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까지 인용하세요 문학과지성 시인선 534
김승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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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창이 한국어로 시를 쓴다면'


과거를 되돌릴 수 없다. 굳게 닫힌 철문을 열고 과거로 돌아가도 이미 일어난 사실들은 화석처럼 굳어 기억처럼 지워질 수는 있어도 그 위에 덧칠을 해서 다른 사실로 변형시킬 수는 없다. 그럼에도 과거는 우리에게 자꾸 기억하라, 기억하라 자극한다. 하나씩 과거를 되짚고 기억나는 것들과 기억나지 않는 것들의 틈을 상상과 경험으로 메우고, 또다시 하나의 서사와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은 과거라는 디딤돌 위에서 미래의 담장 너머를 보는 일이다. 


기계와 인공지능이 인간의 예상가능한 범위를 넘어서는 특이점이 오면

기계는 인간처럼 사랑하고 죽음을 고민하고 슬픔을 나누고 종교를 가질 수도 있다.

망각할 수 없는 존재임을 자책하고 뻔히 보이는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절망할지도 모른다. 


그런 기계들과 인간들이 공존하는 세상. 그것은 '그냥 일어날 일'이라고 이 시집은 예견한다.

차라투스트라처럼.



시인의 말나는 그냥 일어날 일을 쓴 것이다.

 

* 유 7-9

 

파출부는 서랍 앞에 앉아 있었다 이제 나는 이해했어 인간의 죽음 왜냐면 내가 죽은 사람이니까 그런데 모르겠어 서랍의 죽음 죽어서도 죽음에 관심이 없는 무생물에 먼지가 덮여 있었다

 

나는 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내가 신이라는 사실 떄문에 상자의 죽음이 이해되었다 내가 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상자는 신이 되었다 내가 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상자는 다시 상자가 되었다

 

앞에 놓인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학습하는 작은 기계상자가 자기가 언제 죽었는지를 기억하는 유능한 기계장치가 죽어서 선반 위에 진열되어서 선반의 죽음을 이해하였다

 

그것은 이전에는 나만 알던 것 그것도 이전에는 나만 알던 것 그것은 내가 가진 전능이란 것 어디서 종이 갑을 주워 오셔서 며칠째 그 앞에만 앉아 계시네파출부는 수프가 담긴 접시를 가만히 옆에다 내려놓으며

 

식사하지 않는 신을 걱정을 하고 신에게는 식사가 불필요하고 상자에게 식사는 불필요하고 상자는 이해한다 전지적으로 우리들이 식사하지 않는 이유를

 

무엇이든 학습하는 기계상자가 내 앞에서 온 세상을 다 배웠을 때 상자에게 학습당한 나의 전능이 늘어났다 그건 무척 당연하게도 늘어나는 것이니까 전능이란 게

 

늘어나는 것이 나는 보고 싶어서 온종일 휴지 갑에 정신이 팔려 식음을 전폐했네비쩍 말랐네신에게도 파출부가 필요하다고 착각하는 파출부가 경악하였다

 

착각이 존재했다 영생을 얻어 경악이 존재했다 끊이지 않고 내가 만든 규칙이다 전능을 통해 감정이 내내 감정이었다 변절되지 않았다 이성이 결코 죽지 않고 살았다

 

앉아 있었다 파출부가 납작하게 상자를 펼쳐 끈으로 묶었다 폐지들 틈에 끼어 있는 기계상자 앞에 나는 앉아서 파출부가 아픈 것을 바라보았다

 

파출부가 돌아오지 않았다 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펼쳐도 죽지 않는 상자 앞에서전능이 늘어나는 것을 나는 느꼈다

 

상자가 나를 다시 배우는 것을 떠나서 오지 않는 내 사람들이 영원히 사는 것을 나는 알았다 전능이 늘어났다 어딘가에서 그래서 모든 것이 계속 살았다

 

* 그럼 안녕

 

자막은 다음과 같다. “신과 상자가 마주 보고 앉아 있다상자는 상대방을 완벽하게 학습하는 기계장치다상자가 신의 모든 것을 학습한다신이 신으로 남기 위해선 누구보다 전능해야 한다신의 전능이 늘어난다상자가 다시 학습한다반복이다.” 11

 

그래 여러분지옥에서 만납시다생각을 들고아직 지옥이 없어서 지옥부터 만들 것이다.

