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나라 - 성폭력 생존자와 가해자가 함께 써내려간 기적의 대화
토르디스 엘바.톰 스트레인저 지음, 권가비 옮김 / 책세상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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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1996년 11월 16일 남자 친구의 생일 파티에서 시작됐다. 16살이었던 아이슬란드 토르디스는 교환 학생으로 호주에서 온 18살 톰에게 강간당했다. 당시 그녀는 술에 취해 있었고, 톰과는 연인 사이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강간임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9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녀는 고통 받으며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2005년 그녀는 불현 듯 가해자 톰에게 메일을 보냈다. 그로부터 8년간 둘은 300여 통의 메일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만나자는 제안을 읽고 쓰러질 뻔 했다고 고백할 게. 무섭고, 걱정되고, 조심스럽고, 미칠 것 같고, 그런 감정들이 물밀 듯이 밀려...”(48쪽)

그러던 와중 토르디스의 눈에 또 다른 강간 사건이 눈에 들어왔다. 2007년 4월 레이캬비크의 한 호텔에서 일어난 강간 사건이 대서특필되었다. 열아홉 살 소녀가 모르는 남자에게 화장실 가는 길을 물었다가 따라 들어온 그 남자에게 강간당했다. 법원은 소녀가 힘껏 저항하지 않았다고 탓하며,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토르디스는 가해자의 무죄 방면에 분노했다. 평결을 비난하는 공개서한을 작성하다가 할 말이 너무 많아서 270페이지짜리 책을 냈다. 그리고 1996년 자신이 당한 이야기를 책에 솔직히 고백했다.

두 사람은 남아공 케이프타운 일주일 동안 직접 대면하기로 했다. 케이프타운은 '강간의 도시'라 불릴 만큼 성범죄율이 높은 곳이자, 넬슨 만델라가 보여준 ‘용서와 화해’를 상징하는 도시다.

2013년 3월 28일 5시 둘은 케이프타운 리츠 호텔 로비에서 만났다. 어색한 분위기도 잠시 그들은 서로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이제 토르디스는 서른 셋, 톰은 서른 다섯이 되었다. 토드리스는 다정한 남편 비디르를 만나 아이들을 낳았고, 톰은 아직 싱글이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재회했을 때 그 심정은 어떠했을까? (2016년 TED 강연 모습)

 

 

그녀는 ‘용서의 나라’에 관한 이야기를 여기저기 언급한다. 가령 남아공 국립미술관에서 토지법이 통과된 이후 100년간의 역사를 다룬 사진전이라든가 만델라가 갇혀 있었던 로벤 섬 투어 이야기 그리고 브라이스 코트니의 파워 오브 원을 원작으로 한 영화 이야기 등등.  둘은 무자비한 인종주의를 고발하는 사진과 현장 속에서 사람에게 딱지를 붙인다는 게 얼마나 비인간적인 일인지 몸소 체험하며 치유와 화해의 시간으로 들어선다.

과연 피해자와 가해자 두 사람이 16년 만에 재회했을 때 그 심정은 어떠했을까? 책에는 두 사람의 솔직한 감정에 대한 고백이 주거니 받거니 이어진다. 대부분의 스토리는 토르디스가 직접 썼고, 톰은 일기 형식으로 답한다.

 

 

 

“나는 누가 적인지도 모르는 채 세상과 전쟁을 벌였다. 누군가를 믿고 비밀을 털어놓지 못했기 문에 나는 내적 불만을 글로 쏟아냈다. 일기가 시가 되고, 다시 희곡이 되었다. 얼마 안 되어 나는 극작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내 목구멍에 얹혀 있던 말들을 거침없이 뱉어내는 인물을 창조하는 일이 내게는 해방이나 다름 없었다.”(23쪽)

 

 

토르디스는 용서를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이렇게 생각한다. “용서가 유일한 길이야. 그가 용서를 받을 자격이 있든 없든 나는 평화를 누릴 자격이 있으니까.”(49쪽) 그리고 말한다. “그토록이나 나를 좀먹어온 과거와 똑바로 대면할 용기를 주셔서 감사합니다.”(75쪽)

그녀의 용서는 무조건적이거나 종교적인 용서나 사건을 잊고 덮으려는 행동이 아니라, 트라우마가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기도 했다. 톰 역시 자신의 과오를 제대로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같은 범죄가 재발하지 않도록 세상을 바꿔나가는 일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것까지 ‘용서를 받을 자격’을 갖추려 노력했다.
 

