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심령학자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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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곳에도 기록된 적 없다면, 그 시절을 살았었던 혼령에게라도 물어봅시다!
   그 어떤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아서 알 수 없는 역사 속 사건이 있다면, 조금 오싹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이런 방법은 어떨까요? 그 역사 속에서 실제로 살았지만 지금은 죽어서 혼령이 된 존재를 불러내어 물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 존재가 입은 옷차림만 잘 분석해도 민속학적인 자료가 되지 않을까요?
   고고심령학이란, 고고학 연구에 도움이 되는 심령현상들을 과학적으로 측정해 역사 연구의 끊어진 고리를 연결해주는 학문입니다. 예를 들면, 수백 수천 년 전의 혼령을 불러내어 관찰한 뒤 그 혼령이 살았던 시대의 생활양식이나 그들이 사용했던 오래된 언어들을 고증하는 것이죠. 고증을 토대로 이루어져야 하는 학문인 고고학에서 심령현상의 도움을 받는다고 하니 다소 아이러니하기는 하지만 기발한 방법인 것 같기는 합니다.

   소백산 천문대에는 이렇게 고고학을 연구하는 고고심령학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문인지 박사와 그의 제자, 조은수. 그곳에서 그들은 고대에 살았던 아이 혼령을 불러내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문인지 박사가 갑자기 죽고 나자 더 이상 아이 혼령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은수는 혹시 박사의 죽음에 아이 혼령이 관여한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의심을 하기 시작합니다.
   산속 천문대에 있던 은수를 서울로 불러낸 것은 서울 한복판에 난데없이 출몰한 거대한 성벽입니다. 이 성벽은 실제로 볼 수 있거나 어떤 관측 장비로 찍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곳에 거대한 성벽이 있었다고 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마치 막다른 길에 다다른 것처럼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사람들은 성벽과 마주쳤을 때는 성벽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다가 그것을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성벽이 출현한 밤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매사에 냉철하고 좀처럼 감정 기복이 없던 은수조차 성벽에 가로막혔을 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막막해서 좌절하고 주저앉고 맙니다.
   은수는 문인지 박사와 친분이 있었던 스위스 학자 한나 파키노티에게 힌트를 얻어 성벽이 나타날 때는 항상 코끼리와 눈이 함께 있었다는 걸 발견하고, 이른바 '혼령 3종 세트'를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고고심령학'은 어디에도 없는, 배명훈 작가가 만들어 낸 학문입니다. 더운 계절에, 이렇게 오싹한 상상력을 발휘해줘서 박수라도 쳐주고 싶을 지경인데 끝을 향해 갈수록 아쉬움이 더 많이 남는 소설입니다. 시작은 SF를 표방하며 장대했으나 끝은 동화로 마무리된 것 같은 느낌입니다. 소재와 전개는 좋았는데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뜬금없고 물음표를 던지게 만듭니다.
   게다가 작가는 꽤 불친절한 편입니다. 해마다 문인지 박사가 이끌고 있는 이 고고심령학과에는 '조은수'라는 이름의 학생이 들어왔따고 하는데, 왜 '조은수'여야만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이렇게 설명 없이 설정된 부분이 몇 군데 있습니다. 

   메모지를 든 발굴 전문가나 훈련된 고고심령학자가 일반인 목격자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같은 것을 보더라도 전혀 다른 것들을 읽어낼 수 있는 안목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하나였다. 그 밑바탕은 물론 공부였다. 역사학, 인류학, 언어학, 건축학, 종교학, 그리고 때로는 미술사나 공학까지도. 170쪽

   이것은 저와 같은 의문을 가진 독자들에게 작가가 던지는 변명 같습니다. 우리 같은 독자들은 똑같은 힌트를 두고도 알아차리지 못하겠지만, 고고심령학자들은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고,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뜬금없어 보이더라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말입니다.

