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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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으로 알려진 재북 시인 백기행의 1957년부터 1963년까지의 일곱 해를 다루는 소설이다. 

서정시를 쓰던 시인이 공산주의에 기반한 1인 수령체제로 전환기에 있는 북한에서 

사상검증을 받고, 변방인 삼수군의 관평협동조합으로 유배에 가까운 파견을 가서 생활하는 장면까지 세밀하게 다루는데 그 사이에 1930년대의 평양과 함흥 시절이 회상으로 끼어든다.


당대에 기행과 친분이 있었던 인연들을 만날 수 있는데 특히 상허 이태준에 대한 분량이 꽤 많다.

또한 '현'으로 지칭된 실존인물인 신현중이 백석이 흠모했던 통영 '천희'(처녀) 박경련과 결혼한 에피소드처럼 역사적 사실을 어느 정도 숙지하고 이 소설을 읽는다면 더 재미가 배가 될 것이다.

(시인 안도현의 "백석 평전"을 같이 읽는 것도 좋겠다)


소설적으로 삽입된 허구는 러시아 시인 '벨라'와의 인연, 모스크바 유학파 옥심, 삼수에서 알게된 여교사 '서희' 정도인데, 첫 장면부터 등장한 '벨라'와의 관계는 기행이 삼수로 가는 원인을 제공할 뿐 기행이 함흥에서 '벨라'의 통역을 한 것과 서신을 주고 받은 설정 외에 그 관계가 더 나아가지 못한 것이 좀 아쉽다. 그랬다면 꽤 분량이 늘어났을 테지만. 


언뜻 보면 꽤 심심한 소설이지만 작가가 고증과 상상력을 통해 형상화 해낸 기행의 7년의 삶은 한겨울에 '푹푹 나리는' 눈처럼 순하고 고요하다. 특히 삼수 협동조합 시절 양을 살뜰히 돌보면서 마주하는 양의 눈빛을 바라보는 장면은 이 소설의 감동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다. 


"백석평전"외에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국가에 의해 핍박받는 과정과 예술가의 내면을 절절히 그린 줄리언 반스의 "시대의 소음"도 같이 읽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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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영혼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9
정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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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 소설집, 완전한 영혼, 문학과지성사, 2018(재판)(초판은 1992)

 

소품, 단편 그리고 중편을 묶은 정찬의 소설집이다. 중심은 맨 마지막에 실린 ‘얼음의 집’이다. 시기적으로도(일제강점기), 분량 및 무게감으로도 이 작품을 먼저 읽어야 한다. 권력과 인간, 권력과 종교, 권력과 사랑, 권력과 역사, 권력과 정치 (···) 권력의 문패를 단 대문을 열고 방을 천천히 둘러본다. 이 방들은 신기하게도 벽에 의해 구획되어있지 않고 마치 빈 소금 창고에 들어간 것 같은 공간감을 느끼게 한다. 독립적이면서도 거대한 끈으로 묶인 듯한 막막함.

 

이 소설집을 읽다보면 어쩔 수 없이 일제강점기, 해방전후, 6.25. 4.3. 유신, 80년 5월 광주의 액자들을 보게 된다. 어떤 그림 앞에서는 오래 머물렀고, 뚫어지게 그 속의 집과 길과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게 한다.

 

 

* 얼음의 집

 

- 천황의 죽음

 

1922년 12월, 내 나이 열세 살에 삼촌이 있는 일본으로 건너감.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 대역사건

 

내 나이 17세였던 1926년 9월, 나는 무정부주의자들의 그룹에 들어갔고, 거기서 정준영과 운명적인 해후를 했다. 145쪽

 

 

정준영은 후미코의 뼈를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지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인 동시에 가장 가벼운 것이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뼈를 입으로 가져갔다. 혀가 뼈에 닿았다. 그는 뼈를 핥기 시작했다. 천천히 정성스럽게 핥았다. 이 뼈는 그녀의 영혼이며, 이제 그녀의 영혼은 머나먼 여행을 할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의 기억과 완전히 끊어진 곳으로의 유영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물질, 이 세상의 냄새, 이 세상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지금 나는 혀로 뼈를 씻고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완전히 지움으로써 후미코의 영혼이 평화로운 유영을 할 수 있도록. 157쪽

