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일드 인 타임
이언 매큐언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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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매큐언 소설, 차일드 인 타임(The Child in Time), 한겨레출판, 2020


제목 속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이 소설의 영문 원제는 ‘The Child in Time’. 직역하면 ‘시간 속의 아이’. 아동소설 작가인 스티븐과 그의 아내 줄리에겐 세 살 배기 딸 케이트가 있었다. 스티븐은 마트의 계산대 주변에서 케이트를 잃어버린다. 유괴 되었는지, 사고가 발생했는지 알 수 없게 케이트는 갑자기 사라졌다. 이 핵폭탄 같은 사건이 스티븐과 줄리의 결혼생활을 부셔버렸다.


또 한 커플이 있다. 스티븐이 첫 책을 출간한 출판사의 사장이자 총리와도 가까운 고위관료 찰스와 이론 물리학자인 찰스의 아내 셀마. 찰스 부부는 갑자기 모든 지위를 버리고 런던의 다우닝가를 떠나 스코틀랜드 시골로 이주해버렸고, 찰스는 병적인 유아적 행동을 보인다. 스티븐의 케이트를 잃고 줄리와도 멀어진 채 찰스 부부, 그 중에서도 셀마와 관계를 이어나간다(성적인 관계가 아닌).


1차적으로 이 소설은 스티븐이 케이트와 줄리를 잃고 그 둘을 찾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다. 거리에서 구걸행위를 하는 어린 소녀나 총리와의 면담을 어기고 불현 듯 쫓아간 초등학교 교실에서 한 아이를 케이트과 혼동하는 장면들, 간헐적으로 줄리와 만남(섹스를 포함한)을 가지다가도 끝끝내 조금씩 멀어져가는 기미들을 느낄 수 있다.


제목으로 돌아가 이제 ‘시간 속의 그 아이’가 누구인지 생각한다. 실종된 케이트, 어린시절로 돌아간 찰스 그리고 종반부에 탄생하는 스티븐과 줄리의 새 생명.


나는 이 셋과 더불어 제목을 다르게 해석해본다.

‘The Child in Time’은 ‘시간 속의 그 아이’ 대신 ‘제 시간에 도착한 그 아이’로 해석할 수도 있다. 후자에서 그 아이는 줄리의 임박한 출산 소식을 예감하고 제 시간에 줄리에게 도달하고자 필사적으로 기관차에 오르는 등 노력을 다한 스티븐이다.


소설의 중반부에서 스티븐이 그의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이 소설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백화점 점원으로 일하다가 참전군인인 아버지와 인연을 맺은 어머니가 낙태를 고민했지만 결국은 출산을 결심한 사정, 스티븐이 우연히 그의 부모가 자주 가던 주점에서 그들이 얘기하는 장면을 환각처럼 목격한 순간, 그의 어머니도 창문 밖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스티븐임을 확신했다는 말을 하는 장면은 뭉클했다. 이 또한 ‘시간 속의 그 아이’는 스티븐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 소설은 시간에 관한 탐구이기도 하다. 셀마를 이론물리학자로 설정했고, 찰스를 어린 시절로 회귀 시킨 설정, 케이트와 새 생명과 스티븐과 줄리, 스티븐의 부모에 관한 에피소드까지 과거, 현재, 미래는 중첩되고 뒤섞이고 무화되어 독특한 미장센을 느끼게 한다. 보이는 것이 실재가 아닌 것처럼 어쩌면 우리는 지금 과거와 미래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2020년 영국이 브렉시트로 유럽연합을 탈퇴했고, 미국의 트럼프가 미국 우선주의를 주장하는 그 기저에는 1980년대의 대처와 레이건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 메모




- 그 장은 제 나름의 생명을 얻었고, 그런 연유로 스티븐은 열한 살에 사촌 누이 둘과 함께 보낸 여름휴가를 바탕으로 한 소설을 쓰게 되었다. 짧은 머리에 반바지를 입은 소년들과 머리띠를 하고 원피스 자락을 속바지에 끼워 넣은 소녀들이 등장하고, 광란의 섹스 대신 말하지 않은 갈망과 수줍게 맞잡아 깍지 낀 손이, 형광색으로 칠한 폭스바겐 버스 대신 바구니 달린 자전거가 묘사되는, 잘랄라바드가 아니라 레딩 외곽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었다. 석 달 만에 원고를 끝냈고 제목은 《레모네이드》라고 붙였다. 48-49쪽


