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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나무처럼


#밤




밤나무처럼 살고 싶다. 쪼빗쪼빗 가시돋힌 밤나무는 알고 보면 부끄럼이 많다. 봄, 여름 내내 밤톨은 주둥이를 꽉 다물다가 가을이 되면 발랑까져 두 알의 심장을 내보인다. 




밤(:) 밤(night)에 먹어야 제 맛이다. 아궁이에 나뭇가지, 낙엽 쓸어담고 은근불에 구워 낸 밤을 두 조각 내어 숟가락으로 퍼먹곤 했다. 아들, 며느리 먹으라고 밤 한 상자 야무지게 포장해서 보내신 밤을 삶았다. 




"아버지가 하루 종일 주운거다. 안 썩게 부지런히 먹어라~"




호두만큼 딱딱하지 않고, 땅콩만큼 기름지지 않은 밤은 밥이 되고, 빵이 된다. 고무신 신고, 토시 끼고, 작대기로 밤톨을 까면 붉어진 두 눈망울이 보인다. 




나무에서 떨어질 때도 제 새끼 안다치게 가시 박힌 몸뚱아리를 땅에 박고, 누가 낚아챌까 낙엽 속에 숨어 엎드린 밤나무의 마음을 가슴에 담고, 밤나무처럼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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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는 대화 - 시는 가장 낮은 곳에 머문다 - 이성복 대담
이성복 지음 / 열화당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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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답은 있다 (시인 이성복 대담집, '끝나지 않는 대화' 를 읽고)

1. 정답은 있다. 오답 속에 정답이 있다. 시험지에는 오답과 정답이 섞여 있다. 오답없는 세상에는 정답도 없다. 정답만 있는 세상은 모두 오답이다. 

오답노트를 펼쳤다. 내가 틀렸던 문제들이 보인다. 맞히긴 했지만 찍었던 문제도 적어 놓았다. 객관식과 주관식은 다르다. 상대평가와 절대평가가 다르듯이. '무엇을'과 '어떻게', 내용과 형식, 개인과 사회, 사회적 현실과 보편적 인간의 문제, 물질적 삶과 내면적 삶, 통시성과 공시성, 종과 횡의 문제들로 노트를 채운다.

정답은 흔들어야 나온다. 콜라병을 한참 흔들다가 병뚜껑을 땄을 때 줄줄 흘러나오는 거품처럼 주체할 수 없이 나온다. 공기속의 질소와 탄소를 헤집고 산소를 빨아들이는 폐의 힘으로 힙겹더라도 정답을 위한 물음을 던져야 한다.

2. 정답과 오답, 그것들을 감싸는 물음을 찾기 위해 시인 이성복의 '끝나지 않는 대화'를 펼쳤다. 부제는 '시는 가장 낮은 곳에 머문다'이다. 시는 거룩하다. 정확히 말하면 시는 거룩하게 한다. 시는 자신을 낮춤으로서 상대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1980년대부터 2014년까지 여러 매체에서 시인 이성복을 인터뷰 한 내용을 모은 대담집을 읽어나가다 보면 시인의 문학과 현실을 대하는 태도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아, 입이 없는 것들'이라는 그의 시집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시인은 말할 수 없는 사물에 대해 말한다. '불가능에 대한 글쓰기인 동시에 그 자체로 불가능한 글쓰기'에 대해 말한다. 또한 '문학은 그것을 말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위가 되고, 그것을 말하면 모든 것이 스캔들이 되는 어떤 것'이라고 몇 번이나 말한다. 

질문과 대답이 철학적인 부분도 많고, 문학과 인생, 종교, 현실 등 폭넓은 주제를 다루다 보니 집중력을 유지하기가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오답 속에서 정답을 찾아가는 한 가지 길을 찾은 것 같다.


** 메모

한국시를 묘사 고백/진술 발견 으로 대별할 수 있지 않을까요?