 

- 황금 사다리

 

 

“권력자이면서도 권력의 운명에서 벗어난 이가 천황이네. 하야시는 자신의 내면을 천황의 내면과 일치시키려 했네. 내면의 일치란 존재의 일치네. 이 일치를 통해 천황이 되고자 한 것이네. 그의 한 걸음 한 걸음은 천황을 향한 걸음이었네. 이것이 바로 그가 만든 사다리의 모습이었네. (···)” 220쪽

 

“하야시의 사상은 이러한 일본의 권력자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자 부정이며, 냉소며 초월이네. 하야시는 박해받은 자의 고통과 비명은, 그 살과 뼈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했네. 하야시는 사상으로써 일본의 권력을 냉소했고, 실천으로써 천황을 향해 다가갔네. 인간에게는 종족 보존의 본능이 있듯이 사상을 보존하려는 본능도 있네. 그 사상의 혈맥을 하야시는 자네에게 잇고자 한 게 아닐까.” 225쪽

 

- 얼음의 집

 

내 삶의 공간이 어떤 곳이지 너는 알 것이다. 얼음의 공간이었다. 얼음은 따뜻함이 조금만 스며들어도 자신을 지탱하지 못한다. 사랑이 스며들 수 없는 곳이야말로 내가 구축한 얼음의 집이었다. 그런데 그 속으로 작은 새 한 마리가 들어왔다. 종이비행기처럼 작은 새였다. 그 새를 바깥으로 쫓아냈어야 했다. 생각을 해보라. 새를 내버려두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새는 차가움에 체온을 빼앗길 것이며, 마침내 얼어 죽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얼음의 집은? 새의 따뜻함이 얼음 속으로 파고 들어 결국 집을 허물어뜨릴 것이다. 새는 죽고 얼음의 집은 파괴된다. 234쪽

 

아들은 쓰라린 상처 속에서 자라고 있는 증오의 씨앗이 칼이 되어 내 가슴에 잫기 전에 떠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아들이 살아 있는 한 상처는 결코 아물지 않으며, 증오의 씨앗은 칼이 되어 내 가슴을 찌를 때까지 성장을 결코 멈추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날 (237쪽) 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내 살을 향해 달려왔던 칼은 바로 아들의 칼이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언젠가 나를 찾아오리라는 것을.

 

나는 아연했다. 10년 동안 아들의 칼을 기다리고 있었던 스승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238쪽

 

 

운명은 나를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갔다. 아들이 열여섯 살 되던 해 여름, 어처구니없는 교통사고로 죽은 것이다. 병원에 달려갔을 때 몸은 싸늘히 식어 있었다. 슬프지 않았다. 조금도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안도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아내의 비통 앞에서 나는 안도하고 있었다. 등을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없어진 것처럼. 나의 감정이 온당한 것인지 회의하기도 했지만 온당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권력의 법칙 앞에 인간의 감정이란 참으로 하잘것없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떠한 이성도, 도덕도, 정서도 권력이란 공간 속으로 들어가면 허공에 떠도는 티끌이 되어버리니까. 나는 운명에 순응했다. 철저히. 스승은 운명을 거스르다가 추락했지만 나는 냉혹히 운명을 실천했다. 243쪽

 

* 완전한 영혼


 

* 패랭이꽃


 

* 신성한 집


 

* 길 속의 길


 

* 영산홍 추억


 

- 아버지가 나에게 했던 마지막 말, 어둠 속에서 홀로 앙상한 뼈처럼 서 있는 말이었다.

