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호위
조해진 지음 / 창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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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생애에는 표현할 수 없는 순간이 표현되는 순간보다 훨씬 더 많다! 

   우리는 매일 사람들을 만납니다. 어떤 이들은 그저 스쳐 지나가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보다 깊은 연을 맺기도 합니다. 그렇게 살다 보면 누군가가 내 삶에 개입하기도 하고, 반대로 내가 누군가의 삶에 개입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대의 모든 이야기를 알고, 이해하고, 그의 삶에 개입하고 있는 것일까요?


   표제작인 「빛의 호위」는 영화잡지사 기자로 있는 '나'가 분쟁지역에서 보도사진을 찍는 젊은 작가 '권은'을 인터뷰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어떻게 사진에 입문하게 되었냐는 질문에 그녀는 친구가 준 필름 카메라를 접하면서 였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사실 '나'와 '그녀'는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습니다. 그녀에게 필름 카메라를 건네준 친구도 바로 '나'였습니다. 가족도 없고, 온기도 없는 가난한 방에서 겨우 버티고 있는 권은의 허기와 추위를 해결해 줄 방법이 없었던 열세살 소년 '나'는 안방 장롱에서 후지사의 필름 카메라를 발견하자마자 일말의 주저도 없이 무작정 권은에게 달려가 안겨주었던 것입니다. '나'의 눈에는 그 수입 카메라가 중고품으로 팔 수 있는 돈뭉치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권은은 '나'의 기대와는 달리 그 카메라를 팔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녀에게 카메라는 단순히 사진을 찍는 기계장치가 아니라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통로였으니까. 셔터를 누를 때 세상의 모든 구석에서 빛 무더기가 흘러나와 피사체를 감싸주는 그 마술적인 순간을 그녀는 사랑했을 테니까. 그런데, 셔터를 누른 직후 뷰파인더 속 그 빛이 한꺼번에 사라지고 나면 권은도 알마 마이어처럼 더 외로워지고 더 쓸쓸해졌을까. 사진에는 담기지 않는 프레임 밖의 풍경처럼, 그 이야기는 이제 내가 확인할 수 없는 영역 속에 있다. 「빛의 호위」 26쪽 


   인터뷰 후 권은은 또다시 분쟁지역으로 떠난다고 합니다. '나'는 그런 권은을 말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권은은 사고를 당해 다시는 사진을 찍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돌아옵니다. '나'는 그때 권은을 말리지 못했던 일 때문에 괴롭습니다. 이런 '나'에게 권은은 조용히 말합니다. 이미 '나'는 '그녀'를 한번 살린 적이 있다고 말이죠.


   그녀의 이야기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평소에는 장롱 뒤나 책상 서랍 속, 아니면 빈 병 속처럼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얄팍하게 접혀 있던 빛 무더기가 셔터를 누르는 순간 일제히 퍼져나와 피사체를 감싸주는 그 짧은 순간에 대해서라면, 사진을 찍을 때마다 다른 세계를 잠시 다녀오는 것 같은 그 황홀함에 대해서라면, 나는 이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빛의 호위」 32쪽 


   동백림 사건을 모티프로 한 「동쪽 伯의 숲」은 독일인 '발터'가 한국 시인 '희수'에게 자신의 할머니가 사랑했던 '안수 리'를 찾아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로 시작합니다. 당시 독일에서 유학 중이었던 '안수 리'는 어느 날 갑자기 독일에서 사라집니다. '안수 리'를 찾아 사방으로 헤매던 발터의 할머니 '한나' 또한 어느날 갑자기 그를 찾는 것을 중단해 버립니다.

   발터가 몇 번이나 거듭 부탁하지만 '희수'는 주저합니다. 독일을 다녀온 이후로 단 한줄의 시도 쓰지 못하고 있는데, 게다가 한나가 찾지 않았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텐데, 역사와 한 개인의 삶에 개입할 자격이 있는지 하고 말입니다.


   작가가 작품 이외의 다른 채널로 말을 거는 게 합당한 건지 알 수 없었고, 그리 유명하지도 않고 작품활동도 하지 않는 내가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도 되는 것인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현실을 외면하는 것도, 그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것도, 심지어 뛰어들어간 뒤 적당한 자세를 잡지 못한 채 엉거주춤 서 있는 것도, 모조리 가식 같기만 했다.

