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리시 페이션트
마이클 온다치 지음, 박현주 옮김 / 그책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남편과 연애할 때, 사랑하는 두 연인의 애절하고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라는 광고에 영화를 보러갔다. 기대를 하고 갔지만 두 시간이 넘는 상영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아주 잠깐, 영화를 보다 깜빡 졸았다. 그리고 번뜩 눈이 떴을 때 눈앞엔 황금빛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황금빛 바다는 드넓은 사막이었고 그 위를 작은 경비행기가 날고 있었다. 그리고 바람에 흩날리는 하얀색의 기인 스카프. 갑작스런 상황에 이야기가 연결되진 않았지만 지금도  <잉글리시 페이션트>하면 그 장면이 떠오른다.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남자의 애절함과 함께.     

 


 

 

그리고 십년이 훨씬 지난 얼마전 예전에 봤던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원작소설이 출간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거기다 세계3대 문학상 중의 하나라는 부커상까지 수상했던 작품이라니. 일부에 불과하지만 필름(?)이 끊겼지만 영화보다 졸았다는 얘길 부끄러워서 차마 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었기에 주저없이 책을 집어들었다. 대체 어디야? 문제의 부분이 어느 대목인거지? 책장을 펼치자마자 눈에 불을 켜고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원작소설은 영화와 달랐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영화가 원작소설과 닮았으면서도 달랐다.




영화는 심한 화상으로 죽어가는 영국인 환자인 알마시와 그를 보살피던 캐나다인 간호사 해나, 전직 도둑이면서 연합군 스파이로 활동한 카라바지오, 영국 부대에서 폭탄처리 전담이었단 인도인 공병 킵을 주요 등장인물로 해서 알마시와 그의 연인이었던 캐서린의 로맨스에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하지만 소설은 영화에 비해 초점을 좀 더 확대한다. 2차 대전이 거의 끝날 무렵의 이탈리아 북부, 폭격으로 인해 반쯤 초토화된 빌라 산 지롤라모를 배경으로 알마시와 해나, 카라바지오, 킵 모두의 이야기를 다룬다. 알마시, 해나, 카라바지오, 킵은 국적이나 직업이 서로 달랐지만 큰 공통점을 안고 있었다. 저마다 뭔가를 잃었다는 것. 사랑을 잃고 가족을 잃고 몸의 일부를 잃고 전쟁을 겪으면서 모두 황폐해진 마음을 쓸어안고 그로 인한 상처로 고통 받고 있었다. 저자는 그런 이들을 모두 한 자리에 모아놓는다. 그들이 머문 곳 주변엔 온통 철수하던 독일군의 지뢰를 설치해두고서. 심각한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는 처음엔 서로가 경계하며 가까이 다가서려 하지 않는다. 그러다 서서히 과거를 딛고 일어서려고 하는데 영화에서 다뤄졌던 내용은 바로 알마시가 해나와 카라바지오, 킵에게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다.




영화를 먼저 접해 그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소설은 생각처럼 쉽게 읽혀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줄곧 이름도 없이 ‘그’와 ‘그녀’이던 소설이 45쪽 카라바지오가 해나를 찾아오면서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게다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인물이 한 사람으로 고정되지 않고 알마시와 해나, 카라바지오, 킵이 왔다갔다 해서 혼란스러웠다. 때문에 중반까지는 읽었다가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되짚어오기도 했지만 네 사람의 서술로 접하게 되는 각자의 전쟁과 고뇌, 사랑, 삶의 이야기는 내게 많은 의문을 던졌다.




이 책을 다 읽어갈 즈음, 남편이 표지를 보더니 예전에 봤던 그 영화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대뜸 “음, 이 영화 좋았지.”라며 ‘집에 있는 DVD로 다시 봐야겠다’는 말을 했다. 헛, 집에 이 영화의 DVD가 있었던가? 그걸 왜 난 깜빡 잊은 걸까. <잉글리시 페이션트> 영화는 영화대로, 책은 책대로 좋은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분 2
조디 피콜트 지음, 곽영미 옮김 / 이레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2007년 3월 6일. 여느 날과 다르지 않는 하루였다. 시험공부를 하던 아이는  엄마와 아침을 먹느냐 안 먹느냐로 실랑이를 벌이고 한 형사는 범죄를 미리 막지 못하는 걸 안타까워했으며 마을의 어딘가에선 조산사의 도움을 받아 막 새로운 생명을 낳은 신참 부모도 있었다.




