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철학자의 생각법 - 사유의 풍경으로 걸어 들어가다
로제 폴 드루아 지음, 백선희 옮김 / 책세상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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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네가 어떻게 걷는지 보여주면 네가 누구인지 말해주겠다.” - 고대 로마인들의 생각

 

네 발로 몸을 지탱하고 땅을 바라보던 한 유인원이 마침내 몸을 일으켜 손의 자유를 획득함으로써 인류의 문명은 시작됐다. 걷기. 지극히 평범하고 익히 잘 알고 있는 이 동작은 불가사의하다. 지금까지 어떤 로봇도, 기계도 완벽하게 구현해내지 못했다.

 

프랑스 철학자 로제 폴 드루아는 걷기에 대해 철학적으로 탐색한다. ‘걸음은 우리 눈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색의 대상도 아니다.

 

그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된 이유가 걷기와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또한 인간을 규정하는 조건으로 말하기와 생각하기와 함께 걷기를 든다. 이 세 가지는 밀접히 연관돼 있다. 인간은 걷기 시작하면서 말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 셋의 관계는 어떻게 봐야 할까? 이 책은 이 철학적 의문에 대한 소요(逍遙)이자 산책이다.

 

저자의 관점은 독특하다. 그에게 철학은 진리를 향한 걷기. 실재적이고, 결연하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걷기다. 엠페도클레스의 청동 샌들이나 프로타고라스의 왕복 운동은 고대 철학자들이 걷고, 말하고, 생각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플라톤의 동굴에 갇힌 죄수가 풀려나 진실의 빛을 향하기 위한 첫 여정은 걷는일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여럿이 무리를 지어 산책하면서 생각하는 것이 철학자들 사이에 널리 퍼진 습관이었다.

 

데카르트 역시 걷는 것에 의미를 뒀다하니 새롭다. 저자에 따르면 방법서설에 걷기에 관한 언급이 네 번 나온다. 저자의 치열한 꼼꼼함이 느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한편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걷기로서의 재발견은 루소 덕분이다. 그는 여행에서 산책을 분리해 고유한 즐거움과 개별적인 미학을 지닌, 그 자체로 완결되는 활동으로 새롭게 창조해냈다. 정적을 피해 끊임없이 도망 다녀야 했던 루소는 그가 보는 풍경이 곧 그 자신이었다. “풍경은 나의 생각이다.”

 

이 책은 엠페도클레스에서 루소, 비트겐슈타인까지, 그리스에서 인도, 중국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의 철학자 27명과 그 저작에서 발견한 걷기와 사유의 연관성을 담았다.

 

몸은 앞으로 나아간다. 문장이 다음 단어들을 향해 이어지듯이, 생각이 다음 생각을 향해 나아가듯이. 그 무엇도 뒤로 돌아오지 않는다. 몸도, 생각도, 시간도 말도.” (203)

 

저자는 인류는 쉬지 않고 보잘 것 없는 곳에서 드넓은 곳에 이르기까지 계속 걸으며 이주와 침략, 전쟁과 대결, 탈출과 유배를 이어갔다. 인간과 함께 역사도 걷는다. 또한 말, 담론, 생각, 문제, 지식, 방법, 사고방식, 학설, 물음, 믿음 같은 것들도 인간과 함께, 인간 안에서 걸어왔다.

 

왜 여전히 걸을까? 인간의 여행에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한 개인의 발걸음은 언젠가 멈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걸음은 계속된다. 한 발짝은 미미하지만 길은 무한하다. 우리의 걷기는 언젠가 끝이 나지만, 걷기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210)

 

우리는 불멸을 꿈꾼다. 우리 몫의 주어진 시간과 삶만으로 결코 만족할 수 없기에, 거기에 모든 세월을 더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 자연을 모방하고, 사색하며 세기를 뛰어넘고자 한다. 현자들에게 걷기는 시간의 파기요, 시간의 초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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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리미널 씽킹 - 변화를 원한다면 지금부터
데이브 그레이 지음, 양희경 옮김 / 비즈페이퍼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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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어떤 사람은 변화에 성공하지만 어떤 사람은 실패할까? 답은 사고방식에 있다고 다들 말한다. 그럼 생각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저자는 우리가 한계라고 느끼는 지점에서 경계 너머를 상상하는 힘을 키우라고 말한다. 즉 강력한 변화를 이끌어내려면 생각이라 믿고 있는 가설이나 믿음을 리미널(Liminal) 지대에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리미널이라는 단어는 문턱, 한계, 출입구를 뜻한다. 새로운 유형의 사고로 나아가기 이전의 모호한 상태나 혼미한 상태를 말한다. 경계에서 생각하기란 일종의 정신적 민첩함을 일컫는다.

