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론 현대사상의 모험 10
에릭 홉스봄 지음, 강성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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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과의 유쾌한 대화?

"저항 반역 그리고 재즈"라는 책을 읽었을 때 홉스봄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사랑방에서 손주를 머리맡에 앉혀두고 하기엔 부담스러운 이야기들의 역사였다면, 이 책 "역사론"은 그동안 그가 기술해온 '역사 방법론'의 입장에서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조금 더 난해한 감이 있는 책이다. 하지만, 그의 문체에 젖어서 익숙하게 될 때 쯤에는, 동네 어귀에서 앉아있는 현인인 한 어르신과의 대화로 이 책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홉스봄에 의해서 비판받는 역사가들은 흔히 다음과 같은 부류이다.

먼저 속류 맑스주의 역사가들이다. 맑스의 인식을 단순한 '토대-상부구조'론으로 환원하고, 단선적인 역사관 (원시 공산제 -> 고대 노예제 -> 중세 봉건제 -> 근대 자본제 -> 사회주의 사회구성체)로 역사를 환원하려는, 그러면서도 실제로는 상당히 보수적인(!) 근대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 대한 비판을 홉스봄은 먼저 수행한다.

두번째는 주류의 계량사가들이다. 모든 역사현상을 수치로 환원하고, 칸트주의자들의 '의심할 수 없는 전제'에 입각한 실증주의적 방법으로 역사를 파악하는 그들은, 실제 역사가 움직이는 힘에 대한 인식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홉스봄의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세번째가 상당히 논쟁적인 부류인데, 그들은 바로 포스트모던 역사가들이다. 그들은 중심에 대한 해체, 니체적인 상대주의를 통해서 역사를 파악하고, 생생한 구술사와 그들 나름의 계열화를 통해서 역사를 파악하려 하는데, 홉스봄은 그들에 대해서 절대적인 사실관계의 측면을 그들이 간과한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홉스봄이 지나치게 완고한 나머지, 이 부류의 사람들의 장점을 간과한 것일 수있다. 중심과 결정론에 대한 부정이 의미하는 것이, 새로운 진리작용을 위한 기반을 제공하는 것이라면, 역사의 움직이는 동적 측면을 강조하는 홉스봄도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상당부분에서 홉스봄은 아직 이론적 입장이 완성되지 않은 '약한 고리'에 대해서만 비판을 가하는 측면도 나에게는 반비판할 수 있는 요소를 제공한다.

하지만 그가 태어난 시기와 그의 지적사유의 풍토를 살펴보건데, 그의 저작은 음미할만한 가치가 있으며, 고집스럽게 자신의 학문에 천착하고 다른 사유와의 접속을 지금까지 끊어오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본다면, 다시한번 그의 저작들의 위대한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역시 이 책을 다 덮고나서 느끼기도, '어르신 한 수 잘 배웠습니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책은 단단하고 고집스럽지만 상당히 많은 '지혜'가 들어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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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이학문선 1
안토니오 네그리 & 마이클 하트 지음, 윤수종 옮김 / 이학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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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상당히 논쟁적인 책이다.

정통 맑스주의 진영에서는 이 책을 '초제국주의적 경향'의 절정이라고 비난하고, 반대로 탈근대적인 맑스주의자들의 진영에서는 이 책이 '지나치게 구성적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맑스에 대한 비판이 실제로 맑스식 쓰기의 방법을 몰이해한데에서 출발할 확률이 높은 것처럼, 네그리에 대한 비판도 실제로는 그 나름의 방법에 대한 몰이해에서 출발할 확률이 높다.

