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쓰는 일기
허은실 지음 / 미디어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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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은 바람을 타고 올 것이다. 제주의 4.3. 세월의 4월.

제주 4.3. 평화공원 내에 있는 평화기념관에 갔을 때

나무 관처럼 누운 4.3. 백비(신원이 확인되지 못한 사람들의 혼을 모심)와

출구에 다다를 무렵 지나게 되는 양쪽 벽과 천장에 벽지처럼 붙여진

희생자들의 사진들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특히 어린아이와 부녀자들이 많았다.

4.3. 이후 71년, 세월 이후 5년.

어제 쓴 유언이 내일 쓰는 일기와 만나는 허은실의 제주 일 년 살이에 관한 책이다.

제주 이주를 결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우며 계획하고 다짐했을까.


누구든 여행과 이주와 이민을 고민하고, 그것은 곧 장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어디로 떠나고 싶고 숨고 싶은 인간의 내밀한 감정과

그래도 지금 여기에 사는 사람들과 생활과 일이 있으므로 되돌아올 수 밖에 없는

좌절, 어쩌면 숙명의 가면을 쓰고 있는

나는 희망을 보았다. 글자와 글자의 좁은 틈으로 비치는 햇살 속에서

아주 잠깐이지만 언듯언듯 비치는 희망을.



- 4월의 이름

한 사람의 이름을 가슴에 지니는 일. 아무 연고 없는 이의 이름을 죽을 때까지 생각하기로 하는 일. 그것이 제겐 망각에 저항하는 방법입니다. 52쪽

- 포란

품는다는 것. 둥글어지는 것. 둥그런 것을 지키기 위해 둥근 자리를 만들고 자신도 둥글어지는 일. 직선의 팔을 구부려 둥글게 만들고, 나뭇가지들을 모아 둥그런 둥지를 짓는 일. 70쪽


- 제 상처를 만지작거리는 일

글쓰기란 무엇보다 제 상처를 만지작거리는 일. 아물지 않은 딱지를 떼어 또다시 피를 보고 새로 피딱지가 앉으면 그 도톰하고 딱딱한 것을 만져보다 기어이 또 뜯고, 마침내 얇고 하얀 껍질까지 떼어내 다 아문 뒤에는 맨질해진 상처 자리를 제 손으로 만져 그 감촉을 즐기는 일.

제 상처에 대한 변태적 애호. 글쓰기는 사실 그런 변태적인 행위이다. 그런데 제 상처를 가지고 노는 일, 상처를 어루만지는 행위가 결국엔 타인의 상처까지도 어루만지게 된다는 건, 생각해보면 얼마나 신비로운 일인지. 224-2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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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하다
조승연 지음 / 와이즈베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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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행기를 타지 않고 뉴욕에 가다'(조승연, 리얼:하다, 와이즈베리, 2019)


조승연 작가가 진행하는 방송 '굿모닝팝스'를 팟캐스트로 즐겨 듣는다. 이전 진행자들이 영어관련 학과를 전공한 영어교육전문가들이었는데, 조승연 작가가 진행하는 방송은 영어에 관한 지식 뿐 아니라 단어나 표현이 나오게 된 문화적, 역사적 배경과 어원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프로그램이라 색다르다. 아마도 그가 뉴욕에서 경영학을 전공했고, 프랑스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고, 언어와 음악 등 다방면에 관심을 가진 방송인 겸 강연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중고등학교를 미국 중서부의 미시간에서, 대학을 뉴욕에서 나왔다. 뉴욕을 경험했고, 뉴욕을 지금도 방문하는 여행객이므로 내재적이고 외부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줄 아는 눈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특별하다. 인터넷이나 책에서 검색할 수 있는 객관적인 지식 자체가 내가 겪지 못한 부분에서는 새로웠지만, 내 눈길을 더 끌고 붙잡았던 것은

그의 뉴욕생활의 경험이 묻어난 글이었다. 뉴욕에 가지 않고도 뉴욕을 충분히 맛볼 수 있다. 수많은 작가들이 그곳에 가지 않고도 그곳에 관한 책을 썼듯 우리는 그곳에 가지 않고 그곳을 방문할 수 있다.









- 뉴요커는 이민 이후의 생존 경험을 통해, 주변 사람의 부러운 시선이나 허울 좋은 체면치레 같은 것은 생존에 도움이 전혀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진정한 자유와 존재감은 경제적 자립에사만 온다. 이것이 뉴요커의 행복 공식이다. 21쪽


- 일단 뉴욕에서 공공 시설물 이름으로 기리는 사람의 특징은, 첫째, 주로 이민자 출신 즉 원래 아웃사이더였던 사람들이다. 이에 비해 한국에서 기리는 위인은 전통적인 엘리트 집단인 양반 계급의 일원이다.

