뽑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살면서 '탈락'해 본 경험이 별로 없다. 늘 내가 원하는만큼은 이뤄왔다. 뭔가에 응시해본 경험 자체가 적고 내 능력 이상을 꿈꾼 적이 별로 없었던 까닭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고3 이라는, 한국에서는 그 자체가 어떤 기간이 아니라 고유명사처럼 취급되는 시기를 겪으면서 나름대로 큰 충격을 받았다.
우선 수능시험을 치고 나와서 한번 충격받았다. 언어영역이 좀 어려웠지만 그래도 한 두개 틀렸겠거니 했는데, 집에 와서 채점을 해보니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89점이었다. 3학년 내내 1등급을 받았고 특히 어려웠던 모의고사에서도 하나밖에 틀리지 않아서 언어영역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89점이라니. 이게 정녕 내 점수란 말인가? 자동 채점 서비스를 믿을 수 없어서 내 손으로 다시 채점하고, 또 한 번 더 답을 살폈다. 그래도 결과는 똑같았다. 89점이 내 점수였다. 그리고 며칠 뒤 1등급컷은 90점으로 판명되었다. 1점차로 2등급이 된 것이다. 언어영역 자리에 2등급이 찍힌 수능 성적표가 어찌나 초라해보였는지 모른다. (안타깝게도 언어만 2등급이었던 건 아니다. 3학년을 꼬박 바친 국사에서도 3개나 틀려서 2등급을 받았고, 정치도 2등급이었다. 하긴 3학년 3월 모의고사에서의 국사 성적이 전부 찍어서 24점이었으니 이것도 큰 발전이긴 하다. 이때 나는 국사 선택자 중에 전교 꼴찌였다. 헉... 하지만 1년간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했으니 다 맞을 줄 알았다.)
그리고는 수시 결과 발표가 나면서 또 충격을 받았다. 내가 '탈락'한 것이다. 서울대와 고려대에 원서를 썼었다. '죄송합니다. 합격자명단에 없습니다.'라는 말을 보면서 아아, 예상했던 일이야- 가능성이 별로 없었는 걸. 이라고 말은 했지만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내심 '나'는 실패하지 않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시 원서를 쓰면서 많이 떨었다. 여기서도 실패하면 어쩌지, 라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정시에서 실패는 곧 재수를 의미한다. 그런데 나는 재수를 해낼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다행히도 이젠 재수할 필요가 전혀 없어졌지만.
이 나이가 되어서야 이런 충격을 받다니, 내가 얼마나 곱게 컸는지 알 만하다. 앞으로 나는 또 많은 실패를 하고 또 많이 충격을 받게 될 것이다. 사실 많이 두렵다. 내가 그런 일들을 어떻게 대처해 나갈지... 하지만, 지금은 내게 날아든 합격 소식에 그저 행복하다. 이렇게 행복한 나는 아마도 곧 이 두려움을 잊을 것이다. 그리고 또 어떤 실패의 순간 과거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