이 책은 제국주의에서 제국적 권력으로 이행하는 세계 질서의 변화에 대한 책이다. 이 책은 맑스, 들뢰즈, 니체, 푸코의 개념이 낯선 이들에게는 상당히 어렵게 이해될 소지가 다분하다. 예를 들면 '탈영토화되고 탈중심화되다'라는 말 조차도 들뢰즈의 '천의 고원'(혹은 천개의 고원)의 개념 설정을 정확하게 포착하지 않으면, 단순한 영토에서 벗어남과 중심이 분절되는 경향으로만 포착하기 쉬우나, 실제로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은 이와는 약간 상이하다.(예를 들면 특정한 사회적 '배치'의 구성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 지를 포착해야 한다.) 철학자가 점차 '내공'이 쌓일 수록 말이 쉬워지고, 빨래하는 아낙도 이해하기 쉽게 글을 써야 한다는 공리가 우리 머리속에 자리잡고 있는 한, 네그리는 '어려운 프랑스 철학을 더더욱 어렵게 갈겨놓은' 사상가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의 생각들은 나름의 목적의식에 충실하기 위한 개념만 최소한의 선에서 포착하며, 그나마도 사실은 1부에서 최대한 설명하려 애 쓴다.

맑스의 "자본"을 읽을 때, 접하는 첫째의 어려움이 첫장의 '가치론'의 영역이고 가장 논쟁의 여지를 많이 주는 부분도 그 부분인 것 처럼, 네그리의 1부의 영역은 상당히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의 오케스트라로 이루어 졌다.

하지만 이진경이 지적했듯이, 사실상 네그리는 맑스와 같이 장난질을 치고 있다.

맑스가 정치경제학의 척도로서 노동과 상품의 관계를 측정하려는 '노동가치설'의 공리를 해체하기 위해서 헤겔의 '난해한' 문투로 휘갈기다가 결국에는 그러한 노동가치설을 신봉하는 '정치경제학'을 해체하면서 그 장을 마감하듯이(그에 관한 논의는 "자본을 넘어선 자본"을 참고하라),

네그리 역시 맑스의 방법을 차용해서 세계질서를 고전적인 사법적 척도로 파악하려는 시도를 로크적 전통 홉스적 전통으로 나누어 설명하다가, 결국 이를 "국내법의 유비로서만" 전지구적 법제를 파악하는 것이라며 해체시킨다. 그러한 척도는 사실상 "국제질서의 경향성을 포착하는 데" 오히려 난점을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난점을 제거하고 읽는 다면 네그리의 책은 노동/자본의 계급투쟁, 그리고 그를 통해서 등장하는 "제국"과 그에서 구성되는 "다중"에 대한 놀라운 설명이며, 동시에 즐거운 혁명의 '개념상자'로서 기능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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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내 마음의 식민주의
윤지관 외 엮음 / 당대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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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과연 영어없는 세상에서 살 수 있는가? 우리는 영어를 넘어설 수 있는가?

아니다. 문제를 거꾸로 뒤집어서 생각하면 우리는 얼마나 영어와 밀접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가?

매일 아침 일어나 naver에 접속하고 naver이라는 영어 스펠링을 쳐서 들어갔다 해서 우리는 영어와 뗄레야 뗄 수없는 불가분의 관계에서 산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매순간 거리를 걷다 지나치는 영어 간판과 조우한다해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쉽게 생각해보자. 이 땅에서 영어로 대화하는 인간이 도대체 몇 명이나 되는가?

한 100만쯤 있어서, 평범한 다수의 영어문맹자들 때문에 이들이 커다란 사회적 문제가 되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영어를 써야하는가?

아니면, 지나가는 외국인이, "excuse but don't you mind if I ask where the bus stop is" 따위를 물어 볼 때 대답 못하는 한심한 이들이 걱정되어서 영어를 써야하는가?

어쩌면 문제설정자체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영어 자체에 식민지적 자세로 대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제 벌써 10년쯤 되는 이야기지만, 영어 공용화론을 복거일이 떠들고 다니던 시점을 즈음해서, IMF와 맞물려 살기 빡세진 이들에게는 '영어'가 또하나의 살기위한 지상과업으로 부과되었다.