두 번째, 뉴욕에서 기리는 위인은 대부분 도덕적 오점이 많은 거부들이다. 록펠러나 프릭처럼 오늘날까지 어느 한편의 엄청나게 지탄을 받는 인물의 이름이 주요 문화시설에 붙어 있다는 것은 한국인의 상식이나 보편적인 정서로는 이해하기 힘들 수 있다. 43-44쪽


- ‘공부를 시킨다’가 아니라 ‘알아서 공부할 줄 알고 험한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는 영리한 아이를 만든다’를 목표로 영유아기에 집중적인 교육 투자를 하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시장 규모가 엄청나게 크다. 미국인이 ‘discipline'이라고 부르는 자기 통제력은 다른 문화에 대한 존중과 더불어 뉴요커 교육 철학의 두 번째 축이다. 128쪽


- 뉴요커가 가르쳐주는 외롭지 않게 사는 법


하나는 취미 집단을 유사 가족으로 만들되, 서로의 사회 계급이나 경제력 등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중략) 두 번째는 모르는 사람에 대해 거리낌 없이 밍글링을 하거나, 인터넷으로 집세 협의만 되면 누구하고든 한집에 살며 유사 가족이 되고, 우정의 순간은 즐기지만 헤어질 때는 인간관계가 영원할 수 없다는 점을 쿨하게 받아들이는 자세다. 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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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봄 2019 소설 보다
김수온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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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온의 '한폭의 빛'은 공간에 관한 감각이 돋보인다.

분명하게 잡히지는 않지만 창가에 놓인 소파와 몽환적인 숲과 호수

딸과 엄마와 비존재로서 방 안에 존재하는 갓난아기까지

소설 속에 설치된 세트를 넘나들면서 공간의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작가가 집중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백수린의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를 읽으면서 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이 떠올랐다. 두 어린 아이를 기르는 여자 엄마

주인공이 언젠가 살고 싶다는 붉은 지붕의 집이 무너져가는 장면에서

마주친 젊은 중국인 인부의 탄탄한 몸을 보며 순간적인 욕망을 느낀다.

또 지인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서 마주친 젊은 남자 무용수에게 호감을

느끼는 장면은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타치오를 바라보는 늙은 작가

구스타프 아센바흐가 추구한 아름다움에의 욕망과 겹쳐졌다.


- 주인공이 나이도 더 많고 외국인 인부에 비해 경제적, 사회적 위치 역시

우위에 있도록 설정했는데도 불구하고, 시선의 주체가 된 여성과 객체가 된 남성이

폐허가 된 집에서 마주 볼 때 어떤 공포나 서스펜스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서 소설을 쓰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87쪽, 작가와의 인터뷰)


장희원의 '우리의 환대'는 요즘 주목받는 퀴어 코드에 관한 소설인데, 특이점은

동성애자인 아들이 가진 부모, 특히 아버지의 입장에 독자가 몰입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또한 묘사가 세밀하지는 않지만 언급할 것은 언급하고 넘어가는

군더더기 없는 문체라는 생각이 들었고 영리하게 독자를 주제의식으로 이끌 줄

아는 작가라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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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누스 푸디카 창비시선 410
박연준 지음 / 창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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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를 젓는다. 시간의 강물 위를, 젓다가 잔잔한 물결에 몸을 맡기고
뗏목 위에 누워 눈부시게 빛나는 하늘을 들여다본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몸이 뗏목이고 강물이다
몸 속에서도 출렁이는 것들이 있다.


"정숙한 자세". '정숙' (靜肅)


조용하고 엄숙함이라는 뜻의 저 낱말에는 어쩐지 누군가가
단상에서 굳게 입술을 다무는 자세가 서려 있다.


단상 아래에서 그 입술을 쳐다보았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흐른다. 생각이 흐르는데 시간은 정지된다. 시간은 어디론가 앞질러 가는데 생각은 역류한다. 그래서 물결이 인다. 정숙한 반항의 흰 포말이 일어난다.



"Venus Pudica. 비너스상이 취하고 있는 정숙한 자세를 뜻하는 미술용어. 한 손으로는 가슴을, 다른 손으로는 음부를 가리는 자세를 뜻함." 12쪽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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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푸가 - 철학자 김진영의 이별 일기
김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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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와 프루스트, 바르트와 벤야민과 아도르노.

단상의 지휘자는 각 파트의 연주자들을 밀고 당기고 달래고 소리치며

베토벤의 대푸가를 연주해 나간다.



가사가 없는 노래, 침묵의 멜로디, 부재의 앙상블



당신이 앉았던 빈 조주석을 들여다보며 "추방하는 건 내가 아니다. 그건 옆 자석이다. 그 빈자리는 나의 마음을 알고 있다." 23쪽



후회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 다른 하나는 " 헤어진 뒤의 후회다."고 말한다.



헤어진 뒤의 후회라. 헤어지기 전에는 헤어진 후회를 겪을 수 없다. 헤어진 다음에라야

'헤어진 일은 정말 잘한 일일까. 그때 붙잡아야 했나. 헤어지고 나만 아픈가. 다시 연락을 하지 않으면 또 후회할까.' 같은 과거에 대한 후회와는 또다른 감각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것이다.



이런 튼튼하지만 넘나들 수 있는 울타리를 접었다 펼치며 나는 행복한 이별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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