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정여울 지음 / 민음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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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괜찮다, 힘들지 않다고 말할 때마다 우리 안의 무언가가 죽어 가고 있다. 시들어 간다. 그 무언가는 바로 우리 자신의 트라우마, 그림자,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이다

‘문학의 프리즘에서 비춰 본 심리학.’ 이번에 정여울 작가가 우리에게 들고 온 화두다. 그이는 어릴 적부터 안아온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심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문학작품 속에서 자신과 닮은 상처를 지닌 주인공들을 찾아 대화하고, 소롱하며 치유의 길을 발견했다. 책은 그렇게 찾은 서른 편의 작품과 등장인물에 관해 이야기한다.

문학은 내게 진정한 내면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거울이다. 어느 날 흉측한 벌레로 변해버린 그레고리 잠자에게서 자본주의 삶의 무게에 짓눌린 한 남자의 비애를 느낄 수 있고,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권씨에게서 빈궁할지언정 저버릴 수 없는 인간의 마지막 자존심을 읽어낸다.

G. 미쇼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운명이 인간의 ‘힘의 의지’를 좌절시킬 때 어떤 특수한 감정이 생겨나는데, 이것이 바로 ‘비극의 감정’이라고 했다. 우리는 트라우마와 상처로 인해 불우한 삶을 보내야했던 문학 속의 주인공을 대하며 비극의 감정과 마주한다.

그 속에서 나는 공감하고, 공명하며 동시에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진다. 그래, 내 삶도 그럭저럭 살만 하네 싶다. 작가 위화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어떤 목적을 위해 살기보다, 때로 삶 그 자체를 위해 살아가는 건지도 모른다. 난 문득 떠올려본다. 그래, ‘아픔’은 ‘앞으로’의 명사형인지도 몰라.

 

“그 모든 트라우마는 내게 말한다. 트라우마를 없앨 수는 없지만 트라우마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상처를 완전히 낫게 할 수는 없지만 상처와 함께, 상처를 안고, 상처를 보듬고, 때로는 상처로부터 배우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상처는 엄청난 예외 상태가 아니라 존재의 필수적 성립 조건이다.” (250쪽)

 

저자는 아들러, 프로이트, 융 등 심리학의 거장 중에서 융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한다. 어느 매체에 따르면 작가는 융의 자서전 『기억 꿈 사상』을 자주 들춰본다고 했다. 융은 에고, 개인적 무의식, 집단 무의식이 우리의 자기(Self)를 구성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중년의 위기’에 관심을 기울인 최초의 심리학자였다. 어쩌면 융의 심리학은 작가에게 푸코가 말한 '에피스테메'인지도 모른다.

집단 무의식을 잘 그려낸 작품에 뭐가 있을까? 작가는 『책 읽어주는 남자』를 꼽는다.  소설은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대해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독일 전체의 집단적 무의식을 건드리고 있다.

그이는 은연 중 융의 사위일체설을 드러낸다. 우리의 본성 내부에 ‘악’의 가능성이 자리 잡고 있다는 생각은 융이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융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파괴성을 지켜보면서 기독교 삼위일체(성부, 성자, 성령)에 하나-악 또는 아니마(남성에 깃듯 여성성)/아니무스(여성에 깃든 남성성)-를 더했다.

기독교는 악을 밖으로 몰아내면서(가령 하늘에서 쫓겨난 루시퍼) 악을 타도하기 이한 폭력을 정당화했다. 하지만 융은 인간의 본성은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다고 말한다. 현대인들이 겪는 정신적·심리적 갈등, 즉 분열된 자아는 선과 악의 이분법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주변의 자극을 향해 리액션만 하기 바쁜 것이 ‘마음놓침’의 상태라면 ‘자아’라는 연기자의 페르소나를 뚫고 ‘자기’라는 존재의 핵심을 향해 날아가는 또 하나의 나는 ‘마음챙김’의 주제다. 또한 내 안의 모든 트라우마와 언제든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내면의 검투사다." (238~239쪽)

 

지킬 박사의 이중 인격은 이를 잘 보여준다. 저자는 지킬은 무의식과의 접촉에는 성공했지만 무의식과의 화해, 통합, 그로 인한 치유의 성찰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평한다. 우리 내면에 깃든 선과 악은 의식과 무의식과의 대화를 통해 통합해 나가야 한다. 그래야 “더 깊고 너른 자아의 우주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비평가 샤를 단치에 따르면 고전의 영원한 생명력의 원천은 바로 위대한 독자다. 현재 읽히지 않는 걸작은 미래에는 소멸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평론가 로저 애버트는 한 줄의 영화 평을 쓰기 위해 때로 영화 수십 편을 한꺼번에 본 적도 있다고 했다, 저자 역시 한 줄, 한 단락의 명구를 건져 올리기 위해 수많은 책들을 살폈을 것이다. 그렇게 내 삶의 울림과 공명하는 문구를 만났을 때 난 치유의 힘을 얻고 다시 살아갈 기운을 얻는다. 감사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나는 저자가 건넨 고전을 꼽씹어 읽어보련다. 모르지 않는가, 그 속에서 진정한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될지. 그것은 “자기 치유의 노력이고 더 나은 삶을 살려는 끈질긴 자유의지” 덕분이다. 이는 곧 자기 완성을 위한 산책이요, 여정이기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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