 

“그동안 나는 역사라는 말을 수없이 해왔고, 또 들어왔지만, 그토록 무게가 실린 말은 처음이었다. 이데올로기는 관념이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인간의 운동에 의해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힘, 즉 권력으로 전화된다. 그러므로 역사란 이데올로기를 권력화하려는 인간의 끊임없는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역사가 살아 있는 생명체의 모습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권력화로의 운동 때문이다. 역사가 수레라면 권력은 바퀴이며, 인간은 이 바퀴를 굴린다. 역사에 철저히 복무한다는 것은 이데올로기를 권력화하는 운동에 철저히 복무함을 뜻한다. 철저한 역사의식은 철저한 권력화 의지를 뜻한다. (···)”1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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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애인의 선물 바자회
김미월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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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월 소설집, 옛 애인의 선물 바자회, 문학동네, 2019




​소설의 대세는 계속해서 젠더이슈에 관한 작품들이다. 여성 작가들의 페미니즘, 남성 작가들의 퀴어. 성별이나 성 정체성에 관한 차별이 사라질 떄까지 소설가의 말과 작품은 끊어져서는 안 된다.
한편, 김미월의 소설은 첫 작품집부터 최근까지도 여전히 세대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는 것 같다.
20대의 여성으로서 작가가 20대의 주제인 젊음과 사랑, 취업, 결혼으로 이어지는 세계 이전 작품들에서 그려냈다면 이번 작품집은 30대의 독신 여성으로서의 삶의 채취가 짙다. 물론 그 속에는 여성으로서 한국사회에서 느끼는 감정이 담겨 있는, 페미니즘적 시각이 담긴 작품도 있다('선생님, 저예요' '연말특집')



20대인 작가는 30대가 되었으므로 자연히 30대의 삶에 대해 생각하면서 작가 자신과 소설 속 화자 간의 거리가 너무 멀지 않은 세계를 그려낸다. 30대의 삶은 10대나 20대의 삶과 섬처럼 분리된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다리로 연결된 연속적 세계이므로 끊임없이 과거와 미래를 되돌아보고 내다볼 수 밖에 없는 시기다. 작가나 소설 속 인물만이 아닌 그 시기를 거쳤거나 헤쳐나갈 사람들의 기억과 예상의 감각을 자극하면서 이 소설들은 묘한 쾌감을 준다.



사랑과 죄책감, 자존감에 대한 성찰을 원한다면 당장 이 책을 펼쳐야 한다. '아무도 펼쳐 보지 않는 책'이라면 당신이 최초로 열어보아야 할 때다.





* 가장 아름다운 마을까지 세 시간


- 이튿날이 귀국일이었다. 그녀는 공항으로 가는 길 지하철역에서 즉석사진 부스를 보았다. 새해를 맞아 서른아홉 살이 된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다. 평소 피사체의 진짜 모습에 가장 가깝다고 믿어온 전형적인 지하철역표 증명사진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 있는데 새삼 자신이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곁을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인파 속에 그녀가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다시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앞으로도 이렇게 살겠지. 계속 혼자겠지. 혼자 아무도 모르게 늙어가겠지. 27쪽


- 양희는 아까보다 더 빨리 대답했다. 사진이야 지금 이 자리에서 휴대폰으로 찍어도 될 텐데 노인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시 이어진 침묵 속에서 나는 양희희 가방에 있는 사진을 떠올렸다. 양희가 그것을 노인에게 준다면 어떨까. 두 사람은 어떤 대화를 나눌까.

이게 저예요./ 그래./ 이 사진을 찍고 나서 문득 깨달았어요, 제가 혼자라는 것을요./ 그랬구나./ 앞으로도 혼자일 거라는 생각을 하니 막막했어요./ 그래./ 내일이 시험이고 공부는 하나도 안했는데 벌써 밤이 된 것처럼 말이에요./ 그랬구나./ 그래서 이렇게 온 거예요. 아버지도 저처럼 혼자인지 알고 싶어서요./ ······ 33쪽


*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 그러니까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내일 죽는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죽기 전까지 매 순간 모든 생각 모든 행동이 부질없어진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직 살아 있는데도 세상에 의미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 그게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이었다. 55쪽


* 옛 애인의 선물 바자회


- 어쨌거나 담임선생의 중재로, 만약 그런 것도 중재라고 할 수 있다면, 친구는 상장을 가졌고 남자는 크레파스를 가졌다.