 

리미널 씽킹(Liminal Thinking’은 경계에서 생각하기다.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기는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문,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문을 발견하거나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한계라 믿었던 벽은 수많은 가능성의 문으로 변하게 된다.

 

리미널 씽킹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변화를 향한 열망과 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저자에 따르면 믿음’(Beliefs)은 만들어진다. ‘실제’(Reality)는 복잡하고 다차원적이며 알 수 없는 것이다. 실제는 경험(Experience), 주의 집중(Attention), 이론(Theories), 판단(Judgments) 등 4과정을 거쳐 분명한 것’(The obvious)이 된다.

 

 

이처럼 믿음은 우리가 공유 세계(양쪽 경계가 만나는)를 함께 창조할 때 사용하는 정신적 재료가 된다. 우리가 함께 살고 일하고 함께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게 해준다. 공유 세계를 바꾸려면 공유 세계의 바탕을 이루는 근원적 믿음을 바꿔야 한다.

하지만 믿음은 자기 폐쇄적 논리라는 거품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방어하기도 한다. 자기 폐쇄적 논리는 믿음이 타당하지 않을 때조차 이를 유지함으로서 개인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보호한다. 또한 우리의 수많은 믿음은 자동 항법 장치로 작동되는 습관화된 일상에 스며들어 있다.

 

“결말이 어떻든 유연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익힐 수만 있다면, 그리고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믿음 거품의 경계를 찔러보고 탐색해보고 밀어 봄으로써 무엇이 가능한지 확인하는 일은 더욱 쉬워진다. 그리고 가능한 결말에 상관없이 마음을 열 수 있다면 당신은 극적인 성공을 경험할 수 있다.” (224쪽)


이때 리미널 씽킹은 일상의 틀을 깨부수어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하게 해준다. 생각도 습관과 같아서 매번 부딪히는 지점을 벗어나지 못한다. 생각의 변화, 혁신적인 생각을 이끌어내려면 우리가 생각이라 확신하고 믿었던 것들부터 경계 지대에 세워서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또한 상황을 꿰뚫어보고자 한다면 우리는 믿음의 구조물을 끊임없이 진화시켜야 한다.

저자는 자신의 믿음과 욕구를 읽고, 그 욕구를 더 충족하기 위해 믿음을 계속 평가하고 검증하며 변화시키라고 조언한다. 나누고 싶은 믿음, 세상을 더 좋게 바꿀만한 믿음이 있다면 타인들과 공유하고 소통해야 한다. 나 자신이 먼저 바뀌어야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법이다.

저자는 부록에 다음과 같이 리미널 씽킹의 9가지 실천법을 제시했다.

 

1. 당신이 객관적이지 않다고 가정하라
2. 당신의 잔을 비워라
3. 안전지대를 만들어라
4. 다각도로 바라보고 검증하라
5. 질문하고 연결하라
6. 일상의 틀을 깨라
7. 가설이 진실인 양 지금 바로 행동하라
8. 이야기로 이해하라
9. 스스로 진화하라

 

저자의 직관적인 손 그림과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새로운 변화의 계기를 마련해 주는 리미널 씽킹법을 익힐 수 있다. 이제 실천해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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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노래
레일라 슬리마니 지음, 방미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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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콩쿠르상 수상작은 레일라 슬리마니(Leïla Slimani)달콤한 노래(원제 Chanson Douce)가 차지했다. 이 작품은 201210월 뉴욕에서 보모가 두 아이를 살해한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작가는 모로코 라바트 태생으로 어릴 때 보모 손에 길러졌다. 실제 사건과 자신의 경험을 살려 몽환적 분위기의 스토리를 그려냈다. 뉴욕 사건에서 보모는 2년 동안 아이들 셋을 맡아 돌보다 전화로 그녀의 어머니와 심하게 말다툼한 뒤 옆에 있던 두 아이를 칼로 살해했다. 희생된 아이는 첫째 룰루(6)와 막내 레오(2)였다. 보모 자신도 칼로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둘째 네시(3)는 마침 어머니와 함께 밖에 있었던 덕분에 무사했다. 하지만 모녀는 보모가 전화를 받지 않자 집으로 찾아갔다 사건 현장을 목격했다. 그 트라우마가 얼마나 심했을까.