 

 

 

한편 두 사람은 2016년 ‘강간과 화해에 관한 우리의 이야기(Our story of rape and reconciliation)’라는 주제로 TED 강연에 나섰다. 그들의 이야기는 조회수 90만을 넘어섰다.

필립 로스는 『휴먼 스테인』에서 자신의 농담이 인종차별적 언행으로 고발되어 고통 받는 노교수 콜먼 실크의 이야기를 통해 사회적 낙인이 얼마나 인간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지 잘 보여주었다. 토르디스와 톰의 이야기 역시 가해자와 피해자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에서 벗어나 치유와 화해의 길이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 토르디스가 먼저 내민 용서의 손길은 무척 감동적이다. 단지 한 여인의 온정이라고 치부하기에는 큰 용기가 필요했으리라. 일찍이 만델라가 보여준 용서와 화해의 위대한 여정과도 같은 담대함이 깃들지 않았으면 가능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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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삶의 철학
엠리스 웨스타콧 지음, 노윤기 옮김 / 책세상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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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군 외산면 반포마을에 가면 유홍준 선생의 별장 「휴휴당(休休堂)」이 있다. 이 곳은 선생이 평일(5일간)은 도시에서 보내고 주말(2일간)은 내려와 재충전하겠다는 5도 2촌의 철학을 담고 있다. 별장은 한 칸 짜리 방과 부엌으로 된 소박하기 그지 없는 곳이다.

아산시 배방읍 중리에는 조선 초기 명재상이자 청백리로 이름 높았던 고불 맹사성의 생가 「맹씨행단」이 있다. 고불 선생은 평소 말이나 가마가 아닌 검은 소를 타고 다녔다한다. 마을 아이들로부터 소가 괴롭힘을 당하는 게 안쓰러워 구해준 게 인연이 됐다. 2017년 6월 건너 편에 「고불 맹사성 기념관」이 개관했다. 이 곳은 고불 선생의 일대기와 유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검은 소 모형도 들여놨다 하니 언제 한 번 방문해 볼 일이다.

이렇듯 소박하고 검소한 삶은 오늘날 현대를 사는 뭇 사람들이 꿈꾸는 안식이 될 수 있을까? 이 같은 질문에 철학적인 사색을 곁들여 진지하게 답변을 내놓은 책이 나왔다. 

엠리스 웨스타콧 뉴욕 알프레드대 철학과 교수는 2002년부터 '1달러로 만드는 하루의 행복'이라는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그는 소박함을 체계적으로 규명하고자 이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소박함을 논의하기 위해 단순함이라든지 단순한 삶의 개념을 포괄했다. 고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개념들은 종종 구분 없이 사용되었고, 대체로 지혜와 덕, 행복 등의 가치가 내포됐다.

 

 저자 엠리스 웨스타콧(Emrys Westacott) 교수

 

이 책은 모두 7장으로 구성됐다. 1장에서 소박함(frugality)과 단순함(simplicity)의 의미에 대해 살펴본다. 2장에서 누구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명제, 단순한 삶이 인간의 도덕적인 성향을 강화하는 가에 대한 주요 논쟁들을 검토한다.

3장에서 또 다른 논쟁거리인 단순한 삶과 행복의 관계에 대해 살펴본다. 4장에서 소박함이 초래할 수 있는 위험성과 함께 부와 욕망이 가져오는 긍정적인 측면을 짚어본다. 5장에서 사치스러운 삶이 가져오는 순기능에 대해 탐구한다. 6장에서 소박함의 철학이 매우 시대착오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점에 대해 고찰한다. 마지막 7장에서 소박하고 단순한 삶이 미래의 환경적인 재앙을 막아줄 수 있다는 주장 일반론과 그에 대한 반론들을 검토해본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사회경제적 지위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부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유혹한다. 시장을 끝없이 팽창시키기 위해 우리의 욕망과 소비를 부추긴다. 가령 데이비드 흄은 사회적 효용에 근거하여 인간의 욕망을 덕과 악덕으로 구분하면서 소비주의를 옹호했다. "상품의 증가와 소비는 삶에 광채를 더하고 즐거움을 제공해 사회에 이득이 된다."