- 그의 말을 여전히 흘려들으며 버티고 있던 클레어는 주점 건너편의 출입문 바로 옆 창문을 흘낏 쳐다보았다. “지금도 그 모습이 여기 네 모습만큼이나 또렷이 떠오르는구나. 창문에 웬 얼굴이 보였어. 어떤 아이의 얼굴이 둥실 떠 있는 것처럼. 주점 안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더라. 어쩐지 애원하는 듯한 표정이었는데, 얼굴이 어찌나 하얗던지 백지장 같더구나. 그 얼굴이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지. 그 뒤로 그 생각이 떠오르면 주점 주인의 아들이나 주변 논장의 아이였겠지 싶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확신했다, 그냥 알았어, 내가 보고 있는 게 내 아이라는 걸. 이렇게 말해도 될까 모르겠다만, 난 널 보고 있었던 거야.” 328쪽


- 셀마는 감정적인 중립 상태에 들어선 듯했다. “조화를 이 (375쪽)룰 수가 없었던 거야.” 그녀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유명해지고 싶고 언젠가 총리가 될 거라는 말도 듣고 싶은데, 세상 근심 없는 어린아이, 책임도 없고 바깥세상을 알지도 못하는 어린아이가 되고 싶기도 했던 거야. 그건 즉흥적인 괴벽이 아니었어. 그이의 사적인 시간을 장악하는 압도적인 환상이었지. 그에 대해 생각했고, 어떤 사람들이 섹스를 원하듯이 그걸 원했어. 사실, 거기에는 성적인 측면도 있었지. 반바지를 입고 가정교사로 분장한 성매매 여성에게 엉덩이를 때려달라고도 했고. (후략).”

“하지만 거기엔 그이가 스스로 이해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 힘들었던 더 중요한 정서적 측면이 있었어. 유년기의 안전, 무력함, 복종, 그리고 그에 따르는 자유, 돈이나 결정이나 계획이나 요구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원한 거지. 그이는 시간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약속과 일정과 시한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말하곤 했어. 그이에게 유년기란 시간과 무관했어. (중략) 그러는 동안에도 밖에 나가 돈을 벌고 유명해지고 어(376쪽)른들의 세상에서 수백 가지 의무를 만들어내면서 자기 생각으로부터 달아난 거야. 당신 책 《레모네이드》가 그에게는 정말로 중요했어. 자신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에게 말을 거는 책이라고 말했지. 자기 욕망에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시간이 기회를 앗아가기 전에 뭔가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고 말했어. (후략).” 377쪽


- “하지만 진전은 있었어. 케이트가 생각나도 피하지 않으려고 했어. 케이트에 대해, 그 아이를 잃은 일에 대해 우울하게 곱씹기보다는 명상하려고 했고. 여섯 달이 지나고 나니까 새로운 아이를 갖게 된다고 생각하니 위로가 되기 시작하는 거야. 그런 생각은 점점 커지긴 했지만, 너무 느렸어, 스티븐. (중략) 403쪽 그런데 이젠 곡 자체를 위해 연주했고, 새로운 아이가 태어나기를 고대했고, 당신을 생각하고 기억하며 우리가 얼마나 서로 사랑했는지 진정으로 느끼기 시작했어. (후략)” 4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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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2-07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달에 나오자마자 산 책인데
아직 펴 보지도 못하고 있네요.

사춘기의배꼽 2020-02-07 17:08   좋아요 0 | URL
중반까지는 약간 지루하다는 느낌도 있는데, 중후반 넘어가면서 앞뒤가 연결되면서 엄청 흡입력이 있네요. 강추드립니다. 영화도 개봉 중이고요. 아직 영화는 보지 못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