 

2012년 보모의 손에 희생된 룰루(왼쪽)와 레오

 

이야기의 무대는 파리 10구 오트빌 가의 근사한 아파트다. 폴과 미리암 부부는 5층에 산다 그들은 밀라와 아당을 키운다. 폴은 유명한 스튜디오에서 아티스트들의 어시스턴트로 일하고, 미리암은 변호사 일을 잠시 휴직했다 다시 시작했다.

폴과 미리암은 유모 면접을 보고 루이즈를 채용한다. 루이즈는 기대 이상이었다. 루이즈가 오고 몇 주 뒤 뒤죽박죽이었던 아파트는 완벽한 실내 공간으로 바뀐다. 부부는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한다. 루이즈가 환상적인 솜씨를 발휘하는 곳은 부엌이다. 요리에 서툰 미리암 탓에 그간 없다시피 했던 친구들 초대도 다시 가능해졌다. 루이즈는 아이들을 몹시 사랑한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하루 종일 노래를 불러 주거나, 말놀이나 쿠션 던지기, 숨바꼭질 같은 놀이도 곧잘 했다.

작가가 비극적인 사건을 묘사하면서 달콤한 노래로 명명한 이유는 뉴욕의 보모가 평소 아이들에게 메리 포핀스에 관한 노래를 들려줬기 때문이다. 메리 포핀스는 두 아이를 키우는 뱅크스 씨네 유모다. 그녀는 우산을 쓰고 하늘을 날아다니며 재미있는 노래와 유쾌한 놀이로 아이들과 환상적인 시간을 보내는가 하면, 아이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수호천사 처럼 맞선다. 런던 올림픽 개막식 때 메리 포핀스가 하늘에서 내려와 어린이 병원에 침입한 병균을 퇴치하는 퍼포먼스가 펼쳐지기도 했다.

루이즈는 아이들에게 메리 포핀스와 같은 존재였다. 미리암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우리 보모는 요정이에요.” 그녀는 루이즈가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거실 선반 위에 놓으며 당신은 우리 가족이에요.”라고 말했다. 폴은 루이즈에게 미소 지으며 꼭 메리 포핀스 같다고 칭찬했다. 폴은 행복했다. “자기 삶이 이제야 마음속 욕망과 폭발하는 에너지, 삶의 즐거움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른 것 같았다.

 

 

하지만 미리암은 일과 가정 속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아이들을 보지 못하는 것이 괴롭다고, 아무 칭찬도 듣지 못하면서 이렇게 질주하는 삶이 고통스럽다고 하소연"했다. 특히 시어머니의 비난 탓에 미리암은 바닥에 쓰러뜨려져 수없이 칼에 찔리는 느낌을 받았다.

한편
우연히 벌어진 사건으로 폴과 미리암은 루이즈에게서 불길한 기운을 느끼기 시작한다. 작가는 이야기의 초점을 루이즈에게 맞춘다. 그녀에게는 다 자란 딸 스테파니가 있다. 두 사람은 서로 소통이 안 된다. 루이즈의 남자 자크는 무기력한 방관자에 불과하다. 루이즈가 전에 돌봤던 엑토르는 가까이에서 몇 년을 보냈는데도 그녀의 이미지는 흐릿하고 형체가 없다고 기억한다.

루이즈가 아이들을 해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비록 루이즈가 망상성 우울증을 앓았다고 하지만, 이 때문만은 아니다. 루이즈의 행복을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어쩌면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자신의 죽음이야말로 진실 되고, 그것이 자신의 삶을 증명한다고 말했던 것과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결국 아이들이 죽어야 했던 이유는 아이들의 삶과 행복을 위해서일지 모른다. 이 지독한 역설이란.

그녀(루이즈)는 언제까지고 그들의 천진무구함, 그들의 열정을 마음에 담고 싶다. 그녀는 아이들이 처음으로 무언가를 바라볼 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다. 어떤 기계의 원리를 깨달을 때, 곧 지겨워질 거라는 사실은 절대 미리 생각하지 않고 무한 반복을 희망할 때, 그런 때의 그들의 눈으로. (271)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도 하고, 불행하게도 하는 것들의 정체는 꼭 안개 같다. 알 것 같은데 모르겠고, 뭔가 떠오르지만 콕 짚어서 말할 수 없을 때가 있다. 루이즈는 그런 존재와도 같다. 이 작품은 달콤한 노래 뒤에 감춰진 인간의 본성에 관한 탐구다. 한편 작품은 수상 후 영화 판권이 팔려 영화로도 제작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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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테 2017-11-21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꿈꾸는 비행선님!
아르테 <달콤한 노래> 담당자 김별이라고 합니다.