   최근에 내가 택한 방법은 나의 자격을 의심하는 것이다. 내가 살아온 과정이 대단할 것도 없고 떳떳하지도 않은데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이 나 아닌 다른 이의 고통을 대변하며 잿빛 거리에 서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나의 자격을 되묻는 반복은 발터, 법도 정의도 상식도 통하지 않는 이 세상 한곳에 나만의 의식적 함몰구역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작은 웅덩이 같은 그곳은 안온하고 평화롭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웅크려앉아 있어도 되는 것이다. 「동쪽 伯의 숲」 97~98쪽 


   이효석문학상 수상작인 「산책자의 행복」에서는 대학에서 철학과 강사로 있다가 편의점 파트타이머로 일하게 된 '미영'의 이야기를 통해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이론과 내가 직접 겪는 현실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 보여줍니다.


   라오슈라면 분명 이런 조언을 해주겠지요. 전진하려 했으나 장벽에 부딪혀 돌아온 허무와 애초부터 전진을 시도하지 않은 고정된 허무는 다르다고, 일상과 감정의 반복 속에서 스스로 실존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요. 라오슈가 학생들에게 자주 했던 말이죠. 「산책자의 행복」 119쪽


   하나의 세계는 끝났다. 그렇게 생각했다. 이를테면 불행이란 진실을 사유하는 데 필요한 관념으로만 존재하던, 혹은 진정한 행복을 완성하는 부속품이라고 여기던 세계는 단단하게 셔터를 내린 것이다. 입과 거주지를 국가에 의탁해야 하는 세계, 수치심은 사치가 되고 무엇이든 표현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자유는 최후의 보루조차 될 수 없는 세계, 그녀 앞에 새로 펼쳐진 세계는 그런 곳이었다. 「산책자의 행복」 120~121쪽

   가능성은 실패하고 좌절할 확률과 비례한다는 의미니까, 어떤 실패와 좌절은 또다른 가능성에 가닿는 사다리가 되지 못하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직선의 통로가 되기도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므로. 「산책자의 행복」 122쪽


   생존은 스스로 해결하되 세상이 인정하고 우대해주는 직업에 연연하지 말라고, 눈 가린 말들처럼 정해진 트랙을 달릴 필요 없다고, 종강 즈음이면 한 학기를 정리하며 그녀는 학생들에게 말하곤 했다. 속된 세계로의 편입을 선택하지 않는 자유를 지키는 한 어떤 형태의 가난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킬 수 있다고도 했다. 그렇게 말할 때 그녀는 늘 확신에 차 있었고 그 말의 무게를 책임질 준비도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에게 남은 선생으로서의 마지막 말은 존재와 신념을 모두 부인하는 배교자의 언어였다. 「산책자의 행복」 124~125쪽

   철학과가 없어져 일자리를 잃고, 아픈 어머니의 병원비 때문에 빚만 잔뜩 가지고 있는 '미영'은 그녀의 학생들에게 들려줬던 이야기와는 다른 생각으로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학생들에게는 직업에 연연해 하지 말라고 했으면서, 편의점 파트타이머로 일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 한다. 한때는 "죽음은 구체적인 단절이 아니라 존재를 완성하고 성숙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추상적인 과정"(130쪽)이라며 매혹된 적도 있었으면서, 정작 죽음이 눈앞에 닥치자 살고 싶어한다. 그리고 유난히 '미영'을 따랐던 학생 '메이린'에게 묻는다.


   사는 게 원래 이토록 무서운 거니, 메이린? 「산책자의 행복」 125쪽

   『빛의 호위』는 2013년부터 2016년 봄까지 작가 조해진이 쓴 9편의 단편소설을 모아놓은 것으로, 누군가의 삶에 개입하고 있는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등장합니다.


   어떤 이야기도 한 사람을 대신할 수 없다. 한 사람의 생애에는 표현할 수 없는 순간이 표현되는 순간보다 훨씬 더 많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야기 너머로 뻗어가는 지평에 수많은 문장과 생각과 감정이 흩어졌다가 모이면 하나의 작은 길이 되어가는 상상은, 언제나 두려울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작가의 말」, 266쪽


   그녀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결코 그 모든 순간들을 표현할 수 없다고 말이죠. 마찬가지로 우리도 누군가의 삶을 모두 알고,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의 삶에 개입하게 되더라도 이것만은 잊지 말아주세요.

