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나라 - 성폭력 생존자와 가해자가 함께 써내려간 기적의 대화
토르디스 엘바.톰 스트레인저 지음, 권가비 옮김 / 책세상 / 2017년 12월
평점 :
절판


 

 

사건은 1996년 11월 16일 남자 친구의 생일 파티에서 시작됐다. 16살이었던 아이슬란드 토르디스는 교환 학생으로 호주에서 온 18살 톰에게 강간당했다. 당시 그녀는 술에 취해 있었고, 톰과는 연인 사이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강간임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9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녀는 고통 받으며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2005년 그녀는 불현 듯 가해자 톰에게 메일을 보냈다. 그로부터 8년간 둘은 300여 통의 메일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만나자는 제안을 읽고 쓰러질 뻔 했다고 고백할 게. 무섭고, 걱정되고, 조심스럽고, 미칠 것 같고, 그런 감정들이 물밀 듯이 밀려...”(48쪽)

그러던 와중 토르디스의 눈에 또 다른 강간 사건이 눈에 들어왔다. 2007년 4월 레이캬비크의 한 호텔에서 일어난 강간 사건이 대서특필되었다. 열아홉 살 소녀가 모르는 남자에게 화장실 가는 길을 물었다가 따라 들어온 그 남자에게 강간당했다. 법원은 소녀가 힘껏 저항하지 않았다고 탓하며,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토르디스는 가해자의 무죄 방면에 분노했다. 평결을 비난하는 공개서한을 작성하다가 할 말이 너무 많아서 270페이지짜리 책을 냈다. 그리고 1996년 자신이 당한 이야기를 책에 솔직히 고백했다.

두 사람은 남아공 케이프타운 일주일 동안 직접 대면하기로 했다. 케이프타운은 '강간의 도시'라 불릴 만큼 성범죄율이 높은 곳이자, 넬슨 만델라가 보여준 ‘용서와 화해’를 상징하는 도시다.

2013년 3월 28일 5시 둘은 케이프타운 리츠 호텔 로비에서 만났다. 어색한 분위기도 잠시 그들은 서로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이제 토르디스는 서른 셋, 톰은 서른 다섯이 되었다. 토드리스는 다정한 남편 비디르를 만나 아이들을 낳았고, 톰은 아직 싱글이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재회했을 때 그 심정은 어떠했을까? (2016년 TED 강연 모습)

 

 

그녀는 ‘용서의 나라’에 관한 이야기를 여기저기 언급한다. 가령 남아공 국립미술관에서 토지법이 통과된 이후 100년간의 역사를 다룬 사진전이라든가 만델라가 갇혀 있었던 로벤 섬 투어 이야기 그리고 브라이스 코트니의 파워 오브 원을 원작으로 한 영화 이야기 등등.  둘은 무자비한 인종주의를 고발하는 사진과 현장 속에서 사람에게 딱지를 붙인다는 게 얼마나 비인간적인 일인지 몸소 체험하며 치유와 화해의 시간으로 들어선다.

과연 피해자와 가해자 두 사람이 16년 만에 재회했을 때 그 심정은 어떠했을까? 책에는 두 사람의 솔직한 감정에 대한 고백이 주거니 받거니 이어진다. 대부분의 스토리는 토르디스가 직접 썼고, 톰은 일기 형식으로 답한다.

 

 

 

“나는 누가 적인지도 모르는 채 세상과 전쟁을 벌였다. 누군가를 믿고 비밀을 털어놓지 못했기 문에 나는 내적 불만을 글로 쏟아냈다. 일기가 시가 되고, 다시 희곡이 되었다. 얼마 안 되어 나는 극작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내 목구멍에 얹혀 있던 말들을 거침없이 뱉어내는 인물을 창조하는 일이 내게는 해방이나 다름 없었다.”(23쪽)

 

 

토르디스는 용서를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이렇게 생각한다. “용서가 유일한 길이야. 그가 용서를 받을 자격이 있든 없든 나는 평화를 누릴 자격이 있으니까.”(49쪽) 그리고 말한다. “그토록이나 나를 좀먹어온 과거와 똑바로 대면할 용기를 주셔서 감사합니다.”(75쪽)

그녀의 용서는 무조건적이거나 종교적인 용서나 사건을 잊고 덮으려는 행동이 아니라, 트라우마가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기도 했다. 톰 역시 자신의 과오를 제대로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같은 범죄가 재발하지 않도록 세상을 바꿔나가는 일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것까지 ‘용서를 받을 자격’을 갖추려 노력했다.
 

 

 

 

한편 두 사람은 2016년 ‘강간과 화해에 관한 우리의 이야기(Our story of rape and reconciliation)’라는 주제로 TED 강연에 나섰다. 그들의 이야기는 조회수 90만을 넘어섰다.

필립 로스는 『휴먼 스테인』에서 자신의 농담이 인종차별적 언행으로 고발되어 고통 받는 노교수 콜먼 실크의 이야기를 통해 사회적 낙인이 얼마나 인간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지 잘 보여주었다. 토르디스와 톰의 이야기 역시 가해자와 피해자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에서 벗어나 치유와 화해의 길이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 토르디스가 먼저 내민 용서의 손길은 무척 감동적이다. 단지 한 여인의 온정이라고 치부하기에는 큰 용기가 필요했으리라. 일찍이 만델라가 보여준 용서와 화해의 위대한 여정과도 같은 담대함이 깃들지 않았으면 가능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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