책을 읽고 올려주신 리뷰에 감동하여 쪽지 드려요.
정말 감사합니다! :)

올려주신 글 중에 이 문구가 특히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도 하고, 불행하게도 하는 것들의 정체는 꼭 안개 같다.
알 것 같은데 모르겠고, 뭔가 떠오르지만 콕 짚어서 말할 수 없을 때가 있다.
루이즈는 그런 존재와도 같다.
이 작품은 달콤한 노래 뒤에 감춰진 인간의 본성에 관한 탐구다.˝

이 문구를 카드 뉴스 형태로 제작해서
이번 주말에 아르테 인스타그램과 포스트에 노출하고 싶습니다.
(물론 @꿈꾸는 비행선 의 형식으로 출처는 표기합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더 많은 독자들이 <달콤한 노래>를 만나볼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럼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랑지기 2017-11-22 02:47   좋아요 0 | URL
별이님 안녕하세요?

먼저 좋은 책 내 주셔서 감사드려요.

요청하신 사항은 그렇게 해 주시면 저도 좋아요~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
 
비어 있는 중심 - 미완의 시학
김정란 지음 / 최측의농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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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문학평론가 김정란 교수의 첫 평론집 비어 있는 중심이 복간됐다. 이 책은 원래 1993년 출간되었으나, 그동안 절판된 상태였다. 최측의 농간에서 저자와 협의를 거쳐 일부 수정·보완해서 다시 펴냈다

 

시인은 책 이름, ‘비어 있는 중심의 의미를 찾아 나선다. 산스크리트어로 원()이라는 뜻을 지닌 만달라는 수련자가 자신의 진정한 중심을 찾기 위해 사용되는 일종의 명상 수단이다. C. G. 융에 따르면 보통 만달라의 중심이 어떤 신성한 존재로 채워져 있지만, 현대인들의 내면에 깃든 만달라 중심은 텅 비어 있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은 진정한 영적 중심과의 접촉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나는 시인으로 태어났고 시인으로 살았으며 시인으로 세상을 떠날 것이다. 그것이 내 운명이다. 처음에 문학비평이라고 분류될 수 있는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에게 문학비평가라는 자의식은 없었다. 나는 단 한 번도 문학비평가로서 사유해 본 적이 없다. 그제나 저제나 나는 시인이다. 따라서 이 책에 쓰인 모든 글들은 시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쓴 글들이다.” - 2판 서문에서

 

테트락티스. 이 말은 고대 피타고라스학파가 신성시했던 열 개의 점으로 이뤄진 삼각형을 뜻한다. 피타고라스는 10을 완전수라고 믿었다. 테트락티스는 신의 상징이었고, 조화 그 자체였다.

 

융이 말한 비어 있는 중심은 가운뎃점 하나가 더해져 비로소 완전하고 충만해진다. 시인에게 테트락티스는 우리 의식이 물질계에서 벗어나 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만달라다.

 

시인은 우리가 비어 있는 자들임을 인정하자고 다독인다. 우리가 오만하게 지배했던 자연에게 온당한 자리를 돌려주고, 새로운 형이상학으로 채우자고 말한다. 비어 있는 중심이 타락하고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다스리고 길들여 찬란한 천사의 위치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것. 그래야 인간의 내면에 깃든 선이 가장 고상한 영역에 이를 수 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시인은 독자에게 시와 소설을 들려주고 비평한다. 시인은 이성복·정현종·송찬호·김승희·오규원 등의 시와 조세희·미셸 투르니에·헤르만 헤세의 소설 등을 분석한다. 신화와 신비주의, 오컬트 담론 등을 적절히 활용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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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7-10-30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측의 농간, 혹은 최촉의 농간이라 하시는 부분은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름다운 문장의 리뷰 잘 읽었습니다.