 

"소박한 삶에 도덕성이 배어 나온다는 말은 일리가 있어 보인다. 단순한 삶을 선택한다는 것은 적어도 역사적으로 흔히 나타난 위선의 한 형태, 즉 사치스러운 삶을 살면서 가난을 찬미하는 위선을 보일 가능성을 없애준다. 더욱이 사치하고 낭비하는 일에 관심없는 이들은 부정부패에 연루될 가능성이 적다. 살 것이 별로 없으니 큰돈을 벌겠다는 동기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단순한 삶을 실천하면 후원자에 대한 의존을 덜게 된다. 새뮤얼 존슨은 금전적 후원에 대해 "비굴함을 지불하고 오만함을 지급받는 몹쓸 짓"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때문에 그는 청렴하게 자존감을 지키며 사는 삶이 훨씬 쉽다고 주장했다." - 91~92쪽

 

저자는 우리가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필요에 따라 우리의 욕망에 제한을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과도한 욕심이 탐욕을 낳는다, 지나친 과소비를 하는 사람은 신중하지 못한 지출로 피해를 입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 비난 마저 받는다. 이에 반해 단순한 삶은 삶의 충만함에 이를 수 있게 해 주며, 이는 곧 지혜로운 삶이라는 것이다.

말미에 저자는 정부는 단순한 삶을 누리고자 하는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도록 노력할 것을 제언한다. 그 방법론으로 첫째 저렴한 비용으로 음식과 주택, 의료, 보육, 교육, 대중교통 등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취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둘째 가능하면 재화가 개인적 특권으로써가 아니라 공공재로써 이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고대에서 현대까지 주요 철학자들이 가졌던 '단순한 삶'에 대한 사유를 명쾌하게 정리해 놓았다. 단순한 삶에 관한 철학적 성찰과 더불어 현대적 의미까지 되새겨볼 수 있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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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반생기
양주동 지음 / 최측의농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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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학창 시절부터 무애 양주동 박사의 희한한(?) 일화에 관해 익히 들어 왔다. 한 번은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다행히 몸 상한 데가 없자 "국보는 살았다!"고 외쳤던 일화가 유명하다.

 

원래 《문주방생기(文酒半生記)》는 1960년 간행되었다. 책은 〈신태양〉, 〈자유문학〉 등 문예지에 연재한 산문을 모은 것이다. 책은 '유년기', '술의 장', '청춘백서','여정초', '학창기', '교단 10년' 등 여섯 부로 나눠 무애가 자신의 반생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하고 있다.

 

거의 구갑(舊甲)이 흐르는 동안 당시 쓰이던 말과 글도 많이 바뀌었다. 출판사 측은 이 책을 다시 내면서 초판 《문주반생기》(신태양사)와 《양주동전집》 4권 〈문주반생기·인생잡기〉(1995, 동국대학교출판부)에 실린 영인본을 상호 대조하여 가능한 한 초판의 문맥에 충실하면서 의미가 분명한 쪽으로 교정하였다한다.

 

무애의 한학 실력이 워낙 출중한데다 언어의 유희 또한 남달랐으니 그 교정 작업이 여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후일담을 보니 자전과 사전을 비롯해 참고도서 수백 권과 인터넷 아카이브를 뒤져 가며 한글 세대를 위해 꼼꼼히 해독했다 한다. 책에 실린 편집자의 각주가 1996개나 된다하니 그저 감탄스럽다 못해 경외심마저 든다.

