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름이 있었다 아침달 시집 3
오은 지음 / 아침달 / 201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름에 대한 자각은 무게중심을 내가 아닌 타인에게 놓는 일이다.

이름이란 것 자체가 내가 태어나 나 스스로 명명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군가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 내 이름을 호명하는 것, 예를 들어 진영이가

"진영이는 배가 고파" "진영이는 거기 갈 거야"라는 문장들은

어린 아이의 화법일 뿐 성인의 대부분은 이름이라는 고유명사 대신

대명사를 사용한다. 그러므로 이름에 대한 지분의 과반수 이상은

타인에게 있다.

이 시집에 등장하는 군상의 이름들, 그들의 상태와 행동과 욕망과

좌절과 죽음과 울음 속에 잠시 숨을 참고 잠겨 있었다.

숨을 쉬지 않고도 살 수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령시인 K-포엣 시리즈 9
김중일 지음, 전승희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네번째 시집 "가슴에서 사슴까지"에서 보여주었던 반성과 애도의 사회적 확장이 이제는 시인과 시씀으로까지 확대된 것 같다. 부록으로 실린 시인노트와 시인 에세이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시는 앞으로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투명한 존재'들에 대한 헌사와 매개로 이루어질 것이다. 섬세하게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이미지로 삶과 죽음, 땅과 하늘, 이곳과 저곳,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의 가늘지만

단단한 실끈 같은 그의 시들. 


 

 

 

시인 에세이) ‘내가 쓴 시는 누가 쓴 시일까’

 

나는 지금 망자에 대해서만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시퍼렇게 살아 있으나 투명한 것들은 충분히 많다. (중략) 지구상에 투명한 것들이 차지하고 있는 무한한 영역을 말이다.

나는 앞으로 꾸준히 투명한 것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중략) 다만 곁에 있지 않아 눈앞에 없는 존재 그래서 투명한 존재, 그러나 반드시 존재하는 존재, 끝내 서로 그리워해야 하는 존재를 좇으려는 것이다. 

그리운 사람은 눈에 안 보이는 사람이다. 그리운 사람은 투명한 사람이다. 다만 그들은 나와 시차를 두고 113쪽 살아간다.

 


- 시인의 등

 

시인의 등을 끌어안으면, 나는 시인의 거대한 가방이 된다. 시인은 간혹 나무 아래 기대어 앉아 내 몸속에 손을 넣어 휘적거리다가 몇 권의 시집들 사이에서 물병 하나를 찾아내어 목을 축인다. / 시인의 등을 끌어안으면, 나는 어느새 온몸으로 서리 낀 차가운 창문을 껴안고 있다. 23쪽

 

- 무의미(-시인의 죽음)

 

낡고 오래된 시집 속에서 검고 딱딱한 껍질을 가진 활자들이 사납게 날아오르는 줄만 알았는데, 그것은 죽은 모체에서 나와 딱딱한 활자를 알껍질처럼 깨고 드디어 부화한 시적 의미들이었다. 아무도 관심 없는 시적 의미들은 시인이 죽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시인의 육체를 삼키며 검게 피어올랐다./ 시인을 삼킨 의미들은/ 시인과 함께 아무런 흔적 없이 사라졌다. 32쪽

 

- 새의 무릎 54-56쪽

 

태중에서 기도하는 태아의 작은 두 손처럼 모은 두 부리로/ 땅을 두드리며 새들은 무릎으로 걷는다/ 새들의 무릎은 늘 까져 있다/ 까진 무릎에서 석양이 흘러나온다/ 새들은 온종일 떠나있던 석양 속으로 돌아간다

 

새들의 무릎에서 발이 돋았다/ 새들은 비바람에 꺾여 나가는 정강이를 붙잡으려 오랜 시간 진화했다/ 결국 새들에서 꺾여 나와 지상에 떨어진 가는 다리는 나뭇가지가 되었다/ 그 마디마다 돋는 꽃들 잎들