 

2017. 03. 05.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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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과 강철의 숲
미야시타 나츠 지음, 이소담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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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해하지 말고 차근차근! 양과 강철의 숲으로!


   숲 냄새가 났다. 가을, 밤에 가까운 시간의 숲, 바람이 나무를 흔들어 나뭇잎이 바스락바스락 우는 소리를 냈다. 밤이 되기 시작한 시간의 숲 냄새.

   문제는 이 근처에 숲 같은 게 없다는 것이다. 건조한 가을 냄새를 맡았는데, 옅은 어둠이 내려앉는 기색까지 느껴졌는데, 나는 고등학교 체육관 구석에 서 있었다. 방과 후, 사람 없는 체육관에서 누군가를 안내하는 심부름을 떠맡은 일개 학생이 되어 오도카니 서 있었다.

   눈앞에 크고 새까만 피아노가 있었다. 크고 새까만 피아노였을 것이다. 피아노 뚜껑은 열려 있었고 그 옆에 한 남성이 서 있었다. 아무 말도 못 하는 나를 그 사람이 힐끔 쳐다보았다. 그가 피아노 건반을 몇 군데 두드리자, 뚜껑이 열린 숲에서 나무들이 흔들리는 냄새가 났다. 밤이 흐르고 있었고 나는 열일곱 살이었다. (7~8쪽)


   울긋불긋한 숲 속에 피아노 한 대가 놓여져 있습니다. 이곳이 『양과 강철의 숲』일까요? 책을 펼치자마자 숲 냄새가 물씬 풍겨 옵니다. 그런데 어디에도 숲 같은 건 없습니다. 다만 피아노 건반을 몇 군데 두드리자 숲에서 나무들이 흔들리는 냄새가 났다고 합니다. 숲은 그렇다 치더라도 도대체 강철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건반은 총 여든여덟 개가 있고 각각의 건반에 한 줄부터 세 줄까지 현이 연결되어 있다. 강철 현이 똑바로 뻗고 그 현을 때리는 해머가 마치 목련 봉오리처럼 가지런히 놓여 있는 광경을 볼 때마다 등이 꼿꼿하게 퍼졌다. 조화를 이룬 숲은 아름답다. (25쪽)


   피아노는 양털로 만든 해머가 강철로 만든 현을 때려 내는 소리가 어우러져 음악이 되는 악기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피아노 자체가 '양과 강철의 숲'인 셈인거죠.

   체육관에서 처음으로 피아노 조율사가 낸 소리를 들은 열일곱 살 소년 도무라는 그 역시 피아노 조율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조율사 이타도리의 소개로 졸업 후 조율사 육성 전문학교에 들어간 도무라는 2년 후 이타도리가 일하는 악기점에서 함께 일하게 됩니다. 그런데 2년 동안 조율 기술을 배우고 취직을 했지만 좀처럼 그의 기술은 늘지가 않고 제자리걸음만 할 뿐입니다. 그런 그에게 이타도리는 이렇게 조언합니다.


   "초조해하면 안 됩니다. 차근차근, 차근차근입니다." (21쪽)

   "차근차근 수비하고 차근차근 히트 앤드 런입니다." (22쪽)

   "홈런을 노리면 안 됩니다." (23쪽)


   이제 막 일을 시작했는데, 몇 년을 일한 선배들처럼 조율기술이 쑥쑥 좋아질거란 기대 자체가 욕심일지도 모릅니다. 이타도리의 조언처럼 차근차근 때리고 달리다 보면 실력이 늘겠죠? 그런데 사실 도무라에겐 한가지 걱정이 더 있습니다.


   "전에 있던 사람도 조율사 양성 학교를 제대로 졸업하긴 했어. 역시 적성에 맞고 안 맞고는 있는 거야."

   적성이라고 간단하게 말해버리면 곤란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적성에 맞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자 두려웠다. (23쪽)


   이 소설에서도 언급하지만 흔히들 '1만시간의 법칙'이라고 해서 누구라도 같은 일에 1만시간을 투자하면 잘 할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1만시간을 투자 했는데도 자신의 적성과 맞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적성이 맞지 않는데도 1만시간을 투자하면 잘 할 수 있게 될까요? 그저 잘하기만 하고 끝내 좋아하지 못하게 된다면 또 어떨까요?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도무라와 같은 두려움이 밀려와 한참동안 책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정말 1만시간을 투자하면 재능이나 적성은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일까요?


