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
박완서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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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선생의 전 작품에 대한 서문(발문)집으로 소장가치가 있다.

대체로 짧은 글이지만
겸손과 겸양의 글 속에 작가로서의 자존심과 자부심이 느껴지고
오롯한 자존감 속에서도 주변에 감사와 헌사를 잊지 않는 살뜰함까지
그가 쓴 글 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무리지만
작가가 쓴 글 속에는 분명 작가가 투영되어 있고, 박완서 선생의 작품에는
그 농도가 짙다.



"종교가 절대적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주술적 의존을 가져와 창조적인 능력을

무능화시킬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

"어머니의 현재 진행 중인 고통과 고투에 대해 여유를 둘 수 있었고 객관적일 수 있었고 냉담할 수 있었다는, 좋게 말하면 작가적 근성, 나쁘게 말하면 말 못할 독종에 대한 혐오" 를 고백하고 성찰하는 그 진정성이 작가의 글이고, 그 글은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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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한국 현대문학 수업 - 세계문학의 흐름으로 읽는
이현우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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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이후 십년을 단위로 그 시대를 대변할 만한 작가의 생애와 작품의 내용을 문학사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부제가 '세계문학의 흐름으로 읽는'이지만 이론서처럼 세계문학의 전반적 흐름을 나열식으로 서술하지는 않고, 개별 작품 안에서 문학사조와 작가들을 언급하는 정도다. 본격적으로 자세하게 세계문학의 흐름을 소개했다면 오히려 지루해졌을 텐데 그렇지 않아서 적절한 분량이다. 장점은 시대별로 작품을 골라 부랑자 문학, 노동문학, 계급문학, 교양문학, 리얼리즘 소설, 모더니즘 소설 등으로 나아가는 문학의 흐름 안에서 각 작가와 작품들을 대입해서 내용과 한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준다는 점이다. 단점은 평자의 주관이 강하게 개입되다 보니 단정적으로 씌어진 부분도 발견된다는 것. 나처럼 소설에 대해 문외한인 사람에게는 충분히 길라잡이가 될 만한 책이다.




1장 1950년대: 손창섭《비 오는 날》: 한국전쟁의 폐허가 낳은 ‘너절한 인간’들의 한계와 가능성


- 손창섭 문학은 인간 사회를 동물원 수준으로 본다. 여성의 인격이나 성격이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저 ‘뱃가죽이 좀 달라’ 이런 식이다. (···) 전쟁의 사후 효과이기도 한데 모든 이념이나 고상한 정신적 가치가 다 무너지고 파괴된다. 25쪽


2장 1960년대 1: 최인훈 《광장》 : 남한과 북한 체제 모두를 거부하는 ‘회색인간’의 의미와 한계


- 정신분석학에서 ‘아버지의 이름’은 법, 이념, 사회적 질서 등에 상응하는 개념이다. 여기서 ‘아버지’는 단순한 생물학적 아버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버지가 인정하고 이름을 부여해줘야 온전한 주체가 될 수 있는데 이렇게 주체를 보증해주는 존재를 다른 말로 ‘대타자’라 부른다. 대타자 부재의 문학, 결손의 문학이 바로 손창섭 문학이다. 그렇다면 손창섭 이후 문학의 과제는 ‘대타자의 설립’인 동시에 ‘주체로서의 자기 정립’이어야 한다. 70쪽


- 1960년대 문학은 두 단계 출발점을 갖게 된다. 첫 번째는 최인훈의 《광장》에서 나타난 ‘비어 있는 주체’이고, 그다음 단계는 김승옥이 탄생시킨 ‘속물’이라는 주체다. 72쪽


3장 1960년대 2: 이병주 《관부연락선》: 전혀 다른 문학의 길을 제시한 ‘한국의 발자크’ 이병주의 세계


- 이병주가 쓰는 표현인 “나에게는 조국이 없다. 오직 산하만이 있을 뿐이다.”할 때의 ‘산하’야말로 이병주 문학의 핵심이다. 이병주가 내거는 ‘산하의 허무주의’에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100쪽


4장 1960년대 3: 김승옥 《무진기행》: 순수에서 세속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포착한 현대인의 증상


- 윤희중이 무진과 함께 연상하는 것이 세 여자다. 광주역에서 만난 미친 여자, 미쳐가는 여자인 음악교사 하인숙, 자살한 술집 여자. 이 작품에서 특기할 만한 것인데 윤희중은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이 부분은 그동안 상당히 과소평가되었지만 매우 중요한 대목이라 생각한다. 윤희중은 남자이지만 무진에서의 세 여자와 마찬가지로 ‘여성화’되어 있다. 아내와의 관계에서도 결정의 주체는 아내고 (134쪽) 윤희중은 아무런 힘이 없다. (···) 윤희중이 철저하게 수동적인 객체로 그려지는 것이 이 작품의 중요한 문제성이다. 134쪽