   이 소설은 우리가 가지고 있던 편견을 깨게 해줍니다. SF 소설, 과학소설이라고 하면 으레 공상과학이나 사이버 같은 환경을 상상하곤 하는데 그런 SF가 아니라는 사실. 또, 등장인물들에 중성적인 이름을 적용해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게 해놓았습니다. 흔히, 고고학 같은 학문을 연구한다면 우리는 으레 남자라고 생각하기 마련인데, 이 소설에 등장하는 과학자들은, 특히 중성적인 이름을 가진 과학자들은 모두 여자라는 사실. 유일하게 처음부터 성별을 알 수 있었던 이한철 대표는 문인지 박사나 조은수와는 달리 고고심령학을 돈벌이에 이용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아무리 작은 천체망원경을 들여다보는 천문학자라도 어느 밤 권태에 지쳐 그 일을 함부로 내팽개쳐서는 안 됐다. 그가 보지 않으면 인류 전체를 통틀어 그 별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을지 모른다. 하필 그 순간 그 천체가 무슨 특별한 신호를 발산하기라도 한다면, 불운하게도 인류는 그 신호를 놓치고 마는 셈이다. 33~34쪽

   『고고심령학자』를 읽으면서 가장 좋았던 부분입니다. 권태에 지쳐 함부로 내팽개쳐서는 안되는 일. 이 문장을 여러 일에 적용해 볼 수 있겠지만, 오늘은 책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어느 날 권태에 지쳐 함부로 내팽개쳐 둔 책 속에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간 축에는 경사가 져 있었다. 시간은 한쪽으로만 흐르는 강이었고, 그 위에 놓인 존재는 누구나 시간 여행을 할 수 있었지만 그 방향이 한쪽으로만 정해져 있었다. 과거로는 갈 수 없고, 미래 쪽으로는 누구나 느린 속도로 흘러가게 되어 있는 여행. 1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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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으려나 서점
요시타케 신스케 지음, 고향옥 옮김 / 온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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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책을 갖고 있습니다!
   사라졌던 작은 서점들이 동네마다 하나 둘씩 생겨나고 있어서 '책방투어' 다니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비슷해 보이는 대형 서점들과 달리 저마다의 특색을 가지고 있는 작은 서점들은 아기자기한 멋까지 있어서 사진 찍기에도 좋습니다. 저 또한 그런 사람들 중 한 사람으로, 구석구석 구경한 다음에는 책 한 권, 혹은 그 서점만의 특색있는 굿즈를 사서 서점 문을 나섭니다. 그것이 작은 서점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있으려나 서점』은 대형 서점 진열장에서도 여러번 봤지만, 꼭 동네책방에서 사야할 것 같아서 주저했던 책입니다. 우연히 들른 '캣왕성 유랑책방'이라는 이동 책방에서 이 책을 발견하자마자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바로 지갑을 열었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지나칠 수 없는 제목의 책이니까요.

 

   이 서점은 어느 마을의 한 귀퉁이에 있는 작은 서점입니다. 이 서점을 찾는 손님들은 정말 있으려나 싶은, 이상하고 신기한 책들을 찾습니다. 여느 서점들처럼 손님이 이 책 저 책들을 직접 살펴보며 고르는 게 아니라 이 서점에 들어온 손님들은 일단 주인 아저씨에게 어떤 것에 대한 책이 있는지 물어봅니다. 그러면 주인 아저씨는 물론 있다며, 어떤 것에 대해 쓰여져 있는 책들을 한 권씩 한 권씩 소개해주고 손님들은 그 중에서 책을 고릅니다.


   둘이서 읽는 책,
   달빛 아래에서만 볼 수 있는 책,
   책축제,
   서점 결혼식,
   상상력 릴레이,
   세계 일주 독서 여행,
   책이 내리는 마을,
   표지 리커버 기계,
   독서 이력 수사관,
   책 제목과 적절한 진열법,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책과 같은 존재,
   베스트셀러가 되길 바랐던 책... 등.

   차례 속 책장에 꾲혀 있는 책들이 모두 이 서점에서 손님들이 찾았던 책들인데 온갖 기발하고 이상한 책들이 많습니다. 실제로 있었으면 하는 책들도 있고 한번쯤 해보고 싶은 것들도 있는데, 여기서 중요한 건 베스트셀러를 만드는 비법을 담은 책은 이 서점에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책과 같은 존재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스토리가 있지만 언뜻 봐서는 그 속내를 알 수 없습니다.
   늘 누군가가 발견해 주기를 기다리고, 늘 누군가가 안을 들여다봐 주기를 바랍니다.
   인기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지만 좋은 만남이 있으면 누군가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줍니다.
   좋은 만남이 있으면 누군가와 빛나는 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습니다.
   부피가 늘어가고 무거워집니다. 불에 약하고 물에도 약합니다. 금세 빛바래고 구깃구깃해집니다.
   물체로서의 한계 수명은 있지만 그 정신은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은 보이지 않는, 앞으로 나올 새로운 책이 세계를 두텁게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책을 좋아하는 겁니다. 78~79

   이 서점 책장에 꽂혀 있는 책만큼, 세상에는 다양하고 이상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책을 펼쳐보기 전에는 그 책이 어떤 책인지 알 수 없듯이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이야기로 책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책과 같은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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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8-16 1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특색 있는 동네 책방의 부활
정말 환영할 만한 소식이네요.

