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15
안희연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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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을 읽고 머리속을 떠나지 않는 이미지가 있다.

커튼이 쳐져 한 줌의 빛도 비치지 않는 좁은 방,

겨자씨 만한 씨앗 한 톨이 외로이 방을 지킨다.



첫 시 '전망'과 '나의 겨자씨'라는 시가 인상에 남는다.

특히 '나의 겨자씨'는 제목에서부터 황정은의 단편소설 '파씨의 입문'을 떠올리게 했다.


'이것은 일천구백칠십구년 팔월의 기억, 파씨는 파씨의 왼쪽 머리를 눌러 보이겠습니다.

말하자면 이 부근입니다. 최초의 기억과 최초의 질문과 최초의 정서가 시작된 지점, 여기가 바로 겨자씨만한 파씨, 파씨의 발생, 조그만 주름의 시작입니다.'


이 구절은 소설의 머리에서 한 번 언급되고, 꼬리에서 한 번도 반복된다.

곧 소설 속 화자의 정체성이 총체적으로 응집된 캡슐.


시인은 겨자씨를 "내가 아는 가장 작고 먹먹한 이름" "내 최초의 눈빛이 담긴 호리병"이라 정의한다. 더 나아가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결국 여기/결국 마음"으로 최초의 지점으로 되돌아온다.


첫 시집의 주된 정서가 슬픔이었는데, 이 시집은 슬픔이 깊어졌다기보다는 넓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땅밑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희망을 찾는 두더지. 그 애씀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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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 기형도 30주기 시전집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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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읽었던 많은 시집들 속의 시들이 기형도의 시에 빚지고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길, 안개, 구름, 정거장



그런데 이번에 기형도 전집을 읽으면서 눈이 가는 시들은

창밖에서 우연히 울고 있는, 관공서에서 일하는 사내를 지켜보는

'기억할 만한 지나침', 그늘진 곳에서 묵묵히 벽돌을 나르는 아이들이

등장하는 '전문가', '조치원', '노인들''시인1'



그가 떠난 지 삼십 년이 흘렀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처럼, 딱딱한 의자에 앉아

스크린 위에서 흘러가는 2019년을 응시하고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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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르센 동화전집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11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지음, 한스 테그너 그림, 윤후남 옮김 / 현대지성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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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공주', '성냥팔이 소녀', '벌거벗은 임금님'만 읽었다.

사실 인어공주를 읽기 위해 빌렸는데, 전집이라 휴대하기는 부담스러운 무게



인어공주와 벌거벗은 임금님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벌거벗음'

인어공주는 인간이 되기 위해 마녀를 찾아가 혀를 잘리고 목소리를 잃은 뒤 마법을 물약을 마시고 드디어 인간의 다리를 가진다.

해변에서 왕자와 처음 맞닥뜨린 순간,
공주는 벌거벗은 몸을 부끄러워 한다.



반면, 벌거벗은 임금은 행진 도중에 어린 아이가 벌거벗었음을 보이는 그대로 외치기 전까지 자신의 벌거벗음을 깨닫지 못했다.



성경에서 모티브를 따왔음에 분명한 벌거벗음에 대한 부끄러움.
공주는 그것을 알기에 불멸의 영혼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임금은 조롱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인어공주에서 또 주목할 만한 테마는 '목소리'와 '눈물'이다.


세이렌처럼 세상 사람들을 홀리게 만드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잃고 대신 인간의 다리를 얻은 인어공주,

지척에서 자신을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는 왕자에게 그 어떤 고백이나 설명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내가 먼저 당신을 호명할 수 없는 에코의 운명보다 더 가혹한 현실.
목소리를 잃었다는 것은 곧 이 사랑의 결말이 비극임을 암시하는 확실한 징표다.


인어공주가 눈물을 흘릴 수 없는 존재라는 것도 마찬가지.
인간다운 사람이라면 타인의 슬픔과 아픔에 공감하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
인어공주는 아침 노을을 마주하고 물거품이 되어버린 이후에야 비로소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불멸의 영혼이 될 수 있는 공기의 정령이 되어 삼백 년을 살아야 한다.
눈물은 내가 당신의 가슴으로 걸어가고 있음을 미리 알려주는 전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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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아름다운 수학이라면 - 내 인생의 X값을 찾아줄 감동의 수학 강의 서가명강 시리즈 3
최영기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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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명강(서울대에가지않아도들을수있는명강의)시리즈로 출간된 책이다.

이 책에 해당되는 팟캐스트를 듣진 않았지만, 아마도 그 내용을 정리한 책일 것이다.


최대한 비전공자도 알기 쉽게, 수학의 수식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수학과 수학자들의 학문과 삶에 대한 태도와 입장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특히 제1부 삶에 수학이 들어오는 순간(사색으로 푸는 수학)의 챕터들이 좋았는데,

유클리드의 원론의 기본 공리, 소수의 개념, 아치와 평행사변형, 거리 같은 것들을 일상 생활에 접목해 설명해 주고 있다.


최대한 수식을 배제하고, 단순하지만 보편적인, 더하거나 더 뺄 것이 없는
추상화를 감상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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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8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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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 용사인 대령이 오십 년 넘게 섬마을에서

군인 연금의 수혜를 내용으로 하는 편지를 기다린다.

투계장에서 총을 맞고 숨진 아들이 남긴 유산, 수탉과

아들 아구스틴을 잃고 우리 부부는 아들의 고아가 되었다는

아내와 함께,



감시와 검열, 가난과 배고픔을 저울에 올려 놓는다면

삶의 무게는 어느 쪽으로 기울어질까



"분명하고 확실하게 도착하는 유일한 것은 죽음뿐(59쪽)"임을 알고 있으며



아들의 대부였던 터키인 사바스 씨에게 아들의 분신과 마을의 희망의 상징인

수탉을 팔러 갔다가, 차마 팔지 못하고 되돌아오게 한

그 자존심.

그 "똥".



화산과 빙하로 덮인 아이슬란드에서는 하얀 모래가 없고

검은 모래 뿐이라는데



수많은 검은 글자들에 묻혀 있다가 서서히 빛을 드러내는

그 똥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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