사랑지기 2017-10-30 12:37   좋아요 0 | URL
네 태그에 쓴 ˝최촉의 농간˝은 수정했어요. 댓글 감사드려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
 
조선왕실의 백년손님 - 벼슬하지 못한 부마와 그 가문의 이야기
신채용 지음 / 역사비평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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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신채용 간송미술관 연구원이다. 그는 국민대에서 국사학과를 전공한 뒤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 통합과정을 수료했다. 저자는 박사학위논문 주제로 부마를 쓸 예정이라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 책의 목적은은 저자의 논문 주제를 통해 대중에게 역사적 사실을 소개하는 한편, 조선 왕실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현실을 조금이나마 개선하기 위함이다.

 

왕의 사위, 부마(駙馬)라는 용어는 원래 관직명에서 유래됐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부마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는 가깝고 빠르다는 뜻으로 원래 임금의 수레를 모는 말을 관리하는 벼슬인데중국 위·진 시대 이후 공주에게 장가간 자에게 이 벼슬을 준 것에서 부마라는 명칭이 유래하였다.”

 

조선 초까지 부마라는 용어를 썼지만 이 말은 세종 때 의빈(儀賓)’으로 바뀌었다. 의빈이라는 한자를 풀어보면 일정한 예의를 갖추어() 맞이하는 손님()’의 뜻이다. 우리가 흔히 사위를 백년손님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백년손님은 한 번 왔다 가는 흔한 손님이 아닌, 백 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에도 귀하게 대우해야 할, () 다른 가족이기도 했다.

 

하지만 부마는 대부분 명문가 출신으로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지만, 행동에 많은 제약이 따랐다. 특히 성종 때 경국대전이 반포된 뒤 부마는 법에 따라 주어진 관직만 받아야 했고, 과거에 응시할 수 없어 벼슬을 하지 못했다. 그 까닭은 성리학에서 중요시하는 명분과 의리의 기준으로 볼 때, 왕의 가까운 인척인 사위가 정치 일선에 나서는 것은 용납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조선 중기 이후부터 사대부 가문의 자제는 부마로 간택되는 것을 결코 달가워하지 않았다. 대신 왕은 부마의 장모인 왕비(또는 대비)는 부마로 간택된 이에게 큰 저택을 지어주고 수많은 재산을 하사하면서 벼슬하지 못하게 된 처지를 위로하기도 했다.

 

저자는 조선왕조 92명의 부마 가운데 태조 이성계의 맏사위 흥안군 이제부터 영조의 부마 창성위 황인점까지 12명의 일대기를 개인별 열전의 형식으로 정리했다.

 

부마들은 왕의 사위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자신을 간택해준 왕(또는 왕비)에게 협조하면서 수구적인 자세를 취하거나, 왕의 악행을 부추기는 등 역사의 흐름을 가로막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변화를 이끌어 나가는 군주의 훌륭한 조력자로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가령 성종의 부마이자 연산군의 매부였던 임숭재는 전국을 돌며 미녀를 데려다 왕에게 바치는 일을 했다. 임숭재의 행차 모습은 왕의 위세를 연상시킬 정도였다고 한다. 한편 정조는 자신의 고모부, 즉 영조의 부마를 개혁정치에 활용했다. 박명원과 황인점은 청나라를 오가며 선진 문물을 가져왔고, 이는 실학 발전의 토대가 됐다.

 

▲17세기에 그려진 작자 미상의 신익성 초상화

 

특히 흥미로운 인물은 선조의 사위 신익성(15881644)이다. 책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초상화의 주인공이다. 그는 나이 12세 때 한 살 연상인 정숙옹주의 부마로 간택됐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모론에 가담하지 않아 인조반정 후 봉헌대부에 올랐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김상헌 등과 함께 척화를 주장했다. 부마로서는 유일하게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보좌했다. 인조는 그에게 궁성의 호위를 전담시킨 뒤 고마움을 표했다. 이렇듯 부마는 유사시에는 오늘날 대통령경호실장과 같은 역할을 맡기도 했다.

 

저자는 부마의 위치와 활약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마의 생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계까지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부마는 왕위를 물려받을 세자에게는 자형이나 매부이고, 세손에게는 고모부가 되는 존재다. 이 말인즉 부마 자신, 그리고 그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왕실의 인척으로서 국왕의 근위 세력이 되었다. 따라서 부마와 그 가계는 당대 정치 세력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될 수밖에 없었다.

 

그간 부마에 대한 연구는 당대 부마에 대한 정치적 제약 탓에 사료가 많지 않아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이 책은 부마를 통해 조선사의 또 다른 사실(史實)을 일궈냈다. 조선 정국 운영의 숨은 실세인 부마 가문의 동향을 보면 정치사에 새롭게 접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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