이나영, 장혁 주연의 "영어완전정복기" 같은 영화의 단상이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건(주체를 분명히 하자면, 20~50대의 white color 노동자들), 우리가 이미 그 수렁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토익, 토플은 한국인들의 극성맞은 학습법 탓에 계속 개량되고 있고, 덕분에 ETS는 돈방석에 앉아있고, 어떤 횡포를 부려도 모두가 참아주는 무소불위의 권력이 되었다. 또 한편으로 토익, 토플점수의 수직상승에 걸맞지 않게 영어 잘하는 이들의 역설적인 부재는, 한국인들에게 더 강한 영어에 대한 압박을 넣고 있고, 이미 조기유학은 있는 자들의 특권만은 아닌 듯 보이기도 한다.

문제는 뒤죽박죽 엉켜있고, 답은 특히 보이지 않는다.

이 책은 그 문제들에 대한 나름의 문제제기와 나름의 답변들의 묶음이다.

어떤 이는 영어 학습법의 문제를 꼬집는가 하며, 어떤 이는 영어공용화론의 문제를 반박하며, 또 어떤이는 영어제국주의 혹은 영어 제국의 현실의 식민지적 상태에 대해서 논박한다.

따라서 이 책을 읽으면서, 먼저 영어 학습법에 대한 담론을 상식선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영어 공용화론이 되도 안되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또 마지막으로 탈 식민주의와 관련된 문예비평하는 학자들의 문제의식이지만,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그리고 전지구적으로 맥락지어진 영어의 문제에 대해서 한 번쯤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난, 학술집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여러 명이 학진 프로젝트에 제출하기 위해, 혹은 학술대회를 개최하기 위하여 짧게 짧게 "잽"만 날리는 글들은 별로 깊지도 않고, 잠깐 몰입할 만하면, 바로 불을 꺼버리곤 만다. 이 책의 단점도 거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논의 들에 대해서 한번 훑고 지나가기에 기가막힌 책이고, 그러면서 그냥 자기가 신문을 보면서 요즘 같은 때 토플 대란.. 이런 문제가 나오는 구나 하면서 그냥 그것들에 대해서 탐색하기에는 괜찮은 책이지만, 천천히 음미하면서 나름의 모색을 하기에는 너무나 호흡이 짧은 '단상'들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다.

난 강내희 선생의 영어 식민지론에 대한 한권의 책을. 그리고 윤지관 선생의 책을 기대해 본다.

하지만 이 책을 그냥 폄하하지는 않을 계획이다.

이 책이 도입부의 논쟁이라 생각하고, 이제 이 토대 안에서 뭔가 하나라도 싹을 움트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편 실용영어와 교양영어의 차이도 몰랐던 나에게 그 차이를 알려준 점에서 고맙고,  몰입교육법(immersion education)이라는 걸 알려주어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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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천상 공부할 팔자임을 부정하지 않고 살고 있다. 어떤 직업을 잠시나마 '영토화'할 수야 있겠지만, 또 도바리치고 결국 안착할 곳은 책상다리라는 것 정도는 점차 더 강하게 느끼고 있다.

언제나 논쟁할 거고, 필요하다면 논쟁에 필요한 말들을 위해 외국어를 기꺼이 배울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영어는, 같잖게 "how are you" "i'm fine , thanks, and you" "how is the weather" 따위의 반복이 아니라 Shakespeare의 시 같은 어투로 2pac 같은 리듬감으로 내 생각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일 테고, Eric Hobsbawm 과 같은 글을 쓰기 위한 연장이 될 거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영어와 맞닿아 있다고 단정을 하기에 그 건 너무 선별적인 집단에게만 해당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실제 영어가 생존의 도구임을 인지하지만 그들의 일상과 영어는 분리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 영어를 강요하는 사회는 영어 실력을 숫자로 계량하여 판단할 수 있다는 수량화의 믿음과, 어떤 영어가 좋은 영어인지에 대한 판단 마저 모호함에 기초하여 우리에게 압박을 하고 있는거다. 명확하지 않은 구분에서 영어 자체의 필요성에 대한 담론조차도 실제로는 뚜렷한 근거보다는 '당위'적 명제로만 제기되기에 이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어의 '전사회적인' 현실적 필요성에 대한 논쟁이 언제 제대로 붙기나 했을까?