   조율사가 되겠다고 다짐했을 때의 기쁨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아무 보장도 없으면서 갑자기 눈앞의 안개가 걷힌 것만 같은, 처음으로 내 두 발로 땅을 박차고 걷는 것과도 같은, 손으로 어떤 윤곽을 더듬는 것 같은 기쁨. 그때, 이제부터 어디까지든 걸어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어디까지든 걸어서 나아가야 한다. (220쪽)


   이런 두려움들이 있지만 도무라는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처음 조율사가 되겠다고 다짐했을 때도 조율사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답답함이 해소되었고, 기쁨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양과 강철의 숲』에는 각자의 방식으로 조율사의 역할을 소화해내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큰 사건이나 갈등없이 잔잔하게 이야기가 흘러갑니다. 마치 소설 속에서 언급되는 하라 다미키의 문장처럼 말이죠.


'밝고 조용하고 맑고 그리운 문체, 조금은 응석을 부리는 것 같으면서 엄격하고 깊은 것을 담고 있는 문체, 꿈처럼 아름답지만 현실처럼 분명한 문체.' (168쪽)


   소설이 끝날 때까지 도무라는 조금씩 성장하고 있습니다. 1만시간이 지난 뒤에 혹은 10년이 지난 뒤에 도무라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지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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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째서 이토록 - 사랑에 관한 거의 모든 고민에 답하다
곽정은 지음 / 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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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리는 괜찮을 거예요!

   우리는 간혹 이런 뉴스를 접하곤 합니다. "평소에는 조용했는데. 이웃들에게 잘했는데." 강력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의 주변인들 인터뷰를 보면 꼭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가깝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은 잘 몰랐던거죠.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우리는 그 다양한 사람들을 결코 잘 알지 못할겁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사람들의 생각이나 행동을 어떤 패턴 안에 넣고 설명하려고 하는 방식을 싫어합니다. 사람들의 심리를 이야기하는 책들도 좋아하지 않고, 이게 '답'이라고 던지는 방식도 싫어합니다.

   '사랑에 관한 거의 모든 고민에 답하다'라는 부제가 붙은 곽정은의 『우리는 어째서 이토록』을 보고 이 사람은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거의 모든 고민에' 답한다고 하는걸까? 약간의 반감을 가지고 책을 읽기 시작한 건 사실입니다.


   『우리는 어째서 이토록』에는 남녀 사이에 생길 수 있는 다양한 사례들이 실려 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사람, 술만 안 마시면 최고인 남자친구를 가진 여자, 사회적 이슈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커플, 바람 피운 남자친구를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인 여자... 이런 고민들에 곽정은이 조언을 하는 형식 입니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소개된 사례들을 단순히 남녀 간의 사랑에만 국한시켜 읽지는 않았습니다. 그랬다면 분명 지루했을테고, 본전 생각까지 났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에 소개된 사례들은 모든 인간관계에서도 똑같이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며, 조언 또한 그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시킬 수 있는 것들입니다.


   갑자기 그 사람이 당신에게 뚜벅뚜벅 걸어와 "당신 맘이 뭔지 알아요. 오늘부터 사귑시다"라고 말해오는 일 같은 건 절대 절대 일어나지 않아요. 먼저 손 내미는 사람은 거절당하는 위험을 무릅써야 하지만, 이대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그 편이 낫지 않을까요? (63쪽)


   상대방에게 좋아하는 티를 냈지만 상대방의 마음을 알 수 없어서 고민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녀 말처럼 어느날 갑자기 상대방이 다가와서 먼저 손 내미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겁니다. 죽을 때까지 멀리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게 아니라면 거절 당할 것을 무릅쓰고라도 먼저 다가가야 합니다. 이것은 다른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저는 이런 상황일 때 그냥 무조건 고백했어요. 마음을 확실히 표현해주지도 않는 사람에게 내 감정을 저당잡힌채로 사는 것이 답답하고 싫었으니까요. 그가 먼저 표현해주기를 기다리기에는 내 시간이 너무 아까웠으니까요. 어차피 나를 만날 의사가 없는 남자라면, 굳이 나도 목맬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잠시 자존심이 상할지라도,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으면 꼭 이 사람에게 선택받진 않아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227쪽)


    남녀 관계 뿐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서 약자가 되지 않으려면, 스스로를 자책하거나 상대방 탓도 하지 않았으면, 거절 당할까봐 두려워하지 말고 먼저 손을 내밀어 보길, '싫다'는 부정적인 말보다는 '이렇게 하면 더 좋겠다'는 긍정적인 말로 바꿔보길, 결국 답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걸 잊지 말길, 그녀는 당부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다보면 그녀의 자신감이 어디서부터 비롯됐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녀처럼 모든 사람들이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해지길 바랍니다. 나 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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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에 살고 싶은 섬 하나
김도헌 지음, 이병률 사진 / 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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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여기가 바로 천국입니까? 