 

《문주방생기》 초판본. 신태양사(1960)

 

무애의 글쓰기는 참으로 독특하다. 그의 문장은 평생 의고투(擬古套) 곧, 한문 번역투를 벗어나지 못했다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에게서 유합을 배워 다섯 살에 졸업하고, 팔구 세 때 당시를 읽고 외웠다하니 가히 신동이었음에 틀림없다. 한편 아버지 역시 대단한 술꾼이었다. 무애는 아버지에게서 술 실력까지 물려받았음일까. 술에 관한 한 무애의 맞수가 여럿 있었느니, 개중 유명한 이가 작가 염상섭이었다. 염상섭은 어찌나 술을 좋아했던지 거의 취한 채 걸음을 갈지자로 걸어 호도 ‘횡보(橫步)’가 됐다.

 

특히 흥미로운 일화는 문학소녀 강경애(1906~1943)와의 연애담이다. 연애기는 1부 '문학소녀와의 연애'에서 잠시 언급되고, 5부 '춘소초'(春宵抄)에서 본격적으로 이어진다. 어느 비오는 봄밤의 이야기다, 무애의 연설을 들은 문학소녀가 비를 철철 맞으며 홀랑 멧새같이 그를 찾았던 것이다.

 

"선생님, 나 영어 좀 가르쳐줘요! 그리고 시도, 문학도. 전 여학교 3년생, 아무것도 아직 몰라요. 그러나 문학적 소질은 담뿍 가졌으니, 좀 길러 주세요."

 

당시의 그녀에 대한 무애의 인상은 이랬다. "그 똑똑하고 야무지고, 앙큼한 품이 몹시 귀엽다. 고 참새 같이 작은 몸, 빛나는 눈, 훤칠한 이마, 낭랑한 목소리." 하지만 문학소녀와의 연애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강경애는 나중에 장하일을 만나 간도로 도망치듯 이주했다. 그녀는 「소금」(1934), 「인간문제」(1949) 등을 발표하여 근대 리얼리즘을 개척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무애의 공은 강경애가 지닌 작가로서의 재능을 알아보고 이끌어 내준 것이다.

 

所遇無故物, 焉得不速老 (소우무고물, 언득부속로)
“옛날에 있던 것들을 이제는 만나볼 수가 없으니, 어느새 이다지 늙었단 말인가.”

 

무애가 인용한 고시(古詩)의 한 구절이다. 책을 대하는 내 마음이 바로 이랬다. 현란하고 감칠 맛 나는 국보의 글을 수십 년이 지나 다시 만나매 반갑기 그지없다. 잊혀져 가던 책을 ‘제대로’ 다시 내준 출판사 편집진에 깊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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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정여울 지음 / 민음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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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괜찮다, 힘들지 않다고 말할 때마다 우리 안의 무언가가 죽어 가고 있다. 시들어 간다. 그 무언가는 바로 우리 자신의 트라우마, 그림자,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이다

‘문학의 프리즘에서 비춰 본 심리학.’ 이번에 정여울 작가가 우리에게 들고 온 화두다. 그이는 어릴 적부터 안아온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심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문학작품 속에서 자신과 닮은 상처를 지닌 주인공들을 찾아 대화하고, 소롱하며 치유의 길을 발견했다. 책은 그렇게 찾은 서른 편의 작품과 등장인물에 관해 이야기한다.

문학은 내게 진정한 내면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거울이다. 어느 날 흉측한 벌레로 변해버린 그레고리 잠자에게서 자본주의 삶의 무게에 짓눌린 한 남자의 비애를 느낄 수 있고,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권씨에게서 빈궁할지언정 저버릴 수 없는 인간의 마지막 자존심을 읽어낸다.

G. 미쇼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운명이 인간의 ‘힘의 의지’를 좌절시킬 때 어떤 특수한 감정이 생겨나는데, 이것이 바로 ‘비극의 감정’이라고 했다. 우리는 트라우마와 상처로 인해 불우한 삶을 보내야했던 문학 속의 주인공을 대하며 비극의 감정과 마주한다.

그 속에서 나는 공감하고, 공명하며 동시에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진다. 그래, 내 삶도 그럭저럭 살만 하네 싶다. 작가 위화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어떤 목적을 위해 살기보다, 때로 삶 그 자체를 위해 살아가는 건지도 모른다. 난 문득 떠올려본다. 그래, ‘아픔’은 ‘앞으로’의 명사형인지도 몰라.