5장 1970년대 1: 황석영 《삼포 가는 길》: 황석영은 ‘방랑자문학’을 넘어 ‘비판적 리얼리즘’에 도달했는가


6장 1970년대 2: 이청준 《당신들의 천국》: 살아 있는 권력을 겨냥했던 가장 비판적인 소설로 다시 읽기


7장 1970년대 3: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하층계급과 상층계급을 가리지 않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모순


8장 1980년대 1: 이문열 《젊은 날의 초상》: 중산층이 되려는 독자들의 열망을 자극한 이문열의 교양주의


9장 1980년대 2 : 이인성 《낯선 시간 속으로》: 아버지의 그늘을 넘어 ‘탈주’를 모색하는 실험적 소설의 탄생


- 이인성의 문학이 탄생하기까지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이인성으로부터 내려오는 한국의 베케트파 중에는 번역자들이 많다. 정영문, 배수아, 한유주 등 이 계보에 선 작가들이 있다. 이들의 작품에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는데 일단 전혀 대중적이지 않다. 대중(298쪽)적인 작품을 쓰면 그들의 리그에서 쫓겨난다. 2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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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일드 인 타임
이언 매큐언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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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매큐언 소설, 차일드 인 타임(The Child in Time), 한겨레출판, 2020


제목 속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이 소설의 영문 원제는 ‘The Child in Time’. 직역하면 ‘시간 속의 아이’. 아동소설 작가인 스티븐과 그의 아내 줄리에겐 세 살 배기 딸 케이트가 있었다. 스티븐은 마트의 계산대 주변에서 케이트를 잃어버린다. 유괴 되었는지, 사고가 발생했는지 알 수 없게 케이트는 갑자기 사라졌다. 이 핵폭탄 같은 사건이 스티븐과 줄리의 결혼생활을 부셔버렸다.


또 한 커플이 있다. 스티븐이 첫 책을 출간한 출판사의 사장이자 총리와도 가까운 고위관료 찰스와 이론 물리학자인 찰스의 아내 셀마. 찰스 부부는 갑자기 모든 지위를 버리고 런던의 다우닝가를 떠나 스코틀랜드 시골로 이주해버렸고, 찰스는 병적인 유아적 행동을 보인다. 스티븐의 케이트를 잃고 줄리와도 멀어진 채 찰스 부부, 그 중에서도 셀마와 관계를 이어나간다(성적인 관계가 아닌).


1차적으로 이 소설은 스티븐이 케이트와 줄리를 잃고 그 둘을 찾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다. 거리에서 구걸행위를 하는 어린 소녀나 총리와의 면담을 어기고 불현 듯 쫓아간 초등학교 교실에서 한 아이를 케이트과 혼동하는 장면들, 간헐적으로 줄리와 만남(섹스를 포함한)을 가지다가도 끝끝내 조금씩 멀어져가는 기미들을 느낄 수 있다.


제목으로 돌아가 이제 ‘시간 속의 그 아이’가 누구인지 생각한다. 실종된 케이트, 어린시절로 돌아간 찰스 그리고 종반부에 탄생하는 스티븐과 줄리의 새 생명.


나는 이 셋과 더불어 제목을 다르게 해석해본다.

‘The Child in Time’은 ‘시간 속의 그 아이’ 대신 ‘제 시간에 도착한 그 아이’로 해석할 수도 있다. 후자에서 그 아이는 줄리의 임박한 출산 소식을 예감하고 제 시간에 줄리에게 도달하고자 필사적으로 기관차에 오르는 등 노력을 다한 스티븐이다.