   그는 남태평양의 어느 섬나라 미크로네시아의 작은 섬, 추크에서 살고 있습니다. 원주민 여자를 만나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습니다. 마을에 모든 불이 꺼지면 별빛과 달빛만이 밤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곳, 맑고 투명한 에메랄드빛 바다가 지천인 곳, 그가 살고 있는 섬은 바로 그런 곳입니다.

   그래서 미크로네시아 추크 섬에 정착해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한 남자의 이야기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헷갈립니다. 아무래도 행복한 이야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는 그곳에서도, 이곳에서도 정착하지 못한채 괴로워하는 이방인처럼 보입니다. 그곳이 진심으로 좋아서가 아니라 마치 세상 끝에 있는 섬으로 도망친 것처럼 보입니다. 여전히 지난 사랑과 상실에 괴로워하면서 말이죠. 내가 기대했던 내용은 잘 알지 못하는 곳에서 벌어지는 즐겁고 재미난 일들이었는데, 누군가의 아픔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킴, 여기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이제는 한국보다 더 편하지 않아? 물론 쇼핑몰이나 스타벅스 같은 건 없지만 여기선 그런 것들이 필요 없잖아. 네가 살던 곳은 너무 복잡하고 매정한 세상이야. 제도를 앞세워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인간미를 말살하는 그런 데보다는 여기가 낫지 않겠어?"


   "개인의 삶을 놓고 본다면 여기가 훨씬 인간적이고 따듯하지. 한국이라는 숨막히는 데에선 한 인간이 불합리하게 억압받고, 가진 자들이 교묘한 방법으로 없는 자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하며 이용하지. 그렇지만 내가 이곳에 살면서 견딜 수 없는 것은, 다른 거야. 너희들의 그 몰염치함. 평소에는 타인들을 잘 배려하고 친절하지만 너희들 자존심에 조금이라도 상처가 나면 극단적이고 폭력적으로 반응하는 모습. 난 그런 게 견디기 힘들어. 물론 내가 너희 풍습이나 예절에 서툴러 실수할 때도 있지만 그건 너희들이 자본주의 체제에 전혀 익숙하지 않아 오해를 해서 그런 거지, 절대로 내가 너희를 무시하거나 존중하지 않아서 그러는 것은 아니야. 아무 설명 없이 갑자기 폭력적으로 반응할 때 나로서는 난감하고 화가 날 때가 많아. 평소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그렇게 돌변하면 배신감까지 느껴." (30~31쪽)


   그렇다면 그가 살고 있는 '추크'는 어떤 곳일까요? 원래 추크는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지만, 몇 년 전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소개돼 알려지기 시작한 곳입니다. 2차세계대전 때 추크는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고, 일본 제국의 해군 기지이기도 했습니다. 아직도 추크 곳곳에는 일본이 조성한 2차세계대전 위령비와 전쟁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중국에서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영해의 크기가 태평양에서 두번째이며 전세계 참치의 60퍼센트가 이곳에서 잡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저 세상 끝에 있는 조용한 섬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가 봅니다.


   이곳에서 함께 일하던 파트너를 읽고난 후 그는 상당히 괴로워했지만 현지인들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섭니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그는 관상어 사업을 시작하기로 합니다. 그가 보낸 관상어 샘플이 마음에 들었던 한국의 한 사업가를 그를 찾아갑니다.


   "여기가 바로 천국이다. 좋은 데서 사네. 부럽다."

   "사장님, 천국은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천국이 아닙니다. 그냥 일상일 뿐이죠. 천국은 나그네들이나 느낄 수 있는 거겠죠."

   "그런가. 김 사장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네. 그래, 천국은 나그네들만 느낄 수 있겠지. 그러면 김 사장은 나그네가 아니라는 말인가?" (132쪽)


   그의 질문에 '킴'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합니다. 그에게도 그곳이 일상이었을까요? 아니면 천국이었을까요? 하지만 지금쯤 그는 이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천국 같은 곳이 그에게도 '일상'이 된 것처럼 보이니까요. 그렇다면 또다른 질문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늘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데, 그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지고 싶어집니다.