: 묘사는 대상에의 집착입니다. 내가 공을 때리려고 덤비는 것처럼요. 묘사도 실제로는 주관적이고 직정적이고 이데올로기적입니다. 객관적 현실이 있을 수 있나요. 자기주장이지요. 고백은 반대로 대상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머리속에서 세계를 지식으로 조립합니다. 이때 세계는 방해물입니다. 여기 이 탁자는 그릇을 놓는 물건인데, 이 탁자를 돌아가려 하지 않고 치우려고 합니다. 방해물로 보는 거지요. 자의식으로 세상을 왜곡하는 겁니다. 해체주의자들의 언어 역시 자의식의 과도한 팽배일 뿐입니다. 43쪽


인위적인 예절과 교양에 가려진 원초적인 것을 보고 싶어 하는 충동이 있습니다. (소총)십자통 마개를 찾은 것과 만년필 촉을 훔친 것이 나의 원체험입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용서나 구원, 위로를 받기가 불가능한 막다른 상황, 그러니까 죽음이나 사랑 같은, 누구의 손도 잡을 수 없는 절대적 고독을 체험하고 싶어 하는 것이지요. 내 산문 전체를 엮는 문제의식이 바로 이것입니다. 58쪽


백치임신과 가상임신, 그리고 그것들의 '임신'이라는 공통분모가 바로 '물집의 세계'인거야(77쪽)


 - 가령 임신이라고 하면 우리는 축복할 일로 여기는데, 사실은 그것이 하나의 '물집'일 수도 있는 거고, 곪아서 팅팅 부어오르는 '종기'일 수도 있다는 거지요.


물집. 삶이라는 종양. "삶이란 본래/ 시골 마을 질 나쁜 젊은 녀석들이 / 백치 여자 아이를 건드려 / 애 베게 하는 것" , 그럼에도 "찔레꽃 따먹다 엉겁결에 당한 / 백치 여자 아이 "(찔레꽃 따먹다 엉겁결에 당한)처럼 언제 그랬냐는 듯 환상 속을 신나게 뛰어다니는 것. 그는 존재라는 추상을 물집이라는 구상으로 끌어내린다. 

 "끝없이 부풀고 꺼지고를 되풀이하는 암컷들의 배는 물집이었어. 그 배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생이라는 환상도, 그리고 그 속에서 잠자다 누에처럼 꿈틀거리는 너도 나도 물집인거야. 이때까지 나는 한 번도 임신이 물집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 내가 이미 임신의 물집 안에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이지. 여전히 그 속에서 꿈틀거리며 난 그 물집의 몽골 텐트를 떠받치고 있는 네 개의 기둥들을 더듬어 보았어. 노음 노양 소음 소양 사상처럼, 네 개의 'ㅅ'으로 시작되는 생 사 성 식." 105쪽


 - 시인 이성복을 '그'라고 쓰면서 나는 또 카프카를 생각한다. 카프카는 '나'라는 말을 '그'라는 말로 바꿀 수 있었던 그 순간부터, 놀라움과 기쁨을 동시에 느끼며 문학에 몰입하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라는 이 비인칭의 누군가란 바깥 세계, 개인적인 관계의 모든 가능성을 예고하고 앞지르며 또 용해시켜 버리는 바깥세계와 같다고 썼던 이는 모리스 블랑쇼였다. '나'와 '너'의 일부가 섞여 있으므로 '우리'라고도 부를 수 있을 드넓은 '그'를 이성복의 표현으로 한다면 '옆'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88쪽 (김행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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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0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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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음과 눈물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읽고)



1. 놀이공원이나 백화점에서 엄마를 잃어버린 꼬마는 울어제끼기 시작했다. 거리를 오고가는 수많은 사람 중에 내 편은 없구나, 내 편인줄 알았던 엄마가 시야에서 사라진 순간 공포는 엄습한다. 엄마가 나를 잊은걸까?

"이놈새끼, 내가 그 자리에 가만 있으라고 했지? 어? 왜 말안들어!!"



엄마는 4번타자처럼 손바닥으로 수박만한 엉덩이를 두드려 팼다. 엄마는 원심력을 몰라도 허리의 반동과 손목스냅을 사용할줄 안다. 엄마는 물리학자다. 꼬마는 또 울어재낀다. 엉덩이에 전해지는 찌릿한 고통과 엄마가 사라진 찰나 느낀 그리움, 엄마가 나를 잊지 않았고, 나는 엄마를 잃지 않았다는 안도감은 눈물에 버무려졌다. 짠맛과 쓴맛 단맛이 모두 난다.


2. 잊음은 잃음이다. 연인이 헤어질 때 흘리는 눈물을 악어의 눈물로 매도하지 말자. 상대와 함께 했던 추억의 시간들이 내 앞에선 사람의 왼쪽에서 오른쪽눈으로 지나가고 상대의 등을 보는 순간 잊음과 잊혀짐의 시간이 시작된다. 모래시계에 담긴 기억의 모래 알갱이의 숫자와 굵기만큼 사람마다 잊음의 속도는 다르다. 억지로 잊으려고 하지 말자. 과거의 끔찍한 기억의 사금파리들을 잊으려할수록 기억이 더 선명해지기도 하니까.