그러나 그 날은 달랐다. 마을 사람 모두가 서로 알 정도로 작은 마을이라 큰 사건도 없던 스털링에 총이 발사된 것이다. 장소는 다름 아닌 스털링 고등학교. 갑작스런 총격에 놀라 뛰쳐나오는 학생들로 인해 학교는 대혼란이 벌어지고 현장에 출동한 경찰들은 체육관 라커룸에서 총을 쏜 아이를 체포한다. 피터 호턴. 17세의 소년이다.




조용하고 평화롭던 스털링 마을이 충격과 혼란의 도가니로 빠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피터의 총기난사로 10명의 아이가 목숨을 잃고 19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으며 정신적 피해를 입은 이는 무수히 많았다. 피터의 어릴적 단짝 친구였던 조지도 라커룸에서 부상을 입은 채 발견된다.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친구 맷의 주검 옆에서. 그러나 사건의 진행과 실마리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목격자인 조지는 충격으로 인해 사건과 관련한 기억을 잃고 만다.




2007년 3월 6일 오전 10시 16분을 전후한 19분간 학교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이 사건을 접한 사람이라면 모두가 이 점을 궁금해 할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사건이 벌어진 19분의 의문을 풀기보다 무엇이, 어떤 일들이 ‘19분의 사건’을 일어나게 했는지에 주목한다. 사건이 벌어진 당일의  긴박함과 충격적인 순간을 서술하기보다 사건의 당사자인 피터가 태어나기 전인 17년 전, (사건) 몇 시간 뒤, 12년 전, 다음날...의 식으로 사건이 일어나기 전과 후, 과거와 현재를 교차해가며 피터와 조지, 그들의 부모와 검사, 변호사를 비롯한 주요 등장인물들을 보여준다. 어느 누구보다 착하고 조용하며 여렸던 소년 피터에게 17년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때마다 피터의 마음은 어떠했는지, 어떤 일이 결정적으로 피터의 손에 총을 쥐어주고 방아쇠를 당기는 끔찍한 사건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는지 담담하면서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사람들은 얘기한다. 왕따를 당했다고 해서 모두가 자살을 하거나 손에 총을 들고 마구잡이로 쏘아대지 않는다고. 그러나 당사자들은 털어놓는다. 자신도 때론 그렇게 하고 싶을 정도였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아이의 부모가 어떻게  그 지경이 되도록 모를 수가 있느냐고. 대체 부모가 어떤 사람이길래 아이를  괴물로 키웠냐고. 그러나 그 부모는 마음속으로 외친다. 아이가 아무 이유도 없이 괴물이 자라진 않아요. 잔인한 범죄를 저지른 아이지만 자신은 최선을 다해 길렀어요. 무조건 사랑하고 보호하며 금지옥엽 길렀는데 어쩌란 말이에요...




전작인 <쌍둥이별>이 그랬듯 이 책 역시 책장은 무척 쉽게 넘어갔다. 1,2권 합해 700쪽을 훌쩍 넘기는 책이지만 몰입감은 두께를 실감할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나 자신이 두 아이의 엄마여서인지 그런지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내 몸과 두 눈은 분명 책을 읽고 있지만 가슴은 계속해서 나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혹시나 내 아이가 피터나 조지와 같은 상황에 처하는 건 아닐까, 혹시나 내가 아이들을 잘못 키우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들 때문에 책장이 줄어들수록 결말에 다가갈수록 가슴은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의 역기를 손에 쥐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 일을 어쩔 것인가.




<19분>은 분명 미국에서 실제 일어났던 총기난사 사건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그러나 책이 담고 있는 건 단순한 총기난사 사건이 아니었다. 현대 사회가 품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 소통의 부재를 다루고 있었다. 나는 과연 가족들과 친구들과, 사회와 제대로 소통하고 있는 걸까. 2권의 표지에 두 사람이 서로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이 뭉클하게 다가온다.