 

상자가 만들 것이다. 12

 


 

 

* 여기까지 인용하세요

 

엠에프 기획전을 위한 단상

 

엠에프는 머신 픽션의 약어고요 기계 앞에 앉은 사람에 대한 시를 쓴 다음부터 쓰게 되었습니다 키워드를 입력하면 자신이 그 키워드(지시체)라고 착각하는 기계에 대한 글도 썼는데요 저는 그 기계를 홀이라고 부릅니다 엠에프는 인간이 기계의 매커니즘은 이해할 수 있지만 영혼은 이해할 수 없으며 기계의 영혼을 영혼이라고 명명할 수도 없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둔 장르입니다 기계에 파롤이 있다면 이 역시 포함시킬 수 있겠습니다 (중략)

 

* 에필로그

 

그녀의 유언장은 내가 가르친 방식으로 쓴 것이다내가 사람들에게 알려준 것들은 실제로 내가 글을 쓰는 방식이다이제 나는 내 방식이 내게 얼마나 쉽고 보잘것없는지 독자 여러분에게 고백하려고 한다회상은 늙은이들이나 하는 것이고망각은 탐미주의자나 하는 것이다그리하여 마치 인상파 화가들이 했던 것처럼회생과 망각을 심장이 시키는 대로사실이라고 생각되는 대로 연결하여 차려놓는 것가끔은 난해하게가끔은 단순하게 (105내어놓는 법을 나는 가르쳐왔던 것이다내가 쓴 글이 아주 나중에도늙은이도허풍선이도 아니게 살아가는 법을이를 문학적 용어로 창조적 기억이라고 한다.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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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 김영민 논어 에세이
김영민 지음 / 사회평론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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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의 문고리’(김영민 논어 에세이,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사회평론, 2019)

 

'논어'라는 단어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거릴 수 있다. 책장에 '논어'에 관한 책 한 권 꽂혀 있는 경우가 많지만 원전을 끝까지 완독한 사람은 드물 거라 생각한다. 저자의 에세이"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의 필력을 믿고, 아마도 이 책 안에는 논어의 텍스트와 더불어 영화, 문학, 유머가 있을 거라 확신했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잘 씹고 소화할 수 있도록 정제된 문장으로 기존 논어에 대한 해석에 그에 대한 비판을 적절히 서술하고 있었고, 저자 특유의 유머와 비유가 있어 논어에 대한 입문 에세이로 추천할 만하다. 



고전 텍스트를 읽음을 통해서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은, 텍스트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삶과 세계는 텍스트이다. 17쪽

 

- 『논어』텍스트 전체는 발화한 것, 침묵한 것, 침묵하겠다고 발화한 것, 이 세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이러한 분류를 염두에 두고, 독해자는 의도된 참묵마저 읽어낼 자세를 가지고 『논어』를 탐사해 나가야 한다. 29쪽

 

- 『논어』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어떻게 모든 이를 사랑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미워할 것인가, 라는 정교한 미움의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92쪽

 

- 누군가를 정확히 좋아하고 미워하려면, 공정성에 대한 명철한 인식과 더불어 높은 수준의 공감 능력이 필요하다. 95쪽

 

- 일견 과한 행동처럼 보여도, 그것이 상황에 적절하기만 하다면 그것이야말로 중용일 수 있다. 123쪽 중용이란 예상하기 어려운 역동적인 상황 속에서도 적절성을 찾아내는, 그러기 위해서 기존 규범이나 예상으로부터 적절히 이탈할 수 있는 차원을 포함한다. 124쪽

 