 

“그 모든 트라우마는 내게 말한다. 트라우마를 없앨 수는 없지만 트라우마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상처를 완전히 낫게 할 수는 없지만 상처와 함께, 상처를 안고, 상처를 보듬고, 때로는 상처로부터 배우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상처는 엄청난 예외 상태가 아니라 존재의 필수적 성립 조건이다.” (250쪽)

 

저자는 아들러, 프로이트, 융 등 심리학의 거장 중에서 융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한다. 어느 매체에 따르면 작가는 융의 자서전 『기억 꿈 사상』을 자주 들춰본다고 했다. 융은 에고, 개인적 무의식, 집단 무의식이 우리의 자기(Self)를 구성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중년의 위기’에 관심을 기울인 최초의 심리학자였다. 어쩌면 융의 심리학은 작가에게 푸코가 말한 '에피스테메'인지도 모른다.

집단 무의식을 잘 그려낸 작품에 뭐가 있을까? 작가는 『책 읽어주는 남자』를 꼽는다.  소설은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대해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독일 전체의 집단적 무의식을 건드리고 있다.

그이는 은연 중 융의 사위일체설을 드러낸다. 우리의 본성 내부에 ‘악’의 가능성이 자리 잡고 있다는 생각은 융이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융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파괴성을 지켜보면서 기독교 삼위일체(성부, 성자, 성령)에 하나-악 또는 아니마(남성에 깃듯 여성성)/아니무스(여성에 깃든 남성성)-를 더했다.

기독교는 악을 밖으로 몰아내면서(가령 하늘에서 쫓겨난 루시퍼) 악을 타도하기 이한 폭력을 정당화했다. 하지만 융은 인간의 본성은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다고 말한다. 현대인들이 겪는 정신적·심리적 갈등, 즉 분열된 자아는 선과 악의 이분법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주변의 자극을 향해 리액션만 하기 바쁜 것이 ‘마음놓침’의 상태라면 ‘자아’라는 연기자의 페르소나를 뚫고 ‘자기’라는 존재의 핵심을 향해 날아가는 또 하나의 나는 ‘마음챙김’의 주제다. 또한 내 안의 모든 트라우마와 언제든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내면의 검투사다." (238~239쪽)

 

지킬 박사의 이중 인격은 이를 잘 보여준다. 저자는 지킬은 무의식과의 접촉에는 성공했지만 무의식과의 화해, 통합, 그로 인한 치유의 성찰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평한다. 우리 내면에 깃든 선과 악은 의식과 무의식과의 대화를 통해 통합해 나가야 한다. 그래야 “더 깊고 너른 자아의 우주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비평가 샤를 단치에 따르면 고전의 영원한 생명력의 원천은 바로 위대한 독자다. 현재 읽히지 않는 걸작은 미래에는 소멸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평론가 로저 애버트는 한 줄의 영화 평을 쓰기 위해 때로 영화 수십 편을 한꺼번에 본 적도 있다고 했다, 저자 역시 한 줄, 한 단락의 명구를 건져 올리기 위해 수많은 책들을 살폈을 것이다. 그렇게 내 삶의 울림과 공명하는 문구를 만났을 때 난 치유의 힘을 얻고 다시 살아갈 기운을 얻는다. 감사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나는 저자가 건넨 고전을 꼽씹어 읽어보련다. 모르지 않는가, 그 속에서 진정한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될지. 그것은 “자기 치유의 노력이고 더 나은 삶을 살려는 끈질긴 자유의지” 덕분이다. 이는 곧 자기 완성을 위한 산책이요, 여정이기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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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 전쟁의 기억과 분단의 미래
브루스 커밍스 지음, 조행복 옮김 / 현실문화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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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이었던 2010년 미국에서 출간됐다.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한국전쟁의 기원이후 새롭게 기밀 해제된 자료를 추가하는 등 한국 전쟁을 총정리했다. 그'미국인이 미국인을 위해 쓴 한국전쟁에 관한 책'이라고 소개한다.