그리고 그들은 얼마 안 있어 중학교에 입학했고 다시 얼마 안 있어 친구는 죽었다.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물론 남자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서랍 속의 크레파스를 볼 때마다 죄책감을 느꼈다. 그는 그것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쓰레기통에 버리지도 않았다. 어린 마음에도 스스로 그것을 보면서 매번 죄책감을 느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90쪽


-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얘졌다가 새카매졌다가 알 수 없는 색으로 덧칠되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일인칭으로 쓸 수는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97쪽) 오래전 마주앉은 여자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그날처럼 그는 이번에도 삼인칭을 택해야 할 것이었다.

그는······ 어쩌면 그는······ 하고 말이다. 98쪽



* 2월 29일



- 그가 벽에 걸린 달력을 가리켰다. 아, 하고 나는 입을 벌렸다.

2월 29일이었다. 사 년에 한 번씩 윤년에만 찾아오는, 평년에는 2월 28일 밤과 3월 1일 새벽 사이에 슬그머니 사라져버리는. 오늘이 그날이었나. 등줄기가 서늘했다. 지금 이 순간이 더없이 특별하고 유일하며 절대적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나는 곧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119쪽


* 오늘의 운세


- 아, 정말이었다. 이윽고 세 종류의 알람 소리를 넘어, 먼 곳에서 희미하게 다른 알람 소리가, 곧이어 또다른 알람 소리가 들려왔다. 귀가 점점 더 크게 열렸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수십 개의 알람이 동시에 울리고 있었다. 어쩌면 수백 개, 수천수만 개일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아침이란 알람의 시간이었다. 누군가가 끄지 않는다면 영원히 울릴지도 모르는 세상 모든 알람들의 시간. 154쪽


* 질문들


* 선생님, 저예요



* 도망가지 않아요



-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는데(237쪽) 그게 실패할 수도 있나. 그러니까 베트남 처녀에게도 거절할 권리가 있었단 말인가. 정말이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생각할수록 기가 차고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238쪽


* 연말특집


- 그가 천천히 그녀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숨이 막히는 것 같아 어찌된 일인가 했더니 그녀는 윌리엄과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귓불과 목덜미를 지나 가슴까지 내려왔다. 그가 눈으로 선의 뒤쪽 어딘가를 가리켰다. 돌아보니 방문이 있었다. 열린 문 안쪽으로 연분홍 시트가 깔린 침대가 보였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선은 윌리엄을 밀치며 일어났다. 언니를 흔들어 깨웠다. 깨기는커녕 언니는 코까지 골기 시작했다. 더 세게 흔들려고 하는데 윌리엄이 막았다. 그는 언니의 남자친구였다. 267쪽


* 만 보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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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이 만든 공간 - 새로운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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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현준, 공간이 만든 공간(새로운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을유문화사, 2020


빅히스토리적 접근방식으로 건축의 발전사와 융합의 역사를 기술한 책이다. 거칠게 말하면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의 얼굴 윤곽을 가졌고, 제레미 다이아몬드의 "총,균,쇠"의 이목구비에서 나오는 건축적 표정이랄까. 물론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카를로 로벨리).



이 세 권의 책을 읽어 본 독자라면 저자가 이책에서 깊은 영감을 받아 이 책을 집필했겠구나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특별한 것은 동서양의 지리적, 기후적 특성이 농업과 미술과 사람들의 가치관에 영향을 미치고, 동서양의 차이점이 건축에 반영되어 각기 다른 건축적 역사를 일구어 왔다는 점, 그리고 최근의 융합 현상과 미래의 전망까지 일관된 흐름으로 꿰어 내었다는 점이다. 건축이라는 한정된 분야 그 자체에 대한 지식을 넘어 뇌의 지도가 한껏 넓어진 느낌을 받는다.