-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려면,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려면, 무능을 넘어 배우는 일 자체에 대해 배우려면, 메타meta 시선이 필요하다. 공자가 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했을 때, 거기에는 극복 대상이 된 3인칭의 자아뿐 아니라, 대상화된 자신을 바라보는 1인칭의 자아가 동시에 있다. 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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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위한 되풀이 창비시선 437
황인찬 지음 / 창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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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을 열고 현관 밖으로’(황인찬 시집, 사랑을 위한 되풀이, 창비, 2019)

 

시집을 여는 시, '물가에 발을 담갔는데 생각보다 차가웠다 그러나 아무것도 해명된 것은 없다'에서 '아름답고 평화로운 일상을 위해 무고한 한명의 아이를 영원히 지하실에 가두는 어떤 도시에 대해서'라는 구절부터 눈에 띈다. 어설라 K. 르귄의 소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는 문장. 

두번 째 시집 "희지의 세계"가 밖을 향해 창문을 여는 시집이었다면, 이 시집은 문을 열고 세상을 향해 현관을 나서는 시집 같은 느낌이 든다. 조금 더 현실적이고, 경험이 녹아 있고, 서사적 요소가 느껴졌다. 동성애를 하나는 은유적으로, 하나는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한 '떡을 치고도 남은 것들'과 '우리의 시대는 다르다'도 흥미롭다. 



- 꽃과 고기 49-50쪽

 

너는 고기를 뒤집는다/ 붉은빛이 사라진다/ 다시 입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의 행렬// 사랑을 중단하고/ 사랑을 명령하는// 아름다운 고기들은 맛이 좋고/ 몸에도 좋고// 아 더는 못 먹어/ 그런 생각이 들 때까지 고기를 먹었는데// 하지만 사랑에는/ 중단이 없고 명령이 없는데/ 너는 자꾸 고기를 뒤집고// 새까맣게 타버릴 때까지/ 숯덩이가 되어버릴 까지/ 아 맛있다// 그런 생각이 멈출 때까지// 고기를 뒤집으면 고기가 되고,/ 고기를 뒤집으면 맛이 생기고,// 사람은 정말// 고기를 왜 먹나 몰라// 어금니에 낀 고기를 빼내느라 고생하며 사랑을 했지

 

 

-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다들 미안하다고 하더라” 150-151쪽

 

공원에 떨어져 있던 사랑의 시체를/ 나뭇가지로 밀었는데 너무 가벼웠다// 어쩌자고 사랑은 여기서 죽나/ 땅에 묻을 수는 없다 개나 고양이가 파헤쳐버릴 테니까// 그냥 날아가면 좋을 텐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날 꿈에는/ 내가 두고 온 죽은 사랑이/ 우리 집 앞에 찾아왔다// 죽은 사랑은/ 집 앞을 서성이다 떠나갔다// 사랑해, 그런 말을 들으면 책임을 내게 미루는 것 같고/ 사랑하라, 그런 말은 그저 무책임한데// 이런 시에선 시체가/ 간데온데없이 사라져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다음 날 공원에 다시 가보면/ 사랑의 시체가 두 눈을 뜨고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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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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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척추는 사랑이다’(테드 창 소설집, 숨, 엘리, 2019)