다른 한편으로 수용자의 측면에서 이러한 영어는 생존의 도구가 될 따름이며, 이는 영어의 습득이 유용했던 '문화자본'을 점유한 집단에게는 '기회'로 작용하고, 반대로 그것이 어려웠던 집단에게는 차별로 작용한다. 문제는 이 '문화자본'이라는 것이 경제적 구조와 맞물려있냐는 여부일 텐데, 나로서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영어 조기유학이라는 것의 비용을 생각해 본다면 충분히 일리가 있는 것 아닌가?

본토에서 몰입학습법에 의해서 원어민에게 영어를 배운이와(물론 말하기 듣기 뿐만이 아닌, 쓰기와 읽기가 포함된) 조악한 공교육 하에서의 영어학습자의 차이가 크다는 걸 우리는 이미 학원가의 열풍을 통해서 알 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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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문제는 커다란 틀을 다 봐야한다는 것으로 수렴된다.

하지만 실질적인 문제 하나하나에 대한 인식은 또한 구체적 대안을 위해서 필요할 수밖에 없고, 그러한 의미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의 끊을 놓는 순간, 이미 공상가가 되어버릴 거다...
 

영어 공화국 한국에 대한 책. 다시금 이 순간에 내 영어를 접하는 마음과 그것에 대한 내 '공명심'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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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꽃나무 우리시대의 논리 5
김진숙 지음 / 후마니타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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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1학년 때, 사회과학도랍시고, 길거리로 뛰어드는 사람들을 또한 함께 뛰어다니며 따라다니곤 했었고, 그들이 집어주는 책이라면, 무엇이든 다 읽어대곤 했었다.

누군가 당시 나에게 주던책은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이었다. 어떤 시골의 한 어린 아이(당시 내 기준으로도 전태일은 어렸다.)가 생존을 위해서 70년대 자본주의의 현장으로 뛰어나와 세상에 조응하지 않고 결국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밖에 없는 극한적인 상황에 부딪히는 것을 보면서 나는, 한편의 불편함과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었고, '평전'은 나의 정체성의 큰 부분을 한쪽 방향으로 틀어놓았다.

나이를 먹으면서 냉소적이 되어간다. 한편으로 세상에 대한 분노를 느끼면서 그 세상에 대한 반격을 언제나 생각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이 가능이나 하겠어?" 하는 비관적인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냉소로 풀기 시작한지도 이제 꽤 되어가는 것 같다.

김진숙의 "소금꽃나무"는 의지를 잃어가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그녀의 '그러지 말자'고 외치는 편지이다. 서문에서도 인정했듯이, 이 책에 나오는 말들은 종종 철자법도 심하게 어긋나고, 그냥 읽는 대로 말하는 데다 그것도 사투리를 그대로 옮겨 놓아 무슨 말인지 한참 생각해야 할 정도인 말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이 그녀와의 대화를 반드시 방해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왜 노동운동가가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1부와 마지막의 이야기(사실 붙여놓아도 무방하겠지만 읽다가 다시금 그녀의 진심을 확인할 수 있다는 데에서 나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한국 자본주의를 정치경제학적으로 이해하겠다는 학자연하는 이야기(어쩌면 좌파들의 굉장한 나르시즘)를 떠나 가슴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다시금 공감할 수 있다.

그리고 2부의 그녀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노동운동이 무너져가고 있는 이 시점 그들은 어떤 삶의 태도로 살아가고 있고, 그들의 삶의 결에서 나타나는 흠결들을 그녀 나름대로 비판하면서도 그것들에 대해서 어떠한 미움을 갖기 보다는 어쩌면 우리가 함께 넘어야 할 문제임을 넌지시 보여준다.

가장 한참동안이나 읽는 이를 괴롭히면서 읽게하는 부분은 3장, 4장, 5장의 이야기다. 김주익에게 보냈던 추모사나, 그녀의 가족사를 작금의 세태와 연관하여 읊어주는 그녀의 글들은 나를 마음 깊숙한 곳에서 불편하게 만들고 또 한편의 분노를 계속 품게끔 만들었다.
...
 