 

오래된 베개 속에서 하나씩 밖으로 새털이 빠져나가듯/ 내 몸의 구멍이란 모든 구멍에서 매일 하나 둘 새털들이 비어져 나온다/ 내 몸은 점점 작아지며 주름져간다

 

새들의 무릎에는 향 연기보다 가늘어 보이지도 않는 실 한 가닥이 묶여 있다/ 새들의 일과 : 지구 둘레를 선회하는 것은/ 검은 밤고양이가 실뭉치처럼 가지고 놀던 지구를 다 풀어내는 일/ 얽히고설킨 실뭉치인 지구를 풀어 그동안 죽은 고아들이 덮을 이불을 짜는 일/ 오늘 죽은 아이들을 덮을 새털보다 가볍고 따뜻한 이불의 무게/ 아이들의 영혼이 사흘간만 날아가지 않도록 붙들어 놓을 수 있는/ 정확히 그 정도 무게의 이불을 매일매일 짜는 일

 

일과를 마친 새들이 퇴근한 자리/ 바닥에 떨어진 실밥 같은 붉고 노란 꽃들/ 새들의 무릎에 든 멍자국 같은 푸른 잎사귀들

 

- 투명의 경계 78-80쪽

 

죽은 사람, 산 사람들은 투명의 경계를 두고 세계를 절반씩 점유하고 있다/ 산 사람에게 죽은 사람은 투명인간이듯,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첫 죽은 사람이 탄생하는 순간, 투명의 경계가 생기고 세계가 온통 눈앞에 드러났다/ 투명의 경계가 합체되는 순간, 온 세계는 다시 투명해질 것이다/ 지구는 비로소 투명해질 것이다/ 그러나 45억 년간 실패한 일이다// (중략)// 그날의 노을, 기억이란/ 투명의 경계가 허물어진 일들에 대한 기록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또 다른 별에서 문학과지성 시인선 17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새해 아침에는 희망을 노래하기 보다는 절망을 필사하는 것이 좋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은 것처럼.


책장 앞에서, 올해 처음으로 어떤 시집이 나를 끌어당길까.

무려 1981년에 출간된 김혜순 시인의 첫 시집이 1981년에 태어난

나의 세포들을 붙잡는다.


마악 2019년이라는 심해에서 해변으로 걸어나오는 우리를 반겨주는 것은

검은 시간의 모래 뿐. 모래들은 검은 비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맞아들인다. 흠뻑 비를 맞으며 검은 우산이 되어 어둑한 도로로 나오면 헤드라이트를 켜고 물벼락을 안기며 지나가는 빨간 시외버스. 차라리 물 안이 물 바깥보다 따뜻했던 걸까.

'내년엔 꼭 버스를 타리'라고 다짐하며 다시 검은 바다로 걸어들어가는 우리들의 자화상.


팽귄 수영대회에 나가듯 웃통을 까고 2020년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달려간다. 



- 새해 아침 파도 소리 55쪽

 

잘 있었소/ 지금 마악 바다를 나오는 길이오/ 우리의 귀향을 환영해 주리라 믿소/ 이제는 각각 돌아가야지/ 누군가 떨면서 말했소/ 아 오늘은 싸늘히 겨울비 내려서/ 모두 검은 우산을 썼소/ 빗물은 바닷물보다 차가와 견디기 어려운 때문이오/ 버스가 환한 불을 켜고 멈추었소/ 아무도 타지 않소/ 버스만 멈추었다가 떠나고 다시 와 멈추고 또 떠나오/ 이런 엽서가 몇 십 년째나 되는구려/ 아 또 모두들 바다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하오/ 우리들은 바다와 또 검은 악수를 나누게 될 거요/ 내년엔 꼭 버스를 타리다/ 복 많이 받기를

 


- 코페르니쿠스의 어머니 24쪽

 

알을 파는 가게에 가면/ 알을 낳아 보셨어요?/ 묻던 그 목소리 생각났지.