3. 상대를 가정한 잊음과 잊혀짐의 문제가 아닌, '나'를 잊고 잃는 문제는 차원이 다르다. 출생의 비밀과 기억상실증이 소재로 밥먹듯 등장하는 영화나 드라마의 얘기가 내 문제가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점점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됐을때, 열심히 색칠했던 물감이 벗겨지는 것을 바라보는 심정은 어떨까?

파트릭 모디아니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의 주인공은 '나'를 찾아 나섰다. 별 볼일 없는 흥신소의 탐정이라도 탐정일텐데, 계속 헛다리만 짚는다.

나는 누구일까? 기 롤랑? 페드로 멕케부아? 스테른? 하워드 드뤼즈? 프레디?

아드리아네의 실타래는 자꾸 꼬여만 간다. 
흥신소 사장이었던 '위트'가 주인공에 보낸 편지 중에 이런 말이 나온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라고 한 당신의 말은 옳았습니다.'
(183쪽)

과거를 잃은 현재는 잊혀진 과거의 또다른 얼굴이다. 마찬가지로 미래는 잊혀지고 잃어버림이 예정된 현재다. 개인이든 국가든 과거를 잊은 존재는 미래도 없다. 오래 전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나는 누구인가' '집단과 국가는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천착해 온 이유다.



4.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읽었지만 선뜻 책의 메시지가 와 닿지 않았다. 머리속은 뒤엉키고 앞 쪽에 배치된 단서들은 기억속에서 증발했다.

망각은 피할 수 없다. 다만 나는 잊혀지고 싶지 않다. 잊지 않고, 잊혀지지 않고, 잃지 않기 위해 읽는다. 기억하고 기록하고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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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여행 2 자전거여행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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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적글쓰기와 김훈(와우북페스티벌을 다녀오고 김훈의 자전거 여행2를 읽은 즈음)



1. 2015년 10월 2일 7:30 전날 이원 시인의 강연에 이어 이 날은 박수밀 작가(본인은 고전 인문학자라 불리길 원했다)의 차례였다. 주제는 '연암 박지원이 들려주는 글 짓는 법'

전날과 같은 서교예술센터에서 개최되어 5분전에 도착했다. 사전신청명단에 체크를 하는데 전날 자원봉사했던 학생이 알아봤다. "어, 어제도 오셨죠?" 매일 아침 가는 분식집에서 내가 들어서자마자 참치김밥을 내주는 아줌마말고 나를 알아봐주는 사람이 또 여기 있었다.

2. 연암 박지원, 교과서에서 배웠던 '허생전' '호질'정도만 알았지 나는 김대중 대통령 비서실장 출신 박지원 의원만큼 그를 몰랐다. 나랑 별 상관없는 사람이다. 작가는 박지원의 글쓰기를 '생태적 글쓰기'라 명명했다.

예를 들어보자. 조선시대 선비들은 '꽃'을 노래할 때 꽃의 생김새와 꽃의 향기를 노래했다. 꽃와 풀에도 등급을 나누었다. 사군자는 1,2등급으로 작은 꽃들이 옹기종기 모인 이름없는 풀은 저 밑 등급인 잡초였다. 반면 연암은 '벌레와 더듬이와 꽃술에 관심이 없는 자는 도무지 문장의 정신이 없는 것이고, 사물의 형상을 음미하지 못하는 자는 한 글자도 모른다고 말해도 상관없을 것이다(종북소선자서)'고 했다.

중요한 것은 연암은 꽃의 향기와 자태가 아니라 '꽃술'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이다. 김현 선생은 문학의 쓰임은 그 쓸모없음에 있다고 하셨다. 쓸모없는 존재인 벌레, 잡초같은 일상적 사물에 교감하는 것이 생태적 글쓰기라 했다(학계에서 작가가 아무리 주장해도 도무지 알아먹지 못한다며 푸념하면서)

3. '생태적 글쓰기'라. 말이 쉽지. 통 와닿지 않는다. 그렇지만 생태적 글쓰기를 한다고 생각하는 분은 소설가 '김훈'선생이다. '자전거여행2(문학동네)'를 읽으면서 하찮은 미물이라도 가만히 오랫동안 관찰하고 골똘히 생각하는 선생의 자세를 온전히 느꼈다.
그런 생태감을 특유의 밀고당기는 문체로 풀어나간다.