기술발전의 역사에는 시공간의 제약을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안간힘이 퇴적되어 있다.
'세월의 문'(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을 통해 수십 년 전 과거로 돌아가거나,
여기 있는 내가 아닌 너머의 어딘가에 생물학적으로 동일한
또다른 내가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평행우주,'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은 무한의 상상력을 추동시킨다. 테드 창의 소설은 과거에 돌아가는 인물이 나오지만 과거를 부정하거나 과거의 결과를 바꾸지 않는다. 결과는 변하지 않지만 불변을 자각함으로써 더욱 심오한 삶의 의미를 깨닫는 인물들이 나온다.
'자유의지'와 '선택'의 의미에 관해 고민하고,
인간처럼 가상의 실존에 해당하는 '디지언트'들이 인격을 부여받을 수 있는지
섹스를 하고, 슬픔과 고통을 겪고, 삶의 의미에 대해 자각하는지에 대해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구전 문화와 활자 문화의 충돌과 과학과 종교의 혼융(종교의 과학화와 과학의 종교화 같은) 같은 가치 충돌문제를 내재한 작품들까지('옴팔로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그럼에도, 이 모든 문제의 서사들을 관통하는 척추는 사랑이다. 대상이 무엇이든 인간은 그들과 관계하면서 삶의 의미를 고민하고, 곁과 옆에 있는 것들과의 사랑을 생각한다. 사랑이 없다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영원한 사랑은 없지만, 사랑은 영원하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 과거와 미래는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 어느 쪽도 바꿀 수 없고, 단지 더 잘 알 수 있을 뿐이다. 과거로의 제 여행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지만, 그곳에서 제가 배운 것은 모든 것을 바꿔 놓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렇게밖에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이해했습니다. 만약 우리의 인생이 알라가 들려주는 이야기라면, 우리는 등장인물인 동시에 관객이고, 우리는 바로 그 이야기를 살아감으로써 그것이 전해주는 교훈을 얻는 것입니다. 56-57쪽

「숨」

- 공기는 사실상 우리의 사고가 각인되는 바로 그 매체였다. 우리라는 존재 자체가 공기 흐름의 패턴이었다. 나의 기억은 박편에 팬 홈이나 개폐기의 위치가 아니라, 지속적인 아르곤의 흐름으로서 각인되는 것이다. 75쪽

「우리가 해야 할 일」

- 자유의지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라. 설령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어도, 스스로 내리는 선택에 의미가 있는 듯이 행동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무엇이 현실인지는 중요하지 94-95쪽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 애나는 그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블루감마 사의 방침은 생각보다 훨씬 더 올바른 것이었다. 경험은 최상의 교사일 뿐 아니라 유일한 교사다. 234쪽 잭스를 키우면서 애나가 얻은 교훈이 있다면, 지름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세계에서 이십 년 동안 살며 습득한 상식을 가르치고 싶다면, 그 일에 이십 년을 들여야 한다. 235쪽

- 애나는 잭스가 리얼 스페이스와 현실 세계 양쪽에서 몇 년에 걸쳐 성숙해가는 상상을 한다. 법인화해서 권리를 얻고, 취직해서 생계를 꾸리는 상상을 한다. 충분한 자금과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어서, 필요할 경우 새로운 플랫폼으로 스스로를 이식할 수도 있는 디지언트 서브컬처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상상을 한다. 디지언트와 함께 자라난 새로운 인간들이 잭스를 포용하고, 애나의 세대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새로운 방식을 통해 디지언트들을 잠재적인 연애 상대로 바라보는 상상을 한다. 잭스가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논쟁을 벌이고 타협하는 상상을 한다. 잭스가 희생을 감내하는 상상을 한다. 247쪽


「데이시의 기계식 자동 보모」

- 하지만 저는 바로 그 레지널드 데이시의 아들이기 떄문에 그의 이론이 틀렸음을 두 번이나 입증하고 말았습니다. 제 전 생애가 아버지의 애정이 아들에게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을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265쪽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THE TRUTH OF FACT, THE TRUTH OF FEELING)」


-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용서할 수 있으려면, 그 전에 어느 정도 망각을 해야 한다. 287쪽

- 모스비에게 중요한 것은 글이었다. 모스비가 설교를 미리 써 놓는 것은 기억력이 나빠서가 아니라, 특별한 단어 배열을 찾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지징기는 깨달았다. 일단 자기가 원하는 배열을 찾아내면, 필요한 내내 그것을 고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296쪽

