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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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스토리를 요약하자면...

어떤 한 남자.. 부모한테 버림 받고.. 마누라도 도망가고.. 그래서 자그마한 벌집 같은데에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청빈하게 사는 한 남자.. 그의 집에.. 어느날 아침.. 비둘기 한마리가 날아서 현관 앞에 앉게 된다...

조나단(주인공 名)은.. 비둘기로 인해 생활의 모든 패턴이 깨진다.. 정신을 못차리고 밖으로 나가지도 못해서 용변도 방에서 세면대에 하고.. 직장에 가서도.. 생활의 평안을 느끼지 못하고.. 정신을 못차린다.. 거지를 보면서.. 그 보다 못한 자신의 삶을 생각해본다.. 여유롭지 못한.. 자신의 삶...

호텔방에 도망가서.. 머물기도 하다가.. 아침에 일어나.. 마치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충동마저도 느끼는... 외롭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끼는(사실 그는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침에 일어나.. 왠지 모를 새힘(?)을 느끼는 그는.. 비속을 천진난만하게 뛰어다니다가.. 집에 들어오고.. 새로운 활기를 느끼는... 집에 왔더니.. 비둘기는 이미 치워졌더라.. 하는...

그런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에 대해서 냉소를 보낸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내 생각에... 쥐스킨트는... 까뮈에게 이런말을 하고 싶었을 것 같다..

"후까지 잡지마... 느끼해 x신아..!!"

쥐스킨트의 정신세계라면 충분히 그랬을 것 같은....

실존에 대한 고민... 거기서 후까시 잡고.. "태양빛이 너무나 뜨거웠오.. 그래서 총질했지.."이러면서 각잡는 까뮈류의 소설 패턴에서 비껴서서.. 쉽게 그런 인간을 속물로 치환시켜 버리는... 까뮈의 소설에서는 훌륭한 실존을 고민하는 인간형이었는데 말이지...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결국 쥐스킨트의 소설 조차.. 인간을 지나치게 도식화 시켰다는 데에서 혐의를 벗기는 어렵다...

"여유있고.. 천진난만한.. 배짱이 같은 인간"에 대한 예찬을 은연중 담고 있는 거다... 그러면서 동시에 "쪼잔하고 쫀쫀하고 궁색하게 사는 인간"에 대한 냉소를 담고 있는... 현대 프랑스 인들의 정서를 담고 싶었는 지는 몰라도..(근데 생각해 보니 쥐스킨트는 독일인이군. -_-) 이 도식은 이분법 적이고.. 자신이 강조하는 삶에 대해서 ... 강요하는 기제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가능성이 크지.. 꼭 그런건 사실 아니겠지만..)

나도 디오니소스의 축제만을 즐기고 싶지만.. 사실 그건 강요로 될 일도 아니고.. 그게 더 좋아보여야 그럴 따름인 것을...

소설이 도구화 되면 그것도 사실은 하나의 권력이 될 수 있는 법이다...

그래도 나는 까뮈의 소설 보다.. 쥐스킨트의 가볍고.. 생활에서 찾는 인간에 대한 '생활적' 애착이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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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보일드 하드 럭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요시토모 나라 그림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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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편의 이야기.. '하드보일드'와 '하드럭'(아닌가? 벌써 가물가물)로 구성이 되어있었다...

자신을 사랑하는 여인을 보낸 주인공(女)가.. 여행을 하다가.. 돌멩이를 발견하고.. 시골 한 허름한 모텔에서 묵다가.. 얼마나 그녀를 사랑했었는지.. 그 기억들을 떠올리는.. 하드보일드...

언니가 과로로 쓰러져서 뇌사상태에 이르르고.. 그 언니의 약혼남의 멀어짐.. 그리고 언니의 약혼자의 형을 좋아하게 된 주인공.. 이래 저래 많이 부딪히다가.. 그녀에 대한 단상들을 떠올리는 하드럭...

결국에 매개체를 통한 회상.. 그런 걸 말하고 싶었나보다.. 작가는... 주위에 있는 것들을 살펴보다가.. 일상에서 발견하는 회상... 그리고 꿈을 매개로 한 회상... 그리고 추억에 대한 '더듬기'...

인간적인 냄새가 많이 났었다... 나약할 수 밖에 없는 인간.. 결국에 의지하게 되는 것은.. 사람.. 그리고 그 사이에서의 사랑.... 감성이 메말라서.. 느끼는 건 그런것 뿐이었나 보다... 그때랑 지금이랑 느낌이 다를 지도.... 만약 지금느낌대로 판단한다면 내 존재는.. i think therefore i am일테고.. 예전의 내 상태라면.. 라깡식의 i am where i think not 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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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트라베이스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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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일관 주인공은 떠들어 댄다... 오케스트라는 콘트라 베이스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지휘자는 무용지물이라고... 콘트라 베이스만 있으면서도 공연을 할 수 있다고.... 그러다가,, 갑자기 맥주한모금을 들이키면서.. 혼자 누군가 있는 듯이 느끼면서 독백...