소설의 중반부에서 스티븐이 그의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이 소설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백화점 점원으로 일하다가 참전군인인 아버지와 인연을 맺은 어머니가 낙태를 고민했지만 결국은 출산을 결심한 사정, 스티븐이 우연히 그의 부모가 자주 가던 주점에서 그들이 얘기하는 장면을 환각처럼 목격한 순간, 그의 어머니도 창문 밖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스티븐임을 확신했다는 말을 하는 장면은 뭉클했다. 이 또한 ‘시간 속의 그 아이’는 스티븐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 소설은 시간에 관한 탐구이기도 하다. 셀마를 이론물리학자로 설정했고, 찰스를 어린 시절로 회귀 시킨 설정, 케이트와 새 생명과 스티븐과 줄리, 스티븐의 부모에 관한 에피소드까지 과거, 현재, 미래는 중첩되고 뒤섞이고 무화되어 독특한 미장센을 느끼게 한다. 보이는 것이 실재가 아닌 것처럼 어쩌면 우리는 지금 과거와 미래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2020년 영국이 브렉시트로 유럽연합을 탈퇴했고, 미국의 트럼프가 미국 우선주의를 주장하는 그 기저에는 1980년대의 대처와 레이건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 메모




- 그 장은 제 나름의 생명을 얻었고, 그런 연유로 스티븐은 열한 살에 사촌 누이 둘과 함께 보낸 여름휴가를 바탕으로 한 소설을 쓰게 되었다. 짧은 머리에 반바지를 입은 소년들과 머리띠를 하고 원피스 자락을 속바지에 끼워 넣은 소녀들이 등장하고, 광란의 섹스 대신 말하지 않은 갈망과 수줍게 맞잡아 깍지 낀 손이, 형광색으로 칠한 폭스바겐 버스 대신 바구니 달린 자전거가 묘사되는, 잘랄라바드가 아니라 레딩 외곽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었다. 석 달 만에 원고를 끝냈고 제목은 《레모네이드》라고 붙였다. 48-49쪽


- 그의 말을 여전히 흘려들으며 버티고 있던 클레어는 주점 건너편의 출입문 바로 옆 창문을 흘낏 쳐다보았다. “지금도 그 모습이 여기 네 모습만큼이나 또렷이 떠오르는구나. 창문에 웬 얼굴이 보였어. 어떤 아이의 얼굴이 둥실 떠 있는 것처럼. 주점 안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더라. 어쩐지 애원하는 듯한 표정이었는데, 얼굴이 어찌나 하얗던지 백지장 같더구나. 그 얼굴이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지. 그 뒤로 그 생각이 떠오르면 주점 주인의 아들이나 주변 논장의 아이였겠지 싶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확신했다, 그냥 알았어, 내가 보고 있는 게 내 아이라는 걸. 이렇게 말해도 될까 모르겠다만, 난 널 보고 있었던 거야.” 328쪽


- 셀마는 감정적인 중립 상태에 들어선 듯했다. “조화를 이 (375쪽)룰 수가 없었던 거야.” 그녀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유명해지고 싶고 언젠가 총리가 될 거라는 말도 듣고 싶은데, 세상 근심 없는 어린아이, 책임도 없고 바깥세상을 알지도 못하는 어린아이가 되고 싶기도 했던 거야. 그건 즉흥적인 괴벽이 아니었어. 그이의 사적인 시간을 장악하는 압도적인 환상이었지. 그에 대해 생각했고, 어떤 사람들이 섹스를 원하듯이 그걸 원했어. 사실, 거기에는 성적인 측면도 있었지. 반바지를 입고 가정교사로 분장한 성매매 여성에게 엉덩이를 때려달라고도 했고. (후략).”

“하지만 거기엔 그이가 스스로 이해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 힘들었던 더 중요한 정서적 측면이 있었어. 유년기의 안전, 무력함, 복종, 그리고 그에 따르는 자유, 돈이나 결정이나 계획이나 요구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원한 거지. 그이는 시간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약속과 일정과 시한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말하곤 했어. 그이에게 유년기란 시간과 무관했어. (중략) 그러는 동안에도 밖에 나가 돈을 벌고 유명해지고 어(376쪽)른들의 세상에서 수백 가지 의무를 만들어내면서 자기 생각으로부터 달아난 거야. 당신 책 《레모네이드》가 그에게는 정말로 중요했어. 자신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에게 말을 거는 책이라고 말했지. 자기 욕망에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시간이 기회를 앗아가기 전에 뭔가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고 말했어. (후략).” 377쪽


- “하지만 진전은 있었어. 케이트가 생각나도 피하지 않으려고 했어. 케이트에 대해, 그 아이를 잃은 일에 대해 우울하게 곱씹기보다는 명상하려고 했고. 여섯 달이 지나고 나니까 새로운 아이를 갖게 된다고 생각하니 위로가 되기 시작하는 거야. 그런 생각은 점점 커지긴 했지만, 너무 느렸어, 스티븐. (중략) 403쪽 그런데 이젠 곡 자체를 위해 연주했고, 새로운 아이가 태어나기를 고대했고, 당신을 생각하고 기억하며 우리가 얼마나 서로 사랑했는지 진정으로 느끼기 시작했어. (후략)” 4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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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2-07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달에 나오자마자 산 책인데
아직 펴 보지도 못하고 있네요.