문제는 말로만 이러고 동네책방
출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 멀고 딱히 살 것도 -
신간들은 죄다 도서관이나 온라인
서점에서 주문해서 읽고 있으니.

현실과 이상 사이의 변하지 않는
괴리네요.

목나무 2018-08-16 18: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 카페에서 읽다가 혼자 엄청 키득키득했어^^
책 이야기로 그렇게나 기분이 좋아지다니~~^^
 
칼자국 소설의 첫 만남 10
김애란 지음, 정수지 그림 / 창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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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품절


누군가의 허기를 감당한다는 것에 대하여!
   어머니는 이십여 년간 국수를 팔아 '나'를 포함한 가족들을 먹여 살렸습니다. 가게 이름은 '맛나당'이었는데, 누군가 제과저믈 하다 망한 것을 인수해 간판 조차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칼국수 가게는 시골서 여자가 소자본으로 쉽게 차릴 수 있는 일이었고, 어머니의 칼국수 맛은 훌륭해서 장사가 잘되는 편이었습니다. 그런 어머니 덕분에 '나'는 서울에 있는 사립대학교에 붙어 혼자 세를 얻어 살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처음으로 혼자 살게 된 딸의 살림을 직접 챙겨주고 골라줍니다.
   반면, 아버지는 무능력하고 무기력합니다. 술을 마시고, 화투를 치고, 다른 여자를 만나고, 심지어 어머니가 사용하는 부엌칼을 들고 나와 죽겠다며 한밤중에 자살 소동까지 벌입니다.

   어머니의 칼끝에는 평생 누군가를 거둬 먹인 사람의 무심함이 서려 있다. 어머니는 내게 우는 여자도, 화장하는 여자도, 순종하는 여자도 아닌 칼을 쥔 여자였다. 건강하고 아름답지만 정장을 입고도 어묵을 우적우적 먹는, 그러면서도 자신이 음식을 우적우적 씹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촌부. 어머니는 칼 하나를 이십오 년 넘게 써 왔다. 얼추 내 나이와 비슷한 세월이다. 7~8쪽

   그렇게 강했던 어머니인데, 어느날 부엌에서 국수를 삶다 뇌졸증으로 쓰러집니다. '나'는 갑작스럽게 들려온 어머니의 부음 소식을 듣고 어머니의 삶을 되돌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나'의 구석구석에 어머니의 손길이 깃들지 않은 부분이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누군가의 순수한 허기, 순수한 식욕을 다른 누군가가 수십 년간 감당해 왔다는 사실이 이상하고 놀라웠던 까닭이다. 51쪽

   김애란 작가의 소설에는 아버지가 부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늘 강인한 어머니가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작가의 어머니 영향이 큰듯 합니다. 작가의 어머니도 국수 가게를 하며 작가를 키워냈습니다. 또한, 저마다 형식은 다르겠지만 우리의 어머니들도 이런 모습일 겁니다. 평생 가족의 허기와 식욕을 책임지고 달래주려고 분주하게 움직였던 어머니의 모습이 말입니다.

   어린 시절 저는 제 어머니가 오랫동안 꾸린 국수 가게에서 먹고, 자고, 자랐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 둘걸. 그땐 왜 제 주위의 많은 것들이 어느 날 사라질 수도 있다는 걸 생각지 못했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건 그곳을 이렇게 소설로나마 남겨 놓아 이따금 제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거예요. 책이라는 통로를 만나, 나 말고 이제 다른 사람도 그 안에 초대할 수 있다는 게 기쁘고 놀랍습니다. 언제나 그리고 여전히요. 83쪽, 「작가의 말」 