소시민의 외로움... 불안감... 그러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뭔가 있는 듯이 하면서도 아무 것도 없는... 결국에는.. 그냥 그러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서도 말조차 건네지 못하는.............

"으 멍청해.....!! 작업의 기본은 그게 아냐" 라고 말하고 싶으나... 뭐 책속의 화자인걸... 나 역시 답답한 사람중의 하나일 줄도 모르는 걸....

갖혀 있기.. 묶어 두기.. 혼자놀기... 뭐 그런말들이 생각나는 소설이었더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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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훈 2007-11-22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3년 쯤 읽었겠지??
 
향수 (반양장)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Mr. Know 세계문학 20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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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는 프랑스 사회 그리고 근대가 들어서기 시작하는 시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요..

세상의 모든 냄새를 맡을 수 있으면서, 정작 자신은 어떠한 냄새도 갖지 않은 주인공 그르누이.. 영아 살해범 엄마 밑에서 태어나서,, 자신의 엄마를 죽이고... 처절한 생존 본능으로... 끝까지 살아남는... 그가 거쳐간 곳에서는 항상 죽음이 불러다닙니다.. '영웅'과 '악마성'은 항상 존재하는 것인지... 신부 -> 무두장이 -> 조향업자 밑에서 살다가.. 파리에서 한명의 '훌륭한' 향기 ; 한 소녀의 냄새에 취한 나머지 그녀의 냄새를 기억하려고 살해하고... 향수 업자 밑에서 그의 향기에 대한 재능으로 인정을 받고... 숱한 향수를 만들어 내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모두 같잖은 것이었다.. 유랑을 하다가... 자신의 냄새를 맡을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7년간의 유랑을 마치고.. 향수의 도시에 도착하여서... 향수 조향사 밑에 있으면서 여러가지 기술을 익히면서... '사람의 냄새' 그리고 모두를 매혹할 수 있는 향수를 만들겠노라며... 25명의 여성을 죽이다.. 결국 발각이 난다... 하지만.. 그가 만들어 놓은 향에 단두대 앞에 모여있던 이들은 '욕정'을 느끼며 성교를 행하고.. 그에게 사랑을 느끼며... 자신이 죽인 자의 아버지는 그를 양자로 만든다.. 결국 그런 후에 사람들에게 '식인욕'을 느끼는 향수를 만들고 사람들에게 뜯겨서 죽는 그루노이...

스토리는 그랬다...

인간은 고유의 냄새를 가지고 있다... DNA 코드처럼 자신만의 향취... 가장 매력적인 냄새는 어쩌면 인간의 냄새라는 것... 그리고 그걸 만들고 싶었던 그르누이.. 향수를 읽고나서는... 바깥의 모든 냄새들이 범상치 않다.. 나도 사람의 '냄새'를 간직하고 싶은 것인지... 비정상적이지만,, 열정적인 한 악마적인 인간의 삶...

쉽게 읽히고... 추리소설처럼 스피디 하게 읽을 수 있는 책... 그리고 향수 만드는 법들이 잘 나와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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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노동의 유토피아 - 산업주의에 굴복한 20세기 사회주의, 비판총서 4
차문석 지음 / 박종철출판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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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현실사회주의는 무엇을 위해 싸웠는가? 인간의 해방인가? 아니면 맑스의 '고타 강령'에 나오는 이행의 법칙을 지키기 위한 교조적 해석이었는가?

아니 차라리 이러한 물음들은 오히려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들의 순수성을 의심하는 데에서 오는 편향(서구의 우파 지식인들의 '전체주의 국가' 규정), 혹은 스탈린 주의가 다 망쳐 놓았다는 뜨로츠끼주의자들의 '국가자본주의' 규정등은 현실사회주의 국가를 이해하게 하는 데 전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하자, 현실사회주의가 인간해방의 이상을 포기했다면, 그것은 어떤 연유인가?

차문석의 박사학위 논문을 책으로 펴낸 '반노동의 유토피아'는 그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한 시도 중 하나이다.

기존의 연구가 현실사회주의국가 들에 대한 대외관계 혹은 정치체제에 고착된 연구들이었다면, 차문석의 논의는 오히려 맑스의 그것 처럼, '노동' 그리고 '생산체제'에 집중한다.

"산업주의에 굴복한 20세기 사회주의"라는 부제에서 잘 보여지듯이, 그는 '생산관계'의 모순과 그것을 규정하는 '생산체제'(상부구조)의 양상을 통해서 현실사회주의를 파고 들어간다.

이진경의 <맑스주의와 근대성>의 논의가 현실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주체생산양식'에 주안점을 두고 '근대인' 양산의 '사회학적 분석'을 했다면, 차문석의 논의는 차분하게 '자본'에 나왔던 맑스의 담담하고 뚝심있는 분석을 다시 보여준다.