   "걱정하지 마. 사랑할 때 사랑하지 못하고. 지나간 다음에 사랑하고 후회하고. 그러면서 사는 거지. 그렇지 않아?"

   "사람 사는 게 다 어긋남의 연속인데. 엇갈리고 어긋나고. 그리고 후회하고. 그렇게 사는 거지." (232~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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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 - 소설가 박완서 대담집
김승희 외 지음, 호원숙 엮음 / 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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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제가 당신을 참 많이도 오해했습니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난지 벌써 5년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은 여전히 읽히고 있고,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남아 그를 추억하고 있습니다. 그의 5주기를 맞아 맏딸 호원숙이 대담집 『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을 엮어냈습니다. 이 대담집은 1980년부터 2010년까지 사람들이 그와 나눈 이야기를 묶은 것으로, 소설가 김연수와 정이현, 평론가 신형철, 한겨레신문 문화부 선임기자 최재봉 등 다양한 사람들이 그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을 읽으면서 나는 '우리'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아끼고 존경했던 박완서 작가지만, 내가 그의 작품을 아끼고 열심히 읽었던 적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지나가면서, 우연히 몇 편을 읽긴 했지만 오롯이 그의 작품을 읽기 위해 읽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읽다보니, 잘 알지도 못하는 '오해'로 그의 작품을 아껴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읽지 않은 사람이, 다른 사람이 쓴 잘못된 평론을 그대로 옮겨 평한 것도 본적이 있다고 합니다. 나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몇 편 읽어보지도 않았으면서 지레 짐작해 버리고 멀리했습니다. 그의 글은 말랑말랑하기는 하겠지만, 날카롭고 뽀족한 것이 숨어있지는 않을거라 생각했습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대와는 다른 시대를 산, 그래서 늘 자극적이고 기발한 이야기를 찾는 내게는 고리타분하거나 지루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말들은 『너무도 쓸쓸한 당신』을 냈을 때도 들었던 말이에요. 그 책에서는 이번보다 늙은이들 얘기를 더 많이 썼었지요. 그래서 저는 내 작품들은 노년층에서 많이 보겠거니 하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어디선가 조사한 것을 보니 제 책을 가장 많이 사는 세대들이 이삼십대라는 겁니다. 깜짝 놀랐지요. "정말이에요? 정말이에요?" 하고 여러 번 되물어봤습니다. (163쪽)


   이삼십대들이 그의 소설을 아주 재미있게 읽는다고 합니다. 오히려 그 윗세대들에게는 '다소 불편할 정도로 냉정한 소설'(162쪽)을 쓰기도 했습니다.


   선생님한테는 사늘함이 있어요. 서늘한데 따뜻한. 따뜻한 것은 오래 남는 모양새라서 알겠는데 그 따뜻한 사늘함은 유리병에 저장된 채로 진하고 또 진해요. 그 병을 들이켜면 속이 후련해지는 것이죠. 그것이 아직도 우리가 당신 소설을 읽는 이유이며, 아직 우리 옆에 당신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맞아요. 건배를 할 때마다 매번 그러셨어요. "행복하자!" 사늘한 말투였어요. 그럴 때마다 행복의 감각은 폐부를 휘감았더랬습니다. 자신을 찌르지 않으면 무엇도 자기 것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211쪽)


   시인 이병률은 그를 사늘하다고 기억합니다. 서늘한데 따뜻하다. 늘 따뜻하게 웃고 있는 표정이라 그의 글도 마냥 그렇기만 할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나 봅니다. 그를 아끼는 많은 사람들은 그의 글이 따뜻하면서도 어딘가에는 날카롭고 냉정한 것이 도사리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라는 게 결국은 동시대인과 소통하고 싶어서가 아니겠어요? 모두에게 다 통하는 언어를 쓰고 있다는 건 좋은 일이죠. 주인공이 노인이건 젊은이건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건 언어라고 생각해요. (166쪽)


   그는 끊임없이 동시대인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소통하려고 노력했는데, 무작정 귀를 닫아버린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이 큽니다. 그와 동시대인으로 살며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긴 했지만, 지금이라도 그와의 대화를 시도해 보아야겠습니다.d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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