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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532
이영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9월
평점 :
시집의 굵직한 주제인 씀(기록하는 행위)과 쓸 수 없음, 죽음, (불)가능성 같은 것보다 배후에 서사가 있을 것 같은 시들이 소매를 붙잡는다.
빼곡한 나무 사이사이에서 아이들이 맨발로 뛰어다니며 까르르 웃다가 울고, 축구화도 없고 공이 없어도 아이들은 그늘이라는 녹색 그라운드(양탄자) 위에서 축구를 한다. 아무도 말하지 않아도 비밀은 입에서 입으로, 잎에서 잎으로 이슬처럼 흐르고, 이 계절이 지나면 양탄자는 돌돌 말려 어느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겠지.
너무 기가 막히고 믿기지 않으면 눈물도 흐르지 않는다. 내 눈으로 그것을 확인하고 온몸으로 부여 안지 않으면 슬픔을 시작할 수가 없다. 슬픔은 추상이 아니라 차가운 구체인 것. 4.16. 세월호 사건의 진실을 인양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 분명해 보이는 시.
불행이 가득 흩뿌려진 우물에 펜촉을 담그고 한 글자 한 글자 밤의 구전을 베껴 쓰는 행위. 기록한다는 것은 현실을 온전히 반영할 수 없는 불가능을 내재한 행위다. 쓰고, 기록한다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아픔이고 고통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멈출 수 없는 사람. 슬픔과 아픔의 마음을 생각하며 쓰고 또 쓸 수 밖에 없는 사람에 대한 시들.
* 숲의 축구 14-15쪽
숲에 가득한 건 비밀들. 아이들이 축구를 한다. 신발이 없어 울고 있으니, 발이 없는 자가 다가왔다는 페르시아 속담.// 아이들은 양탄자를 짜고 축구를 한다. 실패를 둘둘 말아서 너의 발이 멀리 날아가도록 힘껏 찰게. 붉은 실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다.// 비밀은 잎에서 잎으로 건네진다. 아이들이 발을 찬대. 공은 흐르고, 공보다 아름다운 맨발이 흐른대.// 예전에는 슬픔을 돌보았대. 눈물이 영웅이 되는 시간. 이 숲에 와서 잎사귀가 자라도록 울고 아이들은 강을 건너간다.// 경기가 끝나자 무성한 나무들이 여름을 떠나간다./ 오래된 나무 집 그늘 안으로 남은 빛이 모여든다. 이 세계에는 오로지 한 계절뿐인데, 양탄자를 짜느라 계절을 넘어가고 있다.// 아이들의 기후는 양탄자에 모여 있다. 비밀인데, 아이들은 그렇게 늙어가고 있대. 흰 눈이 내리고. 멀리 날아갔던 발들이 모여 있대.
* 슬픔을 시작할 수가 없다. 70-71쪽
슬픔을 시작할 수가 없다/ 너의 몸을 안지 않고서는/ 차갑고 투명한 살을/ 천천히, 그리고 오랫동안/ 쓸어보지 않고서는// 1년 동안/ 너는 바닷속에서 물처럼 흘러가고 있다/ 너는 심연 속에서 살처럼 흩어지고 있다/ 발이 없어서 우는 사람// 오래전부터 바다는 잠을 자고 있어서/ 죽음을 깨우지 못한대/ 너는 묘지도 없이 잠 속에서 이를 갈며 떨고 있다/ 너는 죽음을 시작할 수가 없다// 산 자들은 항상 죽은 자 주위로 모여든다고 하는데/ 우리는 슬픔도 없이 모여 있다/ 진정한 애도는 몸이 없이 시작되지 않는다// 모든 비밀은 바닷속에 잠겨 있다/ 바다에서 죽지 않는 손이 올라온다/ 그 손을 잡아끌어 올려야 한다.
* 우물의 시간 79쪽
나는 잡고 있던 너의 손을 버리고 문밖으로 나왔지. 홀로 있을 때 나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었는데 함께 있을 때 나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은 둘이 된다.// 신발을 벗고 우물을 들여다본다. 물속 깊은 그림자 속에 빠져들어 있으면 바닥이 되고 싶다. 불행은 물속으로 녹아드니까. 자신의 그림자를 죽은 자 위에 놓아두면 안된다는 옛말은 보다 아름다운 세계를 감추려는 것일지도 몰라. 우리는 잠에서 흘러나와 잠으로 가는 것이니까. // 너는 천천히 다가와 벽돌을 쌓는다. 추위에 견딜 수 있는 시간을 담고 벽은 금이 가겠지. 옛집에는 스스로 울 수 있는 흙이 숨겨져 있다고 너는 병든 내게 말했다. 진흙을 개어 우물터를 쌓던 밤이 있었다. 부드러운 한밤 깊은 곳으로 우리는 갔다. 너는 나의 손을 잡고 함께 버려지고 있었다.
* 이집트 소년 86-87쪽
아직 먼 곳으로 갈 준비가 안 되었다. 이 준비는 언제 끝날까. 만일 먼 곳에 산다면 이곳에서 죽는 일은 어렵겠지. 나는 책을 두고 갈 수가 없다. 아무런 말도 읽지 못하면서 그 말들 두고 갈 수가 없는 마음. 다정한 너는 아무것도 쓰지 않은 편지를 잘 받았다고, 무엇을 쓰지 않느라 얼룩이 잔뜩 껴 있었다고 투명한 답장을 보내주었는데. (중략) 이집트 호텔 보이는 글자를 써서 주자 울 것 같은 표정을 되었다. 모르는 사람들과 말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저는 십대 시절을 다 보냈어요. 시간이 얼른 지나가서 말도 없이 무덤덤한 노년이 오기를 바랍니다. 그런 소년에게 나는 휴가라고 써서 보여준다. 소년은 내가 내민 쪽지를 땅으로 떨어뜨린다.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외면한다. 무엇을 쓴다는 것이 고통을 줄 수도 있다면, 수많은 글자로 가득 찬 이곳에서 어떻게 마음을 써야 하는지. 모래만 가득한 먼 곳에서 금방 늙는다는 것은 무엇일지. 나는 시와 오아시스 사막에서 잠깐 동안 글자를 버리고 온 적이 있다. 사막으로 돌아가는 일은 어렵고. 이집트 소년은 사막에서 아무도 보내지 않은 편지를 읽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