.

 

  생각해보자. 단 나흘간의 만남이었다. 이 만남이 평생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격정적이고 절박했던 그리고 한없이 다정했던 나흘간의 기간. 가장 절박한 시기에 만난 사람이라 평생의 사랑이었다고 생각된 것일까. 만약 대프니가 아닌 다른 누구였더라도 제임스에게는 사랑이었을까. 영원한 사랑, 사랑의 집착을 보여준 수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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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이던트 모중석 스릴러 클럽 39
프레드 바르가스 지음, 양영란 옮김 / 비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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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중세 시대의 유령 기마부대인 '성난 군대'에 대한 이야기로 흥미를 끌었던 『죽은 자의 심판』이라는 작품으로 인해 프레드 바르가스라는 작가의 이름을 새겼다. 이번에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2004년 작품을 다시 읽으니 장 바티스트 아담스베르그의 매력에 다시한번 빠지게 되었다. 이번에는 넵튠의 무기인 삼지창, 즉 세발작살이 살인무기이다. 과연 세발작살이 살인무기가 될 수 있을까. 『죽은 자의 심판』에서는 중세 시대의 유령 기마부대가 출현하더니 이번엔 분명 죽은 자가 저질렀던 똑같은 수법의 살인이 발생한 것이다. 

 

  오래전 십대의 아담스베르그는 동생 라파엘이 연인 리즈를 죽인 것 같다며 찾아오자 동생의 손에 쥐어져있던 송곳을 강물속에 버리고 다른 자가 살인을 저질렀다며 동생의 무죄를 주장한다. 열여덟 살의 아담스베르그는 저택에 살고 있었던 퓔장스 판사가 그 곳을 지나가는 모습이 생각났고 그를 의심한다. 배에 세 개의 혈흔이 있고, 세 개의 혈흔은 세발작살로 추정되었다. 삼십 년에 걸쳐 같은 사건이 9건이나 생겼고, 퓔장스 판사가 분명히 죽었는데도 같은 사건이 또다시 일어나자 아담스베르그는 판사가 분명하다며 판사의 흔적을 뒤쫓는다. 분명히 죽어 땅속에 묻혀있는데, 퓔장스 판사의 유령이 저지른 살인일까, 아니면 판사의 제자라도 생겨난 것일까. 소설의 처음부터 아담스베르그는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고 무조건 퓔장스 판사가 살인을 저질렀을 것이라는 추리를 했다. 그래서 몇십년 동안 그 사건을 추적해왔고 퓔장스 판사를 잡고 싶었다. 세발작살로 죽은 사건이 또 생겼지만 아담스베르그는 자신의 팀원들과 함께 캐나다의 퀘백으로 'DNA 연수'를 떠나야했다.  

 

  퀘백에서의 연수는 꽤 많은 페이지를 할애해 소개하고 있었다. 굉장히 지루한 그의 퀘백 생활이었다. 그가 머물던 숙소에서 오솔길을 산책하곤 하다가 한 여자를 만나 우연히 여자와 밤을 보내기도 했던 생활을 나타낸 장면을 읽으면서도 왜 이렇게 지루하게 긴 페이지를 할애해 그의 연수 생활을 나타내려 한 것일까 의문이 들었다. 그가 연수를 마치고 파리로 돌아가야하는 날이 되어서야 무언가 사건이 벌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날 술을 마시고 기억나지 않은 일들이 자신의 발목을 잡을 줄이야. 더군다나 자신이 잡고 싶었던 퓔장스 판사가 저질렀을 똑같은 사건이 생긴 것이다. 꼼짝없이 살인자로 몰리게 생긴 그를 도운것은 자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은 거구의 여형사 르탕쿠르였다. 르탕쿠르는 그에게 전봇대 역할을 해주기도 하고 그를 변장시켜 캐나다를 탈출시키게 만든 것이다.

 

 

  이쯤에서 아담스베르그가 주장하고 있는 살인사건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수가 없다. 과연 퓔장스 판사는 유령이 되어 세발작살로 된 무기로 살인을 저지르는 것일까. 왜, 무엇때문에? 왜 죽어서도 다시 되살아나서 살인을 저지르는 것일까. 그가 살아있다면 아흔일곱 살의 노인일텐데, 과연 살인을 저지를 수 있을까. 거구의 시체를 움직일 힘이 있을까. 누군가 조력자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의 살인 방법을 본따 같은 방법으로 살인을 저지른 제자라도 생긴 것일까. 여러가지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추리소설의 묘미는 살인을 저질렀던 살인자의 흔적을 추적해가면서 발견해내는 살인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일이 아니던가.

 

  살인자의 흔적과 살인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조력자가 필요했다. 살인자라는 누명을 쓰고 숨어있었던 그에게 팔순이 넘은 할머니 클레망틴과 역시 할머니 해커 조제트가 그들이었다. 추리소설은 대부분의 남성작가의 전유물로 알고 있다. 물론 애거사 크리스티도 있었지만 거의 남성작가들의 작품이 많고 대부분의 독자들도 남성작가의 작품에 열광하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프레드 바르가스의 작품은 남성 형사인 아담스베르그가 나오기도 하지만 그다지 남성적이라고 볼 수 없다. 남성적인 매력을 풍기기보다는 말수가 없고 느리며 천재적인 직관력으로 살인 사건을 해결한다. 그의 보좌관인 당글라르와 루탕쿠르가 오히려 남성적인 형사의 모습이라고 할수도 있겠다.

 

  아담스베르그의 주변 인물을 세세하게 파악하고 인물 중심의 스토리를 진행하다가 어느 순간에 사건의 본질에 다가가 사건을 해결하는 식의 추리소설이다. 약간 지루하게 인물 묘사를 한다고 느낄수도 있지만 소설의 중반을 넘어가면 전혀 다른 양상을 띤다. 이게 프레드 바르가스 만의 추리소설의 묘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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