20세기 볼셰비키 혁명으로 국가를 장악한 소련, 그리고 중국, 북한

서로 다른 경로를 통해서 '사회주의'체제를 확립하지만 결국에는 몇가지의 차이를 빼고 서로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은 서구 자본주의 팽창 단계에 1차 상품 수출국, 농업국, 식량과 원료의 공급지, 산업화의 이니셔티브를 부르주아 계급이 아닌 국가/외국자본의 후원 하에 수행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혁명 후 '맑스의 꿈' (자유로운 인간들의 발전이 사회 발전의 토대가 되는...)을 이루려 할 때의 난제에 부딪히게 되었으며, 이들은 맑스의 '고타강령'의 고답적인 논의를 따라 생산수준을 창출하려 했다.

하지만 명제의 모순은 있다. PT독재가 사회주의 '국가'의 독재는 아니며, 생산의 사회화가 생산의 국유화는 아닌 것이다. 이들에게 사회주의 국가는 이미 '도덕적 우월감'을 제공하였고, 그들에게 자본주의를 따라잡겠다는 근대적인 신념이 작용하였을 때, '사회주의 산업화'는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회주의 산업화를 위하여 사회주의 노동의 '신화'(J. Calvin 류의 금욕적이고 노동숭배론적인)는 도입될 수밖에 없고,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닌 '노동자국가'를 위한 '노동'이 다시 강요되었다.

그리고 노동자 국가에서 "레닌과 뜨로츠끼 등 볼셰비끼들이 추진한 산업주의 국가화에 대대적으로 저항했던 세력은 노동자들이었다."(p.43) 즉, 노동자 국가에서 그 국가에 칼을 꽂은 것은 노동자 국가였던 것이다.

이는 생산성의 마수가 사회주의를 삼켰을 때, 사회주의의 이상을 전유하려 계급(노동자 계급)에게 다시 억압기제로 작용하였다는 것을 볼 때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생산력주의, 산업주의가 '사회주의'를 삼켰을 때, 그것들은 과연 성공적으로 '사회주의 강성대국'으로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인간해방, 노동해방을 이룰 수 있었을 까?

모두다 알고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사회주의 국가들은 노동자 통제 => 기술자 => 당으로 전이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노동체제를 구축하고 생산성을 높이려 했지만, 실제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의 통제는 불가능했다.

노동자들의 유동은 극심하였고, 노동 규율은 작동하지 않았다. 매년 초과 달성을 위해서 낮은 목표를 할당받으려 애쓰는 공장장들, 그들과 흥정하는 간부들, 자재를 확보하기 위해서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브로커들.....

또한 노동자들은 억압적으로 다가오는 국가의 원자화 전략에 의해서 조직되지 못했지만(노동조합의 국가화의 영향), 개개인의 태만 등을 통해서 '디오니소스적 노동'을 하게 된다. 사회주의 국가가 원했던 것은 '프로메테우스 적'인 강고한 의지(스따하노프 운동이 보여주듯)를 가진 생산력 향상의 전사들이 었지만, 실제로 그렇게 된적은 거의 없고, 늘쌍 '형식주의 비판이 '형식주의'' 식의 만성적인 타성에 찌들었고, 이는 결국 그들 체제의 한계와,, 다시 자본으로의 투항을 선언하게 만들었다.

현실사회주의의 노동에 대해서 우리가 갖고 있던 '시베리아 탄광의 강제 노동'이라는 환상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는 '태만'이 넘치고 있었던 것이다. 자유롭지도 않고, 결의 없이 무기력한 모습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 까? 계획이 문제였을까?

차문석은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혁명적 열정, '사회주의적 인간'-적어도 연대성에 적합한 심성들을 표출시킬 수 있는-을 형성시키기 위한 계몽주의적 과제, 미래 사회를 열 수 있는 개방적 제도들 등 모든 가능태들은 생산성 중심주의의 깃발을 든 산업주의의 파시즘적 운동 에너지 속에서 사라졌다. 이 사회들의 해방적인 근대성은 모두 생산성에 종속되어 설명되었다"고 본다.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한 편견을 깨고, 오히려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결계를 다시 '현실사회주의'를 통해 느끼게 해주는 책이었다... 또한 이 책은 국가를 통해서가 아니라 '대중의 능동적인 자발성'을 다시한번 역설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인상깊은구절]
거칠게 말하자면 우리의 삶과 노동을 일치시키는 것, 더 이상 죽은 노동이 산 노동을 지배하지 않는 사회를 상상하는 것이 20세기 사회주의에 대한 검토로부터 나온 선물이다.
물론 이러한 선물은 기존의 노동 신화를 찢어버리고 그것의 해방의 메시지 속에서 재구성할 수 있을 때야만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나아가 인간이 가진 다양한 속성들 중 긍정적인 부분들-시장과 경쟁이 아니라 연대와 공존-을 가장 잘 표출할 수 있게 하는 제도적 차원의 고민도 병행되어야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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