소금꽃나무는 작업장에서 잔업을 마치고 퇴근하려는 노동자들의 등짝에 새겨져 있는 소금덩어리의 이름이다. 뿌리도 없고 가지도 없이 꽃만 피어나 한 사람의 등에 있는 소금꽃나무는 그냥 그런 소금꽃나무지만, 노동자들이 모여서 보여주는 소금꽃나무들의 모습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동의 흔적이 아닐까?

노동의 기록은 지금까지 어쩌면 남성의 기록으로 주로 한국사회에서 쓰여있었는 지 모른다. 은연중에 우리는 노동의 역사를 투쟁의 역사로만, 피의 역사로만 기억했는 지 모른다. 물론 '소금꽃나무'의 역사가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그녀가 보여주는 글쓰기는 우리의 일상의 섬세함을 비추어 줄 수 있는 노동의 기록이다. 그리고 그녀는 반성이라 이야기했지만, 그건 세상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자의 반성이 되어야하고 또한 우리의 미래를 다시금 노동의 승리의 역사에서 바라보려는 '오래된 미래'를 그리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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빽판 키드의 추억
신현준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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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때 있었던 일의 한자락.

고1, 방송반에서 울려나오던 노래에 빠진 나머지 Announcer에 도전했다. 그 때 사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PD였으나, 괜한 주눅과 뭔가를 쓰고 방송을 만든 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감조차 없었던 나는, 일단 아나운서가 먹고들어간다는 사실에 곧바로 아나운서를 지웠했지만, 실제로 방송반 생활을 하면서 나를 잡아끈 건 1년 선배였던 박진호(형 보고 싶네요. 뭐하고 지나나요?!!)의 음악관이었다. 이승환의 목소리로 천일동안을 열창하면서도 Mr. Big이나 Rialto, Radiohead, Nirvana를 틀어주는 그가 존경스럽기 시작했고, 음악관에 혁명적 변화를 겪고야 말았다. FinKL(Fine Killing LIberty라는... 어이 없는)이나 R.ef, 서태지와 아이들을 마냥 좋아하던 나는 어느날 부터 Rock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얼치기 락음악 매니아가 되었다.

친구들과는 커트코베인과 히데가 죽었는 지 안 죽었는 지를 가지고 대판 논쟁을 벌였으며, TV에 나오던 한 때는 흠모했던 아이돌 스타들에게 저주를 의식적으로 퍼붓기 시작했다.

그런 의식은 실제로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그날 까지 나를 휘감기 시작했고, 덩달아 인물과 사상, 강준만, 진중권, 한겨레21로 이어지는 지식인 스타들과 그 세계를 접함에 따라, 변할 수 없는 Identity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지금에서야 이야기하지만, 그건 내 체험이나 내 계급성의 인지가 아닌 마냥 잘나보고 싶었던 치기어린 과시욕과 공명심의 상징이기도 했다. 김규항의 말처럼 "달콤쌉쌀한 초콜릿" 같은 게 아니었을까?

여튼 덕분에 나는 Queen을 듣기 시작하고 프레디 머큐리를 존경하기 시작했고, Paul Gilbert같은 기타리스트가 되고 싶었고, 패닉을 들으며 UFO의 가사를 한국 사회에 도입시켜보기도 했다.

신현준, 빽판 키드의 추억

어쩌면 신현준은 내가 공감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일 거다. 말장난 하자는 게 아니라, 양면적이라는 거다. 어렸을 적의 빽판키드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내가 공감할 수 있는 거고(나는 열심히 내 버전의 mp3 playlist를 만들고 있었으니깐), 다른 한편으로는 그 만큼 음악을 내가 잘 듣지 않을 뿐더러, 나는 요즘 힙합에 미쳐있기 때문에, alter문화의 중심에 Rock을 놓는 그와 차별적이고 그런 면을 공감할 수 없다는 거다. 사실은 '공감'이라는 말을 붙이기 보다는 '차이'라는 점이 더 적절할 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현재 문화평론가이자 진보적 음악운동을 전개하는 신현준의 일대기에 대한 이야기다. 언제나 자서전류의 책을 쓰는 이들은 과거의 관점과 현재의 관점이 섞이는 지점에서 묘하게 고민하게 되는데, 그건 바로 과거를 현재의 관점으로 바라보느냐, 혹은 그 때를 그 때의 기억으로만 순전하게 정리하느냐의 문제이다. 마치 이는 랑케의 '사실 그 자체의 역사'냐, 혹은 E.H. 카의 '역사가에 의해서 판단된 역사'냐의 문제만큼이나 빈번하게 부딪히는 문제라 할 수 있겠다.