사춘기의배꼽 2020-02-07 17:08   좋아요 0 | URL
중반까지는 약간 지루하다는 느낌도 있는데, 중후반 넘어가면서 앞뒤가 연결되면서 엄청 흡입력이 있네요. 강추드립니다. 영화도 개봉 중이고요. 아직 영화는 보지 못했네요.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36
김민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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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의 위악이 좋다. 시 속의 찡그린 표정의 낱말들, 그것들의 눈동자 안에 담긴 미처 숨기지 못하는 두려움, 슬픔이 좋다. 왜 아프고 무섭고 슬플수록 안 그런척, 센 척, 쿨 한 척 하지 않나.

그 낌새를, 기척을, 미묘한 떨림을 알아챌 수 있었을 때, 너도 그렇구나, 눈빛으로 머리와 이마를 쓸어줄 수 있다.



시인들 중에 청탁을 받는 사람은 소수다. 그 청탁을 받는 사람 중에 고료를 받는 사람은 극소수다. 내가 가입된 시 동인 잡지 발행인의 소개로 잡지에 시를 싣게 되어 타지의 발행인 아무개의 전화를 받았다. 나는 시단을 몰랐고, 그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던 등단 초 였기에, 그 아무개가 자신을 이름을 대면서 '나 몰라요?' 말했을 때 '죄송하지만 모르겠습니다' 대답했다. 그 아무개는 '시단에서 나 모르는 사람 별로 없는데. 신인이라 그런가. 우리 잡지 정기구독 안하죠?' 하고 물었다. 결국 여차저차 그 문예지에 시를 싣는 일은 취소되었고, 곱씹을수록 기분 나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 시집의 시들을 읽으면서 내가 겪었던 에피소드와 미처 기억하지 못했던 일들, 기억하지 못했다는 사실조차 잊었던, 내 몸 속에 침잠해 있던 것들을 길어올릴 수 있었다. 그런 것들이 시나 시 비슷한 무엇이라도 될 지는 모르겠자만, 그래서 '아름답고 쓸모 없는' 것들.





시인의 말)

나는 나의 부록.// 가장 사랑하는 것은 없다./ 많은 사랑이 있을 것이다.


- 1월 1일 일요일(-곡두 1) 9쪽


낮에는 도끼와 톱을 봤고/ 밤에는 꿩과 토끼를 봤다.// 시에다 씨발을 쓰지 않을 것이고/ 눈에다 졸라를 쓰지 않을 것이다.// 하루 종일 눈이 내렸다./ ‘머리’로 가 붙을 수 있는 제목은 다/ 덮이었다./ 더도 덮일 것이었다.// 쑥차 마시면서/ 쑥대머리 들었다.


- 시는 안 쓰고 수만 쓰는 시인들(-곡두 3)


나 알죠? 내 시 몰라요? 모르는데요. 나를? 내 시를 모른다고? 죽은 시인은 따로 있는데 장례식장에서 제가 죽은 것도 아니면서 저를 묻고 제 시를 말하는 좆같고 엿같은 사이들. 13쪽





- 수경의 점 점 점(- 곡두 22)


“빽빽하고 촘촘했던 것들이 슬쩍 의뭉하고 슬픈 것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간 듯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네가 온통 그러하더라······.” (중략) 살이 오른 꽃들에 허리 휘는 가지처럼 유연한 몸의 곡선을 섬기고 싶은데 그걸 모르겠어서 그저 눈물만 났던 오늘······ 52쪽


- 철규의 감자(-곡두 25)


철규가 거창에서 감자를 보냈다 했고/ 내가 인천에서 감자를 받았다 했다/ 그 감자의 신묘함이라 하면/ 철규가 보냈다는 그 감자를/ 처륙도 본 적이 없고/ 내가 받았다는 그 감자를/ 나도 본 적이 없는데/ 우리 서로 그 감자를 두고/ 별거 아니에요/ 별거 맞던데 뭐/ 아는 척을 마구마구 한 일// (후략) 58쪽


- 저녁녘(- 곡두 34)


1

파미르고원 배후 도시인/ 카슈가르에서 돌이 왔다./ 그 돌을 씻었다./ 얼마나 씻어야 돌은/ 다 씻었다 할 얼굴이 되는가.// 칫솔로 돌의 얼굴을 솔질한다./ 진한 흙탕이/ 그리 진하지 않은 흙탕이기까지/ 돌은 물을 먹는다/ 물은 돌로 달아난다.