"배는 엔진의 힘으로 나아가지 않고, 저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아는 힘으로 간다. (중략) 선박은 자신의 위치를 아는 그 앎의 힘으로 나아갈 방향을 가늠한다. 내가 어디에 처해 있는지를 알아야만 나는 어디로 가는가를 알 수 있다.(28쪽)"

대나무의 삶은 두꺼워지는 삶이 아니라 단단해지는 삶이라며 담양의 대나무숲을 묘사한 부분,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과 친구였던 원효를 비교한 부분, 소설로 쓴 '남한산성'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4. 강연과 자전거여행을 관통하는 정신은 일상성과 관찰, 자연과의 교감이었다. 때로는 기신기신 일어나 눈을 비비며 한 곳과 하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리라. 그러면 뭐가 나올까 싶기도 하지만, 어느새 나는 풀과 꽃과 흙과 바람과 얘기를 나누고 있을 것이다.

‪#‎와우북페스티벌‬ ‪#‎김훈‬ ‪#‎자전거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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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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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여행의 의미(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를 읽고)

1. 제천행 기차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고등학교 동창 승택이가 오늘 장가를 간다. 제천행 직행이 다른 차편이 없어 뜻하지 않게
관광열차를 타게 됐다. 초등학교 수학여행에서나 나올법한 신형원의 개똥벌레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옆 자리에는 영어로 외국인 커플이 호박죽을 먹으며 재잘거린다.

어제도 두 군데나 결혼식에 참석했다. 10월의 어느 멋진날인 10월 3일 개천절에 결혼을 했으니 행복하게 잘 살겠지. 많은 사람들이 중앙에 대열을 이루어 사진을 찍었다.

"자자, 왼쪽 두번째 계단에 계신 남자분 옆으로 살짝. 네~ 좋구요. 박수좀 쳐주세요. 한 번 더요."

사진사가 신랑신부보다 더 흥분했는지 목청을 높인다. 하객들은 구령에 맞춰 몇 초간 미소를 머금는다. 결혼식에 참석하는 1차적 이유는 신랑신부를 축하하기 위해서다. 더불어 결혼식은 웃기 위해 간다. 오랜만에 친구,친지, 못 만났던 직장동료의 얼굴을 보고 악수하고 웃는다. 둘이서 마주보고 웃고, 다 모여 사진기 앞에서 같이 웃는다. 우리 뇌는 바보라서 진정성 없는 억지웃음이라도 건강에 좋다고 한다. 지갑은 얇아졌지만 몸에 좋다니까 보약 먹은 셈 치고 웃는다.

2. 결혼은 여행이다. 두 사람이 마주 보다가 같은 곳을 이제 같은 곳은 본다. 간과하기 쉬운 것은 같은 곳을 보는 것이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같은 집에 살고 같은 밥을 먹고 같이 이불을 덮는다고 해서 같아지는게 아니다. 비유하자면 같은 곳에 여행가서 각자 자기가 맘에 드는 곳을 둘러본 후 다시 만나 같이 숙소로 돌아가는 여행이다. 물론 같이 보고 다닐수도 있다. 강조하고 싶은 점은 결혼을 해도 개개인의 존재감은 뚜렷이 발현해야 건강한 한 묶음이 된다는 생각이다.

3. '연금술사'에서도 양치기 산티아고는 피라미드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 도중에 늙은 왕, 크리스털 상인, 영국인, 연금술사, 병사들을 만난다. '자아의 신화'를 이루고자 사막을 걷고 오아시스가 있는 마을에서 묵는다. 사막의 여자를 만난다. 다시 떠난다.
여행은 문학평론가 정여울의 말을 빌리자면 삶의 만류인력에서 벗어나 삶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라 한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지만 여행은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행을 가면 여행지에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행복해 보일수가 없다. 그건 우리가 여행자이기 때문이다. 여행자에게 여행지는 잠시 머물다가 오는 곳이다. 정류장이 삶의 터전이 되는 순간 참을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으로 다가온다.

프롤로그에 나오는 요정과 호수의 대화부터 의미심장하다.

"나르키소스가 그렇게 아름다웠나요?" 호수가 물었다.
"그대만큼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놀란 요정들이 반문했다.
"저는 지금 나르키소스를 애도하고 있지만 그가 그토록 아름답다는 건 전혀 몰랐어요. 저는 그가 제 물결 위로 얼굴을 구부릴때마다 그의 눈 속 깊은 곳에 비친 나 자신의 아름다운 영상을 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가 죽었으니, 아 이젠 그럴 수 없잖아요."