 

그는 한국전쟁을 '내전'으로 보면서, 내전을 초래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힘의 기원을 일본의 식민통치 시대까지 확장한다.

 

"특히 불평등한 토지 보유, 한국인 중 일부는 항일 운동에 참여하고 다른 일부는 일본에 협력했던 것, 그리고 수많은 한국인이 여기저기 끌려 다니며 일본의 방대한 산업화와 전시 동원 노력에 복무해야 했던 193545년의 10년 동안 평범한 한국인이 겪은 경악스러운 혼란에 그 뿌리가 있다."(163)

 

그에 따르면 한국전쟁은 일본의 한국 식민통치 시기(1910~1945)의 특징이었던 계급 간의 분열과 항일투쟁의 분열에서 비롯된 내전이었다.

 

미국은 한국 전쟁을 통해 새로운 체계로 도약했다. 미국은 방위비를 대폭 늘렸고, 해외 기지를 광범위하게 구축했으며, 안보 국가를 수립했다. 미국을 세계의 경찰국가로 만든 것도 제2차 세계대전이 아니라 바로 한국 전쟁이었다.

 

한국 전쟁은 미국인이나 우리 모두에게 잊혀진 전쟁이 되었다. 한반도의 분단은 미 군산복합체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보수 진영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수단이다.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2016년 10월 21일 제주칼호텔에서 ‘미국의 책임과 제주의 학살'이란 주제로 강연을 가졌다. 그는 2017년 4월 제2회 제주4.3평화상을 수상했다.

 

특히 그는 한국 전쟁 중 벌어진 잔혹한 학살과 광범위한 공습에 대해 주목한다. 2차 세계대전 중 영국과 미국이 투하한 폭탄의 총량은 120만 톤이었다. 미국은 한국에서 645천 톤의 폭탄을 투하했는데(32557톤의 네이팜탄은 별도), 이에 비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태평양 전쟁구역 전체에 투하한 것이 503천 톤이었다. 북한의 22개 주요 도시 중에서 18개 도시는 최소한 50%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북한의 도시와 마을의 파괴 정도는 “40~90%까지로추산되었다.(226) 저자에 따르면 북한 지역은 공습으로 '달의 표면'처럼 변했다.

 

저자는 최근 미국의 트럼프와 존 매케인 등 극우 진영이 북한을 겨냥하여 화염과 분노”, “절멸이라는 망령을 불러낸 것은 역사의식 없는 정치인의 소행이라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2017년 오늘날을 사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저자는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내전을 기록한 역사가들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또한 그는 과거에 대한 이해 없이는 서로를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하며, 이러한 이해 없이는 한반도를 둘러싼 대립의 극복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에 우리는 한국 전쟁을 새롭게 조명하는 한편, 남북한 공동체 차원의 화해를 모색해야 한다.

 

커밍스 교수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서 넬슨 만델라에 비견되는 화해와 치유의 정치를 발견했다. 그는 이번 책을 김 전 대통령께 헌정한다고 밝히고 있다. 지난 2007년 제1회 김대중 학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북핵 위기를 빠르게 푸는 방법? 저자에 따르면 북한이 요구하는 두 가지 사항, 즉 최종적인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한국 전쟁을 끝내고, 북한을 외교적으로 승인하는 것이다. 왜 미국은 이것을 거부할까? 이는 바로 러시아와 중국을 포위·압박하기 위한 군사적, 정치적 책략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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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12-25 19: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느 신문 기사에서 커밍스 교수가 한국전쟁의
기원을 일제시대 만주국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글을 본 기억이 납니다.

식민지 조선의 엘리트들은 군대에 들어가서
성공하고 싶은 마음에 일본 제국군이 되어,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공산주의 계열
조선 독립군들을 일본군보다 더 혹독하게
탄압했죠.

그런 이유 때문에 해방 공간에서 구 만군
으로 복무한 이들과 독립투사들이 같은 하
늘을 지고 살 수 없는 그런 불구대천의 원
수가 되었다는 분석이 기억에 남습니다.

사랑지기 2017-12-28 07:37   좋아요 0 | URL
네 좋은 의견 너무 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