 

하나님의 목소리 속/ 하나님의 부끄러운 궁륭 한 덩이/ 쉬지 않고 돌려보던 내 아들이 생각났지./ 그 부끄러움 속에 뿌리박은 한 송이 민들레/ 민들레꽃 곁에 눈 감은 내 아들의 짙은 눈썹/ 그 눈썹 위에 흙은 퍼붓던 네모난 얼굴들도 생각났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문학과지성 시인선 532
이영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집의 굵직한 주제인 씀(기록하는 행위)과 쓸 수 없음, 죽음, (불)가능성 같은 것보다 배후에 서사가 있을 것 같은 시들이 소매를 붙잡는다. 


빼곡한 나무 사이사이에서 아이들이 맨발로 뛰어다니며 까르르 웃다가 울고, 축구화도 없고 공이 없어도 아이들은 그늘이라는 녹색 그라운드(양탄자) 위에서 축구를 한다. 아무도 말하지 않아도 비밀은 입에서 입으로, 잎에서 잎으로 이슬처럼 흐르고, 이 계절이 지나면 양탄자는 돌돌 말려 어느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겠지. 


너무 기가 막히고 믿기지 않으면 눈물도 흐르지 않는다. 내 눈으로 그것을 확인하고 온몸으로 부여 안지 않으면 슬픔을 시작할 수가 없다. 슬픔은 추상이 아니라 차가운 구체인 것. 4.16. 세월호 사건의 진실을 인양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 분명해 보이는 시.


불행이 가득 흩뿌려진 우물에 펜촉을 담그고 한 글자 한 글자 밤의 구전을 베껴 쓰는 행위. 기록한다는 것은 현실을 온전히 반영할 수 없는 불가능을 내재한 행위다. 쓰고, 기록한다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아픔이고 고통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멈출 수 없는 사람. 슬픔과 아픔의 마음을 생각하며 쓰고 또 쓸 수 밖에 없는 사람에 대한 시들.




* 숲의 축구 14-15

 

숲에 가득한 건 비밀들아이들이 축구를 한다신발이 없어 울고 있으니발이 없는 자가 다가왔다는 페르시아 속담.// 아이들은 양탄자를 짜고 축구를 한다실패를 둘둘 말아서 너의 발이 멀리 날아가도록 힘껏 찰게붉은 실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다.// 비밀은 잎에서 잎으로 건네진다아이들이 발을 찬대공은 흐르고공보다 아름다운 맨발이 흐른대.// 예전에는 슬픔을 돌보았대눈물이 영웅이 되는 시간이 숲에 와서 잎사귀가 자라도록 울고 아이들은 강을 건너간다.// 경기가 끝나자 무성한 나무들이 여름을 떠나간다./ 오래된 나무 집 그늘 안으로 남은 빛이 모여든다이 세계에는 오로지 한 계절뿐인데양탄자를 짜느라 계절을 넘어가고 있다.// 아이들의 기후는 양탄자에 모여 있다비밀인데아이들은 그렇게 늙어가고 있대흰 눈이 내리고멀리 날아갔던 발들이 모여 있대.

 


* 슬픔을 시작할 수가 없다. 70-71

 

슬픔을 시작할 수가 없다너의 몸을 안지 않고서는차갑고 투명한 살을천천히그리고 오랫동안쓸어보지 않고서는// 1년 동안너는 바닷속에서 물처럼 흘러가고 있다너는 심연 속에서 살처럼 흩어지고 있다발이 없어서 우는 사람// 오래전부터 바다는 잠을 자고 있어서죽음을 깨우지 못한대너는 묘지도 없이 잠 속에서 이를 갈며 떨고 있다너는 죽음을 시작할 수가 없다// 산 자들은 항상 죽은 자 주위로 모여든다고 하는데우리는 슬픔도 없이 모여 있다진정한 애도는 몸이 없이 시작되지 않는다// 모든 비밀은 바닷속에 잠겨 있다바다에서 죽지 않는 손이 올라온다그 손을 잡아끌어 올려야 한다.