- 전작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와 『어디서 살 것인가』는 각각 15장과 12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책들에서 각 장들은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하는 글 모음이었다. (···) 각각의 층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반면 이 책은 건물을 세로로 길게 자른 단면도라 할 수 있다. 시간이라는 투명 엘리베이터를 타고 각 층을 통과하면서 1층부터 27층 그리고 옥상까지 올라가 보는 책이다. 15쪽


- 마치 빛을 느끼기 위해서 그림자가 필요하듯, 빈 공간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물체가 필요하다. 역으로 추론해 보면, 물체가 만들어지면 동시에 빈 공간도 부산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간의 건축 행위는 일차적으로 물체를 만드는 것이지만, 최종 목적은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빈 공간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32쪽


- 그 빈 공간이 구축되는 형식과 모양을 보면 만든 사람의 생각과 문화를 비추어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공간을 분석하고 이해하면 사람과 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은 사람의 생각이 어떻게 발생하고, 서로 다른 생각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융합되고 어떻게 생각의 ‘새로운 종’이 만들어지는지 추리해 보는 책이다. 이 추리의 과정에서 건축의 빈 공간의 특징은 중요한 물질적 단서와 증거가 된다. 34쪽


- 강수량의 차이는 농업 품종의 차이를 만들고, 품종의 차이는 농사 방식의 차이를 만들고, 농사 방식의 차이는 가치관의 차이를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건축에서 동서양의 강수량 차이는 건축 디자인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발전시켰고, 건축 공간은 행동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서양은 밀 농사의 혼자 농사하는 방식에 따라 개인주의 성향이 커졌고, 외부와 단절된 창문 없는 벽 중심의 건축으로 바깥과 교류가 적은 성격의 공간으로 발전했다. 건축물 역시 독립된 개별적인 건축물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건축적 개인주의’가 발전했다. 반면 벼농사는 집단 농사 방식으로 사람 간의 관계가 중요한 가치였으며, 많은 강수량 때문에 사용하게 된 재료인 목재를 이용한 기둥 중심의 건축 양식은 외부 자연 환경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생활양식으로 발전되었다. 80쪽


- 건축은 언제나 주변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진화한다. 그러면서 만들어진 ‘문화 유전자’는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주변으로 퍼져 나가고 그 지역 고유의 문화 유전자와 섞이게 된다. 15세기에 삼각돛을 단 범선의 등장으로 공간이 더 압축되면서 유라시아 대륙의 양 극단에 위치했던 서양과 동양의 문화가 유전적으로 섞이기 시작했다. 16세기 중국산 도자기가 유럽에 대량으로 수입되었고, 17세기에는 동양 철학 책들(208쪽)이 유럽에서 번역되어 출판되었고, 18세기에는 조경 디자인이 바뀌었고, 19세기에는 이 변화가 미술로 전파되었고, 20세기에 들어서는 건축에서 문화적 이종 교배의 증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208쪽


- 그의 건축은 한마디로 ‘나무 기둥을 철골 기둥으로, 창호지를 유리창으로’ 바꾼 건축 공간이었다. 기본 구성은 수천 년 동안 내려온 동양의 구법을 따르면서 20세기에 새롭게 등장한 철과 유리라는 재료를 적극 도입하여 새로운 문화적 변종을 만든 사람이 미스 반 데어 로에다. 239쪽


- 미스와 코르뷔지에가 신기술과 동양의 문화 유전자를 섞었다면 다음에 소개할 건축가 두 명은 콘크리트 기술 위에 동양의 문화 유전자와 서양의 기하학적 성격의 문화 유전자를 섞은 건축가들이다. 한 명은 20세기 후반 최고의 건축가로 일컬어지는 루이스 칸이고, 또 다른 한 명은 안도 다다오다. 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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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의 아틀리에 - 과학과 예술, 두 시선의 다양한 관계 맺기
김상욱.유지원 지음 / 민음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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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욱·유지원, 뉴턴의 아틀리에, 민음사, 2020