   책과 멀어진 친구들이 다시 책과 친해져 조금 더 폭넓은 책의 세계로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획된 <소설의 첫 만남> 시리즈. 우선 제가 좋아하는 김애란 작가의 단편소설이 예쁜 그림 옷을 걸쳐 입고 나와서 반가웠고, 책 혹은 소설과 소원한 친구들이 읽기에 딱 좋은 소설이 선택되어 또 반가웠습니다.
   비록 어린 나이에 등단해 꽤 오랫동안 "최연소"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녔지만, 그녀의 문장들은 요즘 젊은 작가들이 쓰는 문장들과는 결이 다릅니다. 초심자들도 쉽게 읽을 수 있고, 한국소설의 멋은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정갈하게 다듬어진 문장. 이 작품을 읽고나면 분명 침이 고이는 그녀의 또다른 작품들을 읽고 싶어질 것입니다.
   참고로, 이 단편소설은 2007년에 그녀가 발표한 소설집 『침이 고인다』에 실려있는 작품들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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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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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왕자』, 『파리의 우울』 등 선생이 번역한 여러 권의 책들을 읽으면서 선생이 쓴 산문집도 조만간 읽어봐야겠다고 다짐만 한 것이 벌써 몇 해째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다가 선생의 부고 소식을 듣고는 더이상 미뤄둬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선생의 산문집을 집어 들었습니다.

   『밤이 선생이다』는 문학평론가이자 불문학자인 황현산 선생이 처음으로 엮어낸 산문집입니다. 1980년대부터 2013년까지 무려 삼십여 년에 걸쳐 쓴 글이지만, 그의 어조와 문체는 한결같이 단정하고 균형 잡힌 시선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국어학자 이수열 선생은 꽤 오랫동안 저명인사들이 신문 지면에 발표한 글을 읽고 우리말의 어법에 어긋난다고 생각되는 구절이 있으면 빨간 펜으로 수정해 글을 쓴 사람에게 우편으로 보내주곤 했었습니다. 황현산 선생 또한 몇 장의 편지를 받았지만, 선생은 이수열 선생이 지향하는 '순결주의'에 전적으로 찬동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나로서는 뿌리가 없고 본디의 결에 거슬리는 말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관용으로 굳어졌으면 그것을 새로운 뿌리로 삼아야 한다고 믿는 편이다. 어떤 표현법이 일어나 영어에서 연유한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의 언중에게 그 표현이 큰 무리 없이 이해된다면 이미 우리말 속에 그 표현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들어 있었던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선생이 지향하는 순결주의가 말의 표현력을 적지않게 억압하고 있다는 생각도 접어두기 어렵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대명사 '그'를 여기서만이라도 써보지 않겠다고 작정하고 있지만 사실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선생의 충고를 일일이 따를 수가 없다.
   (……) 말에 관한 한 나는 현실주의자이지만, 선생의 순결주의 같은 든든한 의지처가 있어야 현실주의도 용을 쓴다. 선생의 깊은 지식과 열정은 우리말의 소금이다. 이 소금이 너무 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고쳐 생각한다. 소금이 짜지 않으면 그것을 어찌 소금이라 하겠는가. 247~248쪽

   선생은 이수열 선생의 '순결주의'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이수열 선생의 충고를 잊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저 또한 이 글에서만이라도 영어식 대명사를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요즘 젊은 작가들의 소설들을 읽다보면, 그들의 단어 선택이 거슬릴 때가 많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들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표현이겠지만, 굳이 신조어나 외국어까지 끌어다가 쓸 필요가 있었을지 의문일 때가 많습니다. 가끔은 어려운 한자어가 아닌 이런 단어들 때문에 사전을 들춰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글로 쓰여졌지만 불편하고 잘 읽혀지지 않는 글들.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사람들의 글이 이 지경이라는게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반면, 황현산 선생의 글들은 읽기에는 평이하고 문체는 정직하며 문장은 유려합니다. 자신의 생각들을 바르고 고운 우리말로, 정직하지만 담백하게 담아냈습니다. 너무 술술 읽혀서 아까울 정도입니다.

   "낮에 잃은 것을, 밤이여, 돌려다오" 220쪽

   괴테가 쓴 『파우스트』에 나오는 유명한 한 구절입니다.

   여기서 낮이 이성의 시간이라면 밤은 상상력의 시간이다. 낮이 사회적 자아의 세계라면 밤은 창조적 자아의 시간이다. 220쪽

   밤은 상상력의 시간이고, 창조적 자아의 시간입니다. 낮은 분주해서 상상을 하거나 창조적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습니다. 주어진 시간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빠듯한게 낮이라면, 밤에는 그런 것들을 만회할 수 있는 시간이 있습니다. 밤은 낮동안 우리가 행했던 일들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는 좋은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밤은 선생입니다.