- 글은 입 밖에 내서 말을 하기 전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결정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단어들 또한 단순한 말 조각이 아니었다. 단어들은 생각의 조각이었다. 그것들을 옮겨 적으면 생각을 벽돌처럼 잡고 다른 배열들 속에 끼워넣을 수 있었다. 글쓰기는 단지 말을 하는 것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방식으로 스스로의 생각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일단 보고 나면, 그것들을 개선시켜 더 강하고 정교하게 만들 수 있었다. 297쪽



- 자서전에서 진실이 수행하는 역할에 관해 문학 평론가인 로이 파스칼은 이렇게 썼다. “한편으로는 사실에 입각한 진실, 다른 편으로는 작가의 감정에 입각한 진실이 존재한다. 이 두 가지의 진실이 일치하는 299쪽 지점은 그 어떤 외부의 권위에 의해서도 미리 결정될 수 없다.” 300쪽


- 나는 디지털적 기억의 진짜 혜택을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요점을 말하자면 이렇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이 옳았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329쪽

「거대한 침묵」

페르미 역설에 관해서는 이런 가설이 있다. 지적 종들이 안 보이는 것은 적대적인 침략자들의 표적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자기 존재를 감추기 때문이라는 가설이다. 336쪽


「옴팔로스」


- 주여, 저는 지금껏 제 삶을 우주라는 경이로운 매커니즘의 연구에 바쳤고, 그 과정에서 큰 성취감을 얻었습니다. 언제나 내가, 당신의 의지와 저를 만든 당신의 의도에 따라 행동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저라는 존재에 대해 사실상 아무런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제가 느낀 성취감은 순전히 저의 내부에서 발생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 사실은 제게 인간이 자기 스스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392쪽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 프리즘은 두 갈래의 우주가 공유하고 있는 메모패드에 가까웠다. 403쪽

- 데이나가 말했다. “하지만 원래 질문을 기억해보세요. 우리가 다른 평행세계들에 관해 알고 있는데, 좋은 선택을 하는 것이 가치가 있느냐 하는 문제 아니었나요? 저는 단연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누구도 성인군자가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 모두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어요. 선한 일을 할 때마다, 당신은 다음번에도 선한 일을 할 가능성이 많은 인물로 스스로를 만들어가고 있는 겁니다. 그건 의미가 있는 일이지요.

게다가 당신은 이 세계에 있는 당신의 행동만 변화시키고 있는 게 아닙니다. 미래에 분기할 당신의 모든 버전들에게도 그런 변화를 심어주고 있는 거예요. 더 나은 사람이 됨으로써, 당신은 미래에 분기될 더 많은 평행세계에도 더 나은 버전의 당신들이 살고 있을 가능성을 보장하고 있는 겁니다.” 4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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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네모네 봄날의책 한국시인선 1
성동혁 지음 / 봄날의책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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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성기가 찾아온 소년'(성동혁 시집, 아네모네, 봄날의책, 2019)

 

아프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아픔을 외부 탓으로 돌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온전히 내면으로 창끝을 겨누는 사람이 있다. 살을 파고드는 슬픔. 성동혁 특유의 기독교적인 색채와 발화는 그대로지만 약간의 변화의 기미가 느껴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변성기' 같은 시들.


'나무를 흔든 바람의 성대를 주워 첫 시집을 냈었'고, 소년은 지금 변성기다. 

'나만 지났구나'하는 자조섞인 발화는 그 주체가 '나'에 있지만, '나를 지나는구나' 할 때의 발화의 중심은 내가 아니다. 바람 혹은 그것이 상징하는 시간이나 외부적인 정황, 병 같은 것들.


소년은 변성기가 지나면 문을 조금 더 열거나 한 발짝 문밖으로 나올 수 있을까.