2

마른 수건으로 닦은 돌을/ 새 수건 위에 올려놓는다./ 돌 씻을 때 끼고 있던/ 일곱 개쯤 되는 실반지를/ 그 돌 위에 올려보기도 하였는데/ (중략)


3

돌이 움켜쥔 물의 무게라 할 때/ 물이 뱉어낸 돌의 온도라 할 때/ 저울을 사고 온도계를 수리하는 부지런함/ 그 바지런함은 왜 쉽사리 부질없어지나. 96-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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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무를 만질 수 있을까
김숨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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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억압의 뿌리’(김숨 소설, 나는 나무를 만질 수 있을까, 문학동네, 2019)


신춘문예 등단작과 문예지 등단작 그리고 문학상 수상작을 작가가 개작한 작품집이다. 나란히 놓인 중편, 단편을 읽으니 작가의 말처럼 하나의 뿌리가 느껴진다. 깊숙이 파인 구멍 속에 손을 넣고 느낄 수 있는 최초의 감각은 촉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후각. 마치 연작 같은 ‘나는 나무를 만질 수 있을까’와 ‘뿌리 이야기’. 그리고 엄마들이 내뱉는 발화는 자연적인 발성이 아니라 뭔가 억눌리고 억압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서사보다는 이미지와 대화가 풀어내는 정서가 매력이다.


* 나는 나무를 만질 수 있을까 - 199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발표당시 제목 「느림에 대하여」)



“빠른 건······ 나무를 버리고 가는 거란다.” 12쪽

“발이 뿌리로 자라면 좋겠어요.” 14쪽 (오빠의 말)



* 뿌리 이야기 - 『작가세계』2014년 여름호




“내가 왜 여기에 있지?”


그는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나를 향하고 있었지만 질문은 그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초를 든 그의 손이 떨렸다. 그 바람에 촛농은 포도나무 뿌리를 비껴 그의 발동으로 떨어졌다.

그는 혹 한없이 더디고 긴장된 ‘점묘의 시간’을 가학처럼 즐기기 위해 촛농을 고집하는게 아닐까. 69쪽


- 자연물인 뿌리가 예술적 오브제로 승화하기 위해 거치는 통과의례들 중 가장 단순하고 의미심장한 의례를 그는 ‘못박힘’이라고 했다.

패널이라는 제한된 세계에 뿌리라는 자아를 고정시키기 위해 ‘못박힘’이라는 의식을 치르는 거야. 자아가 옴짝달싹 못하게. 82쪽


- 초등학교 삼학년 여름방학 때였어. 마당 대문 옆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화분이 내 눈에 들어왔어. 나는 일기를 쓰다 말고 마루에서 내려가 화분으로 걸어갔어. 속이 꽤 (84쪽)나 깊던 갈색화분이었어. 나는 양말을 벗고 화분 속에 두 발을 집어넣었어. 어머니가 날 보고는 나오라고 애원했지만 나는 계속 그렇게 화분 속에 두 발을 담그고 서 있었어. 내 발이 뿌리로 자랐으면 했어. 내 발이 날 아무데로도 데려가지 못하게. 85쪽



- “생의 마지막 순간에 고모할머니가 손에 꼭 그러잡고 있던 게 뭐였는지 알아? 내 손이었어. 그녀가 양로원에서 돌아가시던 밤, 그녀의 손이 내 방에 날아들어 이불을 들추고 더듬어오는 걸 나는 다 느끼고 있었어. 내 손을 찾아 더듬더듬 더듬어오는 걸······” 108쪽



* 슬픈 어항 - 1998년 문학동네신인상 수상작(발표 당시 제목 「중세의 시간」)



- “금붕어야, 아버지는 날 사랑했어. 어머니는 그것 때문에 상처를 받았지. 나는 그 벌을 받고 있는 거야.”

어머니가 모르는 게 있다. 그건 내가 아니었더라도 아버지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이다. 어머니는 내게 사랑을 빼앗겼다고 믿고 있지만, 그녀에게는 빼앗길 사랑이 없었다.

그 어느 날 밤, 날 끌어안으며 아버지가 속삭였던 것이다.

“······사랑할 수 없는 여자의 몸에서 네가 태어났을 때 나는 너무 고통스러워 네가 죽기를 바랐다. 너는 죽지 않았고, 나는 널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간혹 궁금할 때가 있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나, 둘 중 누구에게서 도망친 것인지. 1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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