   밤입니다. 이제 선생을 맞이할 시간입니다. 선생이 쓴 글을 읽으며 생각을 정리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천년 전에도, 수수만년 전에도, 사람들이 어두운 밤마다 꾸고 있었을 이 꿈을 아직도 우리가 안타깝게 꾸고 있다.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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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와 거품의 역사 - 돈이 지배한 광기와 욕망의 드라마
안재성 지음 / 을유문화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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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폐와 은행은 국가가 보장하는 대국민 사기다!
   우리는 왜 한낱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지폐를 이토록 맹신할까요? 우리는 왜 돈을 은행에 맡길 때보다 빌릴 때 더 많은 이자를 줘야 할까요?


   괴테의 『파우스트』에는 국가 재정이 거덜 나 고민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 '악마의 꾀'를 불어넣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등장합니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황제에게 '종이 한 장은 1천 크로네'에 해당한다는 포고령을 내리라고 말합니다. 황제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제안을 "터무니없는 사기극"이라며 거절하지만,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게 되자 그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말그대로 '악마의 유혹'이었을 뿐입니다. 막대한 양의 지폐가 발행되자마자 거덜났던 국가 재정도 회복되고 경기도 살아나는 것 같았지만, 이내 지폐의 가치가 떨어져 부동산을 비롯한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아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맹신하는 지폐에는 금화나 은화와는 달리, 가치 통화로서의 기능만 있을 뿐 지폐 자체에는 가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쪼개거나 부수거나 녹여도, 혹은 국가가 망해도 가치는 그대로인 금화나 은화와는 달리, 지폐는 훼손되거나 국가가 망하면 그냥 쓰레기 조각이 되어버립니다. 그걸 알면서도 우리는 이 종이 쪼가리를 맹신합니다. 왜냐하면 정부가 한낱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지폐를, 나라가 망하고 나면 10원짜리 구리값보다 못한 지폐를 '돈'이라 칭하며 믿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당연히 돈이라고 여기면서 생활하는 1만원 짜리나 5만 원짜리 지폐, 이를 '돈'이라 칭하는 것 자체가 사기란 지적이다. 14쪽

   어쩌면 과거의 인류가 지폐를 잘 모르는 게 아니라 현대인들이 지폐의 문제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정부에 의해 "이 종이쪽지는 돈이다"고 세뇌 당한 채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16쪽

   지폐는 '가짜 돈'이며, 이를 '진짜 돈'이라고 우기는 신용통화 시스템은 그 자체가 일종의 거대한 사기극이라 할 수 있다. 지폐는 돈에 꼭 필요한 상품 통화로서의 기능이 결여돼 있기에 매우 위험하고 불안정하다. 그럼에도 인류가 이 방향으로 온 것은 그것 외에 다른 선택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지구상에 금과 은의 양은 한정돼 있으며, 또한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 특정 국가에 너무 쏠려있다. 193쪽

  
정부는 시민들을 속여 그들의 손에 실질 가치가 액면가보다 훨씬 떨어지는 지폐를 쥐어 준 뒤 대신 액면가만큼의 금은을 약탈해 갔다. 무기가 아닌, 법과 지혜를 악용해 벌이는 세련된 약탈이었다. 196쪽


은행은 왜 우리가 '예금'한 돈으로 이자놀이를 할까?

   "우리 서로 필요할 때 돈을 빌려주자. 단, 네가 부담해야 하는 금리는 나보다 조금 높게 하자" (101쪽)

   만약에 지인이 이런 식으로 제안을 했다면 우리는 가차없이 '사기꾼' 혹은 '도둑놈'이라고 화를 냈을 것입니다. 은행은 '예금'이라는 명목으로 우리의 돈을 적은 이자를 주고 빌려가서 쓰고는, 우리에게 빌린 돈을 다른 사람에게 빌려줄 때는 더 큰 이자를 받고 빌려줍니다. 즉, 자기 돈도 아닌 돈을 가지고 이자놀이를 해서 돈을 버는 셈입니다. 이런 금리 차를 '예대마진'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은행의 핵심 수익원입니다. 정부는 '부분 지급 준비금 제도'라고 해서 은행이 고객의 예금 중 일부만 금고에 넣어둔 채 나머지는 대출이나 투자 등으로 돌리는 것을 합법적으로 허용해 주기까지 합니다. 어차피 보이지 않기 때문에, 심지어 '예금'된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빌려주기도 합니다. 실제로 은행 금고에 넣어둔 돈이 얼마되지 않음을 눈치챈 소비자들이 한꺼번에 은행으로 몰려가 예금을 인출하려고 하면 '뱅크런'이 발생합니다. 보통 지급 준비율은 7% 정도이기 때문에 그 많은 예금자들이 한꺼번에 인출하면 은행에는 지급할 돈이 당연히 없게 마련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은 고귀한 가치 때문이 아니라 증세 때문에 일어난 것!
   우리 인간들은 '돈'이라고 지칭하는 수단이 없으면 아무런 활동을 할 수 없습니다. 수많은 전쟁들도 결국 돈이 있어야 하고, 혁명을 뒷받침해 주는 것도 결국 돈입니다. 비록 제목은 『풍요와 거품의 역사』지만 그것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도 마찬가지였다. 자유, 평등, 박애 등 고귀한 말은 단지 겉포장으로 붙인 수사였을 뿐이다. 실제 원인은 '돈'이었다. 정확히는 '증세 논란'이, "세금을 늘려야 하나?"와 "늘린다면, 누가 부담해야 하나?"를 두고 벌어진 다툼이 혁명으로 연결된 것이다. 180쪽