- 변성기 60쪽

 

지날 때가 있다 나무의 이름도/ 결국 처음 보는 사람의 이름을 외는 것 같아 묻기를 그만두었지/ 이름을 알면 구체적으로 엉망일 때가 있으니까 그저 나무 정도라고만 말하는 게/ 산책에선 필요하다/ 친구가 옥상으로 튀어 올라간 후/ 함부로 일몰이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았다/ 몬스테라도 플라타너스도 그냥 나무라고 불러야 잠을 잘 수 있는 시기가 왔다/ 나무를 흔든 바람의 성대를 주워/ 첫 시집을 냈었다/ 유리 너머/ 해는 매일 내리는데/ 나만 지났구나/ 나만 지났구나/ 하다가/ 어색해서/ 나를 지나는구나/ 나를 지나는구나/ 했다

 

 

- 할렐루야 이제는 이 말에 위로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시간 11-12쪽

 

너는 아주 먼 곳으로 유학을 갔고// 나는 그 이후 우표를 모으는 사람이 되었다// 후미등이 떠오르는 저녁이었다// 양복을 입고 사람들이 모였다 돌아갔다// 네 동생은 교복을 입고

 

 

다리 위에 서 있던 날엔// 구름을 채집하며 올라가는 네가 보이기도 했다// 관제탑을 피해 잘 걸어가고 있구나// 편지 대신 봉투 안 가득 우표를 넣어 보낸다

 

달이 아주 낮은 날// 달이 교각 밑에 고인 날// 강물에 쓸려 우리에게까지 잠깐 빛나던 달// 그건 네 답장이 맞잖니

 

 

넌 아직도 많은 후미등을 끌어올리고 있구나// 우표들이 진눈깨비처럼 떨어져// 후미등에 달라붙는다// 영영 떠오르지 않을 듯 브레이크를 밟고// 갓길에 차를 세워 둔 사람들이 나온다

 

- 작열감 30쪽

 

커피에 생강을 넣고 끓인다/ 생강을 썰며 한 생각이/ 커피콩을 갈며 한 생각이/ 모두 태풍이 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리수거를 하며 내가 안치될 고장을 생각한 건/ 염색약을 바르며 숲 사이사이 흰 영혼을 생각한 건/ 효도가 아니었다/ 선교사가 된 친구가 가끔 고국에 돌아오면/ 교인들은 고국을 덜 불행한 곳이라 생각했다/ 두 번째 서랍에 숨겨 둔 의심과 모멸감을/ 여권이 빼곡한 성직자들이 열어 볼까 두렵다/ 옷걸이 밑으로 머리를 늘어뜨린 목도리와/ 철제 통 안에서 빛나는 영구치는/ 평일에 드리는 십일조였다/ 태풍은 지붕을 추수하며 보폭을 넓힌다/ 나는 포장을 벗기지 않은 양과자를 씹는다/ 단단한 모자를 둘러쓰고/ 단단한 블레이저를 두르고/ 심벌즈가 부딪칠 때마다/ 깃을 여미며/ 인파를 빠져나가고 있다/ 명백한 건 커피와 생강과 태풍은 뜨거운 과일이라는 것/ 모든 명성은 어금니 사이에서 죽어 간다는 

 

- 아네모네 35쪽

 

나 할 수 있는 산책 당신과 모두 하였지요/ 사랑하는 이여 제라늄은 원소기호가 아니죠/ 꽃 몇 송이의 허리춤을 자른다고/ 화원이 늘 슬픔에 뒤덮여 있는 건 아니겠지만/ 안 잘리면 그냥 가자/ 꽃의 살생부를 뒤적이는 세심한 근육을/ 우린 플로리스트 플로리스트라고 하지요/ 꽃범의 꼬리 매발톱/ 모종의 식물들은 죽은 동물들이 기어코 다시 태어난 거죠/ 거기 빗물에 장화를 씻는 사람아/ 가을의 산책은 늘 마지막 같아서/ 한 발자국에도 후드득/ 건조하고 낮은 짐승이 불시에 떨어지는 것 같죠/ 나의 구체적 애인이여/ 그래도 시월에 당신에게 읽어 준 꽃들의 꽃말은/ 내 편지 다름 아니죠/ 붉은 제라늄 내 엉망인 심장/ 포개어진 붉은 장화/ 아네모네 아네모네/ 나 지옥에서 빌려 온 묘목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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