 


 

* 우물의 시간 79

 

나는 잡고 있던 너의 손을 버리고 문밖으로 나왔지홀로 있을 때 나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었는데 함께 있을 때 나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은 둘이 된다.// 신발을 벗고 우물을 들여다본다물속 깊은 그림자 속에 빠져들어 있으면 바닥이 되고 싶다불행은 물속으로 녹아드니까자신의 그림자를 죽은 자 위에 놓아두면 안된다는 옛말은 보다 아름다운 세계를 감추려는 것일지도 몰라. 우리는 잠에서 흘러나와 잠으로 가는 것이니까. // 너는 천천히 다가와 벽돌을 쌓는다추위에 견딜 수 있는 시간을 담고 벽은 금이 가겠지옛집에는 스스로 울 수 있는 흙이 숨겨져 있다고 너는 병든 내게 말했다진흙을 개어 우물터를 쌓던 밤이 있었다부드러운 한밤 깊은 곳으로 우리는 갔다너는 나의 손을 잡고 함께 버려지고 있었다.

 

* 이집트 소년 86-87

 

아직 먼 곳으로 갈 준비가 안 되었다이 준비는 언제 끝날까만일 먼 곳에 산다면 이곳에서 죽는 일은 어렵겠지나는 책을 두고 갈 수가 없다아무런 말도 읽지 못하면서 그 말들 두고 갈 수가 없는 마음. 다정한 너는 아무것도 쓰지 않은 편지를 잘 받았다고무엇을 쓰지 않느라 얼룩이 잔뜩 껴 있었다고 투명한 답장을 보내주었는데. (중략이집트 호텔 보이는 글자를 써서 주자 울 것 같은 표정을 되었다. 모르는 사람들과 말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저는 십대 시절을 다 보냈어요시간이 얼른 지나가서 말도 없이 무덤덤한 노년이 오기를 바랍니다그런 소년에게 나는 휴가라고 써서 보여준다소년은 내가 내민 쪽지를 땅으로 떨어뜨린다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외면한다무엇을 쓴다는 것이 고통을 줄 수도 있다면수많은 글자로 가득 찬 이곳에서 어떻게 마음을 써야 하는지. 모래만 가득한 먼 곳에서 금방 늙는다는 것은 무엇일지나는 시와 오아시스 사막에서 잠깐 동안 글자를 버리고 온 적이 있다사막으로 돌아가는 일은 어렵고이집트 소년은 사막에서 아무도 보내지 않은 편지를 읽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샘터 2019.12
샘터 편집부 지음 / 샘터사(잡지) / 2019년 11월
평점 :
품절


화장실 한 켠에 꽂혀 있던 샘터. 언론을 통해 2019년 12월호를 마지막으로 무기한 휴간한다는 보도가 있었고, 각지에서 온정의 손길이 모여 휴간을 면했다는 반가운 소식.



12월 초 어머니 생신이라 고향을 찾았을 때, 조카들에게 책을 사주려고 책방을 들렀었다. 창원역 앞에 있던 '노다지 서점'이 부모님 댁 근처 빌딩으로 이전했고, 여자 사장님은 그대로여서 말은 못했지만 반가웠다. 조카들이 책을 고르는 동안 가판대에 놓인 샘터를 들춰보다가 구입했다.



귀농 기사, 가수 솔비가 비주얼 아티스트로 활동하는 것을 취재한 기사 등 의외로 다양한 컨텐츠와 그 양질에 놀랍다. 새해 1월호는 이미 온라인서점에서 구매했고, 작은 보탬이겠지만 2월호부터 1년 정기구독 신청도 했다.



얇지만 무겁고 든든한 잡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