동화같은 이 책을 읽어나가면 마음으로 들을 수 있는 마음의 언어인 사랑의 의미, 하루하루의 순간 속에 영겁의 세월이 깃들여 있다(172쪽)는 깨달음에 대해 생각하게 될 것이다.

4. 작년 이 맘때 쯤 혼자 동유럽을 여행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당시 적어 놓았던 글을 다시 읽어보면서 과거가 현재로 바뀌는 연금술을 익힌다.

- 여행에게 보내는 고백편지 -

나는 너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어. 그래서 널 항상 찾아다녔지. 게시판도 보고, 티비도 보고, 라디오도 듣고. 너를 볼 수 있는 방법이라면 가리지 않았어. 너를 찾으러 작년에만 파주를 시작으로 강화도, 문경, 강릉, 제주도까지 안가본 데가 없어.

심지어 독일, 체코, 폴란드, 헝가리, 오스트리아까지 돌아보았단다. 한가지 느낀건 해외에도 정말 너를 아는 한국사람들이 많다는 사실. 나처럼 너를 만나고 싶어 안달이었지 다들.

문득 너의 조상은 누구일까 궁금해서 찾아보았어. 족보를 찾아보니 시조가 헌법 14조 거주이전의 자유더라. '국내에서의 거주이전, 국외이주와 해외여행의 자유, 국적이탈의 자유 할아버지'들이 나와 있었어. 그런데 '무국적자가 될 자유 할아버지'는 호적에서 파였는지 나와 있지 않았어. 호구조사 좀 했지.

너를 처음 만난 날을 잊을 수가 없어.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막 가슴이 설래.
처음 유럽에서 본 날이 생각나. 그땐 참 난 순진했었지. 용기가 안나서 패키지를 들고 주선자랑 같이 나갔잖아. 초가을 이었는데 날씨가 죽였지. 혼자 나갈까 생각했지만 내가 사는 곳이 아닌 데서 소개팅은 처음이었고 갑작스럽게 일정이 잡혀서 어쩔 수 없었어.

머리스타일은 동화책에 나올 법한 빨간머리로 염색한 머릿결을 휘날리면서 앉더니, 체코에 있는 체스키크롬노프 미용실에서 염색했다면서 자랑했었지. 프라하 레스토랑의 야간 조명에 비친 너의 얼굴. 그 집 요리사인 밀란 쿤데라 아저씨의 말처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을 난 느꼈어.
프라하 레스토랑에서는 매년 5월에 '프라하의 봄' 대박 할인행사를 한단 너의 말 아직도 기억나.

난, 말하다가 멈칫 하는 그 틈에서 너가 짓는 표정을 좋아해. 너만 바라 보고 있으면 머리에 있던 세포가 심장으로 우사인볼트처럼 뛰어가서 멀리뛰기하는 기분이야.

난 항상 널 보러갈 때 가방을 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여백을 들고 가. 너에게서 배운 지혜와 널 통해 건너건너 알게 된 사람들과의 추억을 한 아름 담아올 여백의 공간을. 그렇다고 내가 게으른 건 아냐. 몸이 게으른 사람은 너를 제대로 알 수 없잖아. 제한된 시간 속에서 너를 지긋이 바라보는 여유는 필요하지만, 게으름으로 몸이 늘어져 소중한 시간을 갉아 먹으면 안되니까.

나랑 넌 애초에 천생연분이었어. 나 책 좋아하는거 알지?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고 여행은 서서하는 독서다'라고 하잖아. 나는 바람구두를 신고 세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너가 나랑 결혼해줄때까지 쫓아다닐거야. 좀 섬뜩하지?

근데 말야, 이제 와서 말하는데 좋은 건지 나쁜건지 너! 돈 좀 밝히더라. 특히 해외에서 너랑 데이트 10일정도 하면 나 집에서 라면만 먹는거 알어? 쪼잔해보이겠지만 사실이 그래. 그렇지만 후회는 없어. 전혀 다른 세상을 경험했거든.

널 볼 떄면 잠시 지구의 만유인력에서 벗어나 우주선을 타고 떠나는 기분이야. 시간이 막 느려지지. 하루하루 반복된 일만 하면 금새 1년이 지나가는데 너를 만나는 순간은 시공간이 지구와 다름을 느꼈어. 말로만 듣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내가 몸소 체험할 줄이야!!

항상 너를 그리워 하고 사랑할게. 내 맘 알지?
2015년 2월 24일 밤, 송내동 골방에서.
#여행 #결혼 #연금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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