   인류 역사를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은 시대를 불문하고 언제나 돈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시민들이 자유, 박애, 평등이라는 고귀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일어났다고 믿고 있는 프랑스대혁명 또한 주된 원인은 '돈'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크게 성직자로 구성된 제1계급, 귀족으로 구성된 제2계급, 시민으로 구성된 제3계급으로 계급이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이중 성직자와 귀족들은 세금을 내지 않는 면세 특권을 누렸고, 가난한 시민들은 세금을 낼 돈이 없었습니다. 결국 제3계급인 시민들 중에서도 부유한 시민들인 부르주아들이 세금을 감당해 내고 있었는데, 당시 재정 상황이 좋지 않았던 프랑스가 증세에 나선 것입니다.
   화가 난 부르주아들은 자유, 박애, 평등이라는 고귀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직자나 귀족들도 내지 않는 세금을 더 내기 싫어서 가난한 시민들을 선동했습니다. 자신들의 혁명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재정 상황이 좋지 않아서 그 어느 왕보다 검소하게 생활할 수 밖에 없었던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사치가 심해서 나라가 어렵다는 헛소문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어라고 했다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말도 부르주아들이 꾸며낸 것이라고 합니다.
   역대 왕들은 '지폐'를 발행해 사기를 칠 지언정, '증세'는 가급적이면 피하고자 했습니다. '증세'는 이처럼 반란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루이 16세는 그토록 많은 왕들이 피하고자 했던 '증세' 정책을 선택한 죄로 왕의 자리에서 내쳐지고, 목까지 내쳐졌던 것입니다.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이 권력 획득을 위해 선동한 상퀼로트보다 오히려 루이 16세를 비롯한 상류층에게 더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188쪽

   프랑스대혁명 당시 앞에 서서 시민들을 이끌었던 부르주아들 또한 가난한 시민 계급보다는 특권을 누리고 있는 상류층에게 더 큰 동질감을 느꼈고, 자신들도 그런 특권을 누리고 싶어했습니다. 원래 인간의 본성이란 그런 것인가 봅니다.

   인간의 본성은 매우 자본주의적이다. 사실 인간은 평등 따위는 바라지 않는다. 세상에 나보다 잘나고 부유한 자와의 평등을 외치는 사람은 많다. 그런데 나보다 못나고 가난한 자와의 평등을 원하는 인간이 있던가? 모든 인간은 평등이 아닌 격차를, 그것도 내가 위에 올라서는 격차를 원한다. 남보다 더 성공하고,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강력한 권력을 누리고 싶어 한다. 그 열망이야말로 인간에게 제일 강력한 동기를 부여한다. 249쪽

   이 세상의 부는 모든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살기에 충분하지만, 부자의 욕심을 채우기에는 부족하다. 47쪽

   자본에는 국격이 없고, 자본가들에게는 애국심도, 고결함도 없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이익뿐이다. 88쪽


금융 정책에 관심은 있지만 잘 모르는 당신에게!
   『풍요와 거품의 역사』는 지폐의 탄생에서부터 시작해 은행, 주식을 거쳐 비트코인까지 광범위한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금융 시스템을 이해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됩니다. 예를들면, 예대마진이나 뱅크런, 부분 지급 준비금 제도, 서브 프라임, 비트코인까지 쉽게 이해할 수 없었던 경제나 금융 용어들도 역사 속에서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 연원을 알고나면 머리에 쏙쏙 들어옵니다.
   또한, 역사는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사실.

   경제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의 우리도 증세와 복지의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나라가 파탄에 이르지 않고, 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까지 받을 수 있는 정책을 잘 만들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모든 인간들의 본성에는 자본주의적인 마음이 자리하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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