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과 강철의 숲
미야시타 나츠 지음, 이소담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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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해하지 말고 차근차근! 양과 강철의 숲으로!


   숲 냄새가 났다. 가을, 밤에 가까운 시간의 숲, 바람이 나무를 흔들어 나뭇잎이 바스락바스락 우는 소리를 냈다. 밤이 되기 시작한 시간의 숲 냄새.

   문제는 이 근처에 숲 같은 게 없다는 것이다. 건조한 가을 냄새를 맡았는데, 옅은 어둠이 내려앉는 기색까지 느껴졌는데, 나는 고등학교 체육관 구석에 서 있었다. 방과 후, 사람 없는 체육관에서 누군가를 안내하는 심부름을 떠맡은 일개 학생이 되어 오도카니 서 있었다.

   눈앞에 크고 새까만 피아노가 있었다. 크고 새까만 피아노였을 것이다. 피아노 뚜껑은 열려 있었고 그 옆에 한 남성이 서 있었다. 아무 말도 못 하는 나를 그 사람이 힐끔 쳐다보았다. 그가 피아노 건반을 몇 군데 두드리자, 뚜껑이 열린 숲에서 나무들이 흔들리는 냄새가 났다. 밤이 흐르고 있었고 나는 열일곱 살이었다. (7~8쪽)


   울긋불긋한 숲 속에 피아노 한 대가 놓여져 있습니다. 이곳이 『양과 강철의 숲』일까요? 책을 펼치자마자 숲 냄새가 물씬 풍겨 옵니다. 그런데 어디에도 숲 같은 건 없습니다. 다만 피아노 건반을 몇 군데 두드리자 숲에서 나무들이 흔들리는 냄새가 났다고 합니다. 숲은 그렇다 치더라도 도대체 강철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건반은 총 여든여덟 개가 있고 각각의 건반에 한 줄부터 세 줄까지 현이 연결되어 있다. 강철 현이 똑바로 뻗고 그 현을 때리는 해머가 마치 목련 봉오리처럼 가지런히 놓여 있는 광경을 볼 때마다 등이 꼿꼿하게 퍼졌다. 조화를 이룬 숲은 아름답다. (25쪽)


   피아노는 양털로 만든 해머가 강철로 만든 현을 때려 내는 소리가 어우러져 음악이 되는 악기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피아노 자체가 '양과 강철의 숲'인 셈인거죠.

   체육관에서 처음으로 피아노 조율사가 낸 소리를 들은 열일곱 살 소년 도무라는 그 역시 피아노 조율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조율사 이타도리의 소개로 졸업 후 조율사 육성 전문학교에 들어간 도무라는 2년 후 이타도리가 일하는 악기점에서 함께 일하게 됩니다. 그런데 2년 동안 조율 기술을 배우고 취직을 했지만 좀처럼 그의 기술은 늘지가 않고 제자리걸음만 할 뿐입니다. 그런 그에게 이타도리는 이렇게 조언합니다.


   "초조해하면 안 됩니다. 차근차근, 차근차근입니다." (21쪽)

   "차근차근 수비하고 차근차근 히트 앤드 런입니다." (22쪽)

   "홈런을 노리면 안 됩니다." (23쪽)


   이제 막 일을 시작했는데, 몇 년을 일한 선배들처럼 조율기술이 쑥쑥 좋아질거란 기대 자체가 욕심일지도 모릅니다. 이타도리의 조언처럼 차근차근 때리고 달리다 보면 실력이 늘겠죠? 그런데 사실 도무라에겐 한가지 걱정이 더 있습니다.


   "전에 있던 사람도 조율사 양성 학교를 제대로 졸업하긴 했어. 역시 적성에 맞고 안 맞고는 있는 거야."

   적성이라고 간단하게 말해버리면 곤란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적성에 맞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자 두려웠다. (23쪽)


   이 소설에서도 언급하지만 흔히들 '1만시간의 법칙'이라고 해서 누구라도 같은 일에 1만시간을 투자하면 잘 할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1만시간을 투자 했는데도 자신의 적성과 맞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적성이 맞지 않는데도 1만시간을 투자하면 잘 할 수 있게 될까요? 그저 잘하기만 하고 끝내 좋아하지 못하게 된다면 또 어떨까요?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도무라와 같은 두려움이 밀려와 한참동안 책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정말 1만시간을 투자하면 재능이나 적성은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일까요?


   조율사가 되겠다고 다짐했을 때의 기쁨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아무 보장도 없으면서 갑자기 눈앞의 안개가 걷힌 것만 같은, 처음으로 내 두 발로 땅을 박차고 걷는 것과도 같은, 손으로 어떤 윤곽을 더듬는 것 같은 기쁨. 그때, 이제부터 어디까지든 걸어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어디까지든 걸어서 나아가야 한다. (220쪽)


   이런 두려움들이 있지만 도무라는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처음 조율사가 되겠다고 다짐했을 때도 조율사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답답함이 해소되었고, 기쁨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양과 강철의 숲』에는 각자의 방식으로 조율사의 역할을 소화해내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큰 사건이나 갈등없이 잔잔하게 이야기가 흘러갑니다. 마치 소설 속에서 언급되는 하라 다미키의 문장처럼 말이죠.


'밝고 조용하고 맑고 그리운 문체, 조금은 응석을 부리는 것 같으면서 엄격하고 깊은 것을 담고 있는 문체, 꿈처럼 아름답지만 현실처럼 분명한 문체.' (168쪽)


   소설이 끝날 때까지 도무라는 조금씩 성장하고 있습니다. 1만시간이 지난 뒤에 혹은 10년이 지난 뒤에 도무라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지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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