 

물리학자 김상욱과 타이포그래퍼 유지원의 콜라보 작업을 묶은 책이다. 관계(이야기, 소통, 유머, 편지, 시), 관찰과 사색(결, 자연스러움, 죽음, 감각, 보다, 가치), 공동체(두 문명, 언어, 꿈, 이름, 평균), 수학적 사고(점, 구, 스케일), 물질(검정, 소리, 재료, 도구, 인공지능, 상전이, 복잡함)이라는 기계 속에서 하나씩 튀어나오는 복권당첨번호 확인용 공처럼 두 사람은 제시어에 대해 물리학자가 바라보는 미술을, 타이포그래퍼가 주목하는 과학에 대해 각자의 언어로 짧은 에세이를 썼다. 김상욱 교수가 쓴 “김상욱의 물리공부” “양자역학 콕 찔러보기” 그가 출연한 텔레비전 프로그램 “알쓸신잡” 덕분에 그의 미술에 대한 서술이 개인적으로는 조금 더 친숙하게 느껴진다. 개별 분야의 전문가가 협업하는 방식, 각 분야의 전문가가 타 분야를 어떻게 자신을 전문 분야에 녹여내어 서술할 수 있는지에 대해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 자연스러움이 일으키는 아이러니(유지원)

 

‘자연스러움’이란 ‘자연 그대로의 상태’라기보다는 인간이 받아들이는 관념이다. (···) 인간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때, 인간 바깥에서 바라보면 인간은 다른 시각으로 보인다. 비물질이나 무생물을 제외하면, 인간의 반대 개념으로는 네 가지가 떠오른다. 우선 초월적 영역에 존재하는 ‘신’, 그리고 지구 밖에 존재하는 지능이 높거나 낮은 ‘외계 생명체’. 우리의 지구로 돌아오면 인간 아닌 ‘다른 생물들’이 있고, 마지막으로 ‘인간이 제조한 기계’가 있다.

‘기계’에 대비해서 우리는 인간에게 ‘인간적’이라는 표현을 쓴다. ‘인간적’은 놀랍게도 ‘인위’보다는 ‘자연’에 가깝다. ‘다른 생물’, 특히 ‘동물’에 대비해서는 ‘인간답다’라는 표현을 쓴다. ‘인간다움’은 ‘야만’ 아닌 ‘문명적’이라는 뜻이다. 118쪽

 

- 점, 마침표는 쉼표를 낳고··· (유지원)

 

문장부호들은 지금은 한글에도 사용하지만 로마자에서 유래했다. 소문자 i의 점 모양에서 미세하게 크기를 키운 것이 마침표다. (···) 마침표는 i의 점에서 나오고, 쉼표는 마침표에서 나온다. 마침표 두 개를 위아래로 붙인 것보다 약간 길게 꼬리를 그리면 쉼표가 된다. 275쪽 (···) 쉼표를 돌려서 올리면 작은 따옴표 275쪽 가, 작은따옴표 두 개를 나란히 놓으면 큰따옴표가 된다. 워싱턴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의 카렌 쳉 교수에 따르면, 물음표는 라틴어로 ‘묻다’의 뜻인 ‘questio'에서 와서 Q와 점을 위아래로, 느낌표는 라틴어로 ’기쁨의 탄성‘이라는 뜻인 ’io'에서 와서 I와 점을 위아래로 배열한 형태이다. 276쪽

 

- 점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김상욱)

 

점은 부분이 없는 것이다. 뉴턴의 운동방정식은 미분이라는 수학으로 기술된다. ‘미분’은 말 그대로 미세하게 나눈다는 뜻이다. 부분이 없는 점에 도달하기 위해 실제 해야 할 일은 무한히 미세하게 나누는 것이다. 0은 아니지만 0에 무한히 가까이 접근하는 과정이 미분인 것이다. (···) 점은 물체가 아니라 과정이다. 점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2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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