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주반생기
양주동 지음 / 최측의농간 / 2017년 12월
평점 :
품절


 

나는 학창 시절부터 무애 양주동 박사의 희한한(?) 일화에 관해 익히 들어 왔다. 한 번은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다행히 몸 상한 데가 없자 "국보는 살았다!"고 외쳤던 일화가 유명하다.

 

원래 《문주방생기(文酒半生記)》는 1960년 간행되었다. 책은 〈신태양〉, 〈자유문학〉 등 문예지에 연재한 산문을 모은 것이다. 책은 '유년기', '술의 장', '청춘백서','여정초', '학창기', '교단 10년' 등 여섯 부로 나눠 무애가 자신의 반생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하고 있다.

 

거의 구갑(舊甲)이 흐르는 동안 당시 쓰이던 말과 글도 많이 바뀌었다. 출판사 측은 이 책을 다시 내면서 초판 《문주반생기》(신태양사)와 《양주동전집》 4권 〈문주반생기·인생잡기〉(1995, 동국대학교출판부)에 실린 영인본을 상호 대조하여 가능한 한 초판의 문맥에 충실하면서 의미가 분명한 쪽으로 교정하였다한다.

 

무애의 한학 실력이 워낙 출중한데다 언어의 유희 또한 남달랐으니 그 교정 작업이 여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후일담을 보니 자전과 사전을 비롯해 참고도서 수백 권과 인터넷 아카이브를 뒤져 가며 한글 세대를 위해 꼼꼼히 해독했다 한다. 책에 실린 편집자의 각주가 1996개나 된다하니 그저 감탄스럽다 못해 경외심마저 든다.

 

《문주방생기》 초판본. 신태양사(1960)

 

무애의 글쓰기는 참으로 독특하다. 그의 문장은 평생 의고투(擬古套) 곧, 한문 번역투를 벗어나지 못했다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에게서 유합을 배워 다섯 살에 졸업하고, 팔구 세 때 당시를 읽고 외웠다하니 가히 신동이었음에 틀림없다. 한편 아버지 역시 대단한 술꾼이었다. 무애는 아버지에게서 술 실력까지 물려받았음일까. 술에 관한 한 무애의 맞수가 여럿 있었느니, 개중 유명한 이가 작가 염상섭이었다. 염상섭은 어찌나 술을 좋아했던지 거의 취한 채 걸음을 갈지자로 걸어 호도 ‘횡보(橫步)’가 됐다.

 

특히 흥미로운 일화는 문학소녀 강경애(1906~1943)와의 연애담이다. 연애기는 1부 '문학소녀와의 연애'에서 잠시 언급되고, 5부 '춘소초'(春宵抄)에서 본격적으로 이어진다. 어느 비오는 봄밤의 이야기다, 무애의 연설을 들은 문학소녀가 비를 철철 맞으며 홀랑 멧새같이 그를 찾았던 것이다.

 

"선생님, 나 영어 좀 가르쳐줘요! 그리고 시도, 문학도. 전 여학교 3년생, 아무것도 아직 몰라요. 그러나 문학적 소질은 담뿍 가졌으니, 좀 길러 주세요."

 

당시의 그녀에 대한 무애의 인상은 이랬다. "그 똑똑하고 야무지고, 앙큼한 품이 몹시 귀엽다. 고 참새 같이 작은 몸, 빛나는 눈, 훤칠한 이마, 낭랑한 목소리." 하지만 문학소녀와의 연애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강경애는 나중에 장하일을 만나 간도로 도망치듯 이주했다. 그녀는 「소금」(1934), 「인간문제」(1949) 등을 발표하여 근대 리얼리즘을 개척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무애의 공은 강경애가 지닌 작가로서의 재능을 알아보고 이끌어 내준 것이다.

 

所遇無故物, 焉得不速老 (소우무고물, 언득부속로)
“옛날에 있던 것들을 이제는 만나볼 수가 없으니, 어느새 이다지 늙었단 말인가.”

 

무애가 인용한 고시(古詩)의 한 구절이다. 책을 대하는 내 마음이 바로 이랬다. 현란하고 감칠 맛 나는 국보의 글을 수십 년이 지나 다시 만나매 반갑기 그지없다. 잊혀져 가던 책을 ‘제대로’ 다시 내준 출판사 편집진에 깊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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