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라는 역할에 충실했던 당신에게 보내는 메시지 : 당신의 가출이 승인되었습니다!
단편소설 「가출」, 조남주

   아버지가 가출했다. 엄마의 전화를 받은 것은 퇴근길 지하철에서였다. 나는 순간 가출을 출가로 착각했다.
   "응? 아버지 절에도 안 다니잖아."
   "가출하셨다고. 가, 출. 집 나갔단 말이다."
   차라리 출가했다고 하면 믿었을 것이다. 올해 나이 일흔 둘. 치매 같은 정신 질환은 없다. 일곱 살이나 어린 아내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는 아버지. 그렇지만 엄마가 숟가락과 젓가락과 마실 물까지 완벽하게 제자리에 놓아야 식탁에 와 앉는 아버지. 정년까지 근무하는 동안 양가 부모님 장례 이외에는 한 번도 결근한 적이 없는, 삼 남매가 태어나던 날도 출근했다는 아버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다며 신용카드도 만들지 않고 자동이체도 하지 않고 인터넷뱅킹도 하지 않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가출을 했단다. 조남주, 「가출」, 61쪽

   평생 성실하게 살았던 일흔 둘의 아버지가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니. 이제라도 내 인생 살고 싶다. 나를 찾지 마라. 저축은행 160만 원은 가져간다. 미안하다.'(66쪽)는 내용의 쪽지를 남기고 가출을 했습니다. 이미 아버지는 한 달 전쯤 가출을 했지만,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부끄럽다는 이유로 뒤늦게 연락을 해왔던 것입니다. 자식들은 아버지를 찾기 위해, 더이상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 아버지 집에 모여서 밥을 먹으며 이런 저런 의견을 나눕니다. 실종 신고를 하고, 전단지를 돌리거나 흥신소를 통해 찾아보자는 식의 의견들이 나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버지가 가출한 이유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머니도 아버지가 없어서 당장 처리해야 되는 일들의 어려움을 막내딸에게 호소합니다. 사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일'이라며 여러 가지 일들을 해왔습니다. 공공기관이나 은행 업무 정도는 출근하지 않는 엄마가 해도 될텐데, 굳이 짧은 점심 시간을 이용해 처리합니다. 두 번이나 대입에 실패한 큰오빠가 대학은 포기하고 취직해서 동생들 학비를 벌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자신의 일이라며 말립니다. 회사가 어려워 몇 달째 월급이 나오지 않았을 때도, 할머니가 쓰러지셨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도 모두 아버지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이 집에는 평생 아버지가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며 도맡아온 크고 작은 일 들을 처리할 사람이 없다. 조남주, 「가출」, 72쪽

   이런 아버지가 가출하고 나니, 어머니가 해야 되는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어머니는 지금껏 한번도 하지 않은 은행 업무를 봐야하고, 공과금을 내야 합니다.
   아버지는 휴대전화도 가져가지 않았고, 경찰은 단순가출이라며 적극적으로 수사하지 않습니다. 두번째 가족회의를 마친 다음 날, 일요일 아침에 카드사로부터 승인 문자메시지가 옵니다.

   'web발신 카드 승인 4,500원 일시불 12/11 09:11 삼거리식당 누적 4,500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았던 아버지에게는 막내딸인 '나'가 쥐어준 신용카드가 한 장 있었는데, 가출하면서 그 카드를 가지고 나간 것입니다. 카드를 사용하면 '나'에게 카드사용내역이 날아온다는 것도 알고 있었던 아버지. 나는 카드 도난 신고를 할까 고민하다가 택시를 잡아타고 아버지가 카드를 사용한 곳으로 달려갑니다. 하지만 한번도 아버지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몇 차례 허탕을 친 후에는 더이상 달려가지도 않습니다.

   아버지는 허허 웃으시고는 며칠 만에 또 카드를 사용하셨다. 이번에도 분실이나 범죄가 아니라 아버지라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나에게 문자메시지가 오는 것을 알면서도 삼거리식당에서 4천 5백 원짜리 아침밥을 사 먹고 카드로 결제한 아버지. 왜그러셨을까. 조남주, 「가출」, 78쪽

   남들이 들으면 미쳤다고 하겠지만 나는 그게 아버지가 보내는 메시지인 것 같다. 나는 잘 지내고 있다. 이곳은 경치가 좋구나. 너무 걱정 마라. 엄마에게 말하지 마라. 지리산을 오르고 제주 바다를 구경하고 테이크아웃 커피를 마시며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거리를 걷는 아버지를 생각한다. 아버지 없이도 남은 가족들은 잘 살고 있다. 아버지도 가족을 떠나 잘 살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 언젠가 아버지가 다시 돌아오면 아무 일 없다는 듯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조남주, 「가출」, 85쪽   

   「가출」 속 아버지는 또다른 아버지를 연상시킵니다. 그 아버지 역시 평생 가족들을 위해 모범적으로 살다가 마흔에 집을 떠납니다. '나'의 아버지처럼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빈몸으로 집을 나갑니다. 그는 바로
『달과 6펜스』의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가출한 상황, 그들의 부재만 생각하고 그들이 가출한 이유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평생 가족들을 위해 살면서 얼마나 고단하고 외로웠을까요? '아버지'라는 역할에 충실해야 했기 때문에 내색 조차 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당신들의 '가출'을 승인합니다!

   "잘해야 삼류 이상은 되지 못한다고 해봐요. 그걸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할 가치가 있겠습니까? 다른 분야에서는 별로 뛰어나지 않아도 문제되지 않아요. 그저 보통만 되면 안락하게 살 수 있지요. 하지만 화가는 다릅니다."
   "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오.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 서머싯 몸, 「달과 6펜스」, 68~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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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11-28 1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버지가 나 잘 먹고 잘 살고 있으니
돈 워리하는 그런 메시지가 아니었을
까요.

신세대스러운 풍경이네요.

아버지의 출.가.

뒷북소녀 2018-11-30 10:49   좋아요 0 | URL
맞아요. 시그널을 보내고 있는거죠. 가끔씩.
사실 요즘 젊은 작가들... 문체가 별로여서... 안 좋아하는데...
이 작품은 좋았어요. 아무튼 젊은 작가들 중에서는 나름 연륜이 있는 작가라서 그런지.

빨강앙마 2018-11-29 1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엄마도 ㅜㅜ

뒷북소녀 2018-11-30 10:49   좋아요 0 | URL
토닥토닥! 남편분께 시그널을 보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