신현준은 랑케식으로 이야기를 호도하려하지 않는다. 그 때의 기억을 지금의 관점에서 추억하면서도 나름의 판단을 가하고, 그 것을 통해서 자기의 지도를 발견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저술은 한편으로 모자이크 같이 흩어져 있으나 결과적으로 단단하게 엮이고 그의 관점을 설명하고 그가 갈 방향까지의 길을 잘 보여준다.

민중문화가 주는 역동성에 빠져서 노래패 활동을 하면서도, 죽어가는 그 바닥에 대해서 계속 고민해야했던 내 대학시절의 모습과도 자꾸만 결합되는 그의 과거는 내 고민들의 단상과 묘하게 결합되어 이 책을 놓지 못하게 만들고, 결국 잡은 즉시 다 읽게 만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대안담론을 만들고자하면서 밴드음악을 추구했던 것이 어떤 의미였을까를 노찾사나, 인디밴드들에 대한 그의 기록을 통해서 다시금 고민하게 했다. 또한 과거의 한국 대중음악(그는 실제로 한국 음악사의 고고학을 작성한 바있다.)의 공과에 대한 부분과 그 가능성에 대한 부분을 읽으면서, 나의 좁은 음악에 대한 이해를 탓하게 만들었다.

이쯤에서 끝났다면, 이건 대중음악평론가 중 '학자연'하면서 '먹물티' 팍팍내는 작자의 단상에서 멈췄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한 발 더 나아가서 대중과 어떻게 소통할 까의 문제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이는 내게도 같은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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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신현준을 기억했던 건 그가 서사연에서 이진경과 함께 저술했던 '철학의 탈주'가 가장 처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열어가고자 하는 평론가로서의 관점을 더 주목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처음에는 안타까워했지만, 문화와 정치를 바라보는 그의 관점을 확인하고 편견은 치워버리기로 했다.

간혹 이런 부분일 것이다.

... 대학생문화가 꼭 청년문화가 되어야 한다든가, 청년문화의 아이콘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나름대로 1980년대는 '혁명'의 시대였으니까. ... 보다 직접적으로 말한다면, 똑같은 시대에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는 대학생의 정치적 저항과 록 커뮤니티의 미학적 반란이 그럭저럭 잘 어울리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어쨌냐고? 20년이 지난 지금도 운동권 대학생들은 록 음악을 여전히 외래문화 정도로 생각하고, 록 음악의 마니아들은 정치라면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면서 캠퍼스 내에서 방황하고 있는 현상이 안타깝다는 이야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pp. 203-206)

.... 이럴 때마다 나는 한국에서는 문화적 세련됨과 정치적 올바름은 영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씁쓸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어쩌다가 문화적으로 세련된 취향을 가지고 있으면서 급진적 정치사상을 신봉하는 젊은 친구들을 만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럴 때도 '정치적 올바름을 문화적 세련됨의 하나의 장식품 정도로 취급한다'는 의심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다. 사회주의든, 무정부주의든 다른 무엇이든 급진적 사상을 실천하는 삶이 문화적 욕구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었다면, 지금 그걸 기꺼이 수용할 사람이 젊은 세대 중에 얼마나 있을까는 회의적이다. 그래서 가끔은 '펑크 밴드에게 열광하는 것과 <엽기적인 그녀>에게 열광하는 것이 과연 뭐가 다를까'라는 우문을 던지게 된다. 현답은 그들 스스로 내려줄 것이라고 믿는다.... (pp. 273-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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