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별에서 문학과지성 시인선 17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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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아침에는 희망을 노래하기 보다는 절망을 필사하는 것이 좋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은 것처럼.


책장 앞에서, 올해 처음으로 어떤 시집이 나를 끌어당길까.

무려 1981년에 출간된 김혜순 시인의 첫 시집이 1981년에 태어난

나의 세포들을 붙잡는다.


마악 2019년이라는 심해에서 해변으로 걸어나오는 우리를 반겨주는 것은

검은 시간의 모래 뿐. 모래들은 검은 비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맞아들인다. 흠뻑 비를 맞으며 검은 우산이 되어 어둑한 도로로 나오면 헤드라이트를 켜고 물벼락을 안기며 지나가는 빨간 시외버스. 차라리 물 안이 물 바깥보다 따뜻했던 걸까.

'내년엔 꼭 버스를 타리'라고 다짐하며 다시 검은 바다로 걸어들어가는 우리들의 자화상.


팽귄 수영대회에 나가듯 웃통을 까고 2020년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달려간다. 



- 새해 아침 파도 소리 55쪽

 

잘 있었소/ 지금 마악 바다를 나오는 길이오/ 우리의 귀향을 환영해 주리라 믿소/ 이제는 각각 돌아가야지/ 누군가 떨면서 말했소/ 아 오늘은 싸늘히 겨울비 내려서/ 모두 검은 우산을 썼소/ 빗물은 바닷물보다 차가와 견디기 어려운 때문이오/ 버스가 환한 불을 켜고 멈추었소/ 아무도 타지 않소/ 버스만 멈추었다가 떠나고 다시 와 멈추고 또 떠나오/ 이런 엽서가 몇 십 년째나 되는구려/ 아 또 모두들 바다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하오/ 우리들은 바다와 또 검은 악수를 나누게 될 거요/ 내년엔 꼭 버스를 타리다/ 복 많이 받기를

 


- 코페르니쿠스의 어머니 24쪽

 

알을 파는 가게에 가면/ 알을 낳아 보셨어요?/ 묻던 그 목소리 생각났지.

 

하나님의 목소리 속/ 하나님의 부끄러운 궁륭 한 덩이/ 쉬지 않고 돌려보던 내 아들이 생각났지./ 그 부끄러움 속에 뿌리박은 한 송이 민들레/ 민들레꽃 곁에 눈 감은 내 아들의 짙은 눈썹/ 그 눈썹 위에 흙은 퍼붓던 네모난 얼굴들도 생각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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