다만 등장인물이 많아 이야기의 흐름이 다소 산만하게 느껴졌던 점이나 마지막 부분, 저자가 충격적인 반전(?)이라며 내놓은 카드가 이미 소설의 초반에 예상 가능했다는 점이 아쉬웠지만 그래도 <19분>이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는 소설이란 점은 분명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콤함이 번지는 곳 벨기에 In the Blue 2
백승선 / 쉼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지난해 봄의 끝자락에서 크로아티아를 만났습니다. <행복이 번지는 곳 크로아티아>를 통해 크로아티아의 오렌지빛 지붕과 성벽을 둘러싼 맑은 물빛 바다, 초록의 신비로운 호수에 매료되어 흠뻑 취했던 기억이 납니다. 언제든 여행하고 싶은 곳에 ‘크로아티아’를 새기는 계기가 되었는데요. 크로아티아의 이국적인 풍경으로 제게 행복을 선물했던 백승선. 변혜정이 이번에 <달콤함이 번지는 곳 벨기에>를 내놓았습니다. 수채화풍의 표지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와 제목이 전편과 흡사합니다. 1편과 비슷한 2편이라 식상하지 않을까 싶지만 그보다 뭔가 색다르리라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고 할까요. ‘TO 오늘도 여행을 꿈꾸는 당신’이란 항공우편(?)을 손에 들고 있자니 두근두근 가슴이 뜀박질을 합니다.




그동안 ‘벨기에’하면 베네룩스 3국(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의 하나로만 알고 있었는데, 책장을 넘기자마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왕국’이란 것과 총 면적이 겨우 우리나라의 경상도 정도라니! 게다가 제가 어린 시절 즐겨봤던 ‘스머프’를 비롯해 풍차 때문에 네덜란드 만화인 줄 알았던 ‘플란다스의 개’ ‘틴틴의 모험’처럼 유명한 만화가 만들어진 곳일 뿐 아니라 르네 마그리트와 루벤스, 오드리 햅번이 태어난 나라라고 하네요.




중세의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한 나라, 벨기에는 예술적인 가치가 높은 중세건축물이 많아 ‘유럽의 보석’이라고도 불린다고 하는데요. 책에서 저자는 브뤼셀, 안트베르펜, 브뤼헤, 겐트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먼저 브뤼셀은 도시 전체가 볼거리가 가득해서 ‘작은 파리’라고 불리는데요. 빅토르 위고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고 했던 ‘그랑 플라스’라는 넓고 아늑한 광장을 통해 이른 곳은 바로 초콜릿! 여러 가지 모양과 빛깔의 초콜릿을 보니 입안에 침이 가득 고이구요. 스머프와 틴틴이란 만화주인공들의 모습에서 어린 시절의 즐거움을 다시금 되살리고 나니 그 유명한 ‘오줌싸개 소년 동상’이 저를 반겨주네요. 안트베르펜은 17세기 최대의 화가 루벤스가 활동한 곳이자 ‘플란다스의 개’의 배경이 되었던 도시인데요. 거리 곳곳에서 ‘손’의 조형물을 만날 수 있어 ‘손’의 도시로도 유명하다고 합니다. 또 성 노르트담 성당에는 ‘플란다스의 개’ 네로가 그렇게도 보고 싶어했던 [성모승천]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브뤼헤는 운하의 도시란 표현 그대로 중세의 건물을 따라 이어진 수로와 푸르고 아름다운 호수가 인상적입니다. 마지막 겐트는 5년마다 꽃 박람회가 열리는 ‘꽃의 도시’이자 자전거가 많아 ‘자전거의 도시’라고도 알려져 있다고 하는데요. 천 년을 넘게 이어져온 시간의 흐름을 자전거를 타고 둘러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더군요.




레고블럭으로 만든 장난감처럼 계단모양의 지붕을 한 아기자기하고 예쁜 건물들, 수로에 거리의 집들이 그대로 비칠 만큼 투명하고 맑은 도시로 이뤄진 맑고 아름다운 나라 벨기에. 사진으로 만나는 풍경임에도 왠지 달콤한 와플과 초콜릿 향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낯설지만 더 이상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나라 벨기에에 꼭 가고 싶습니다. 꽃으로 이뤄진 화려한 카펫. 과연 언제쯤 보게 될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스의 집
수전나 클라크 지음, 서동춘 옮김 / 북노마드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저만 그런가요?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어갈수록 단순한 건망증인지 치매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일들이 생기곤 합니다. 유명배우의 이름이 헛갈리는가하면 외출할 때마다 열쇠며 지갑, 휴대폰을 찾아 온 집안을 찾아 헤맵니다. 얼마전에도 그랬답니다. ‘모로코’란 나라이름에 가장 먼저 떠올린 게 뭔지 아세요? 그레이스 켈리였어요. 아름다운 배우에서 한 나라의 왕비가 된 환상적이고 꿈같은 일화가 생각나서 <페스의 집>을 만날 때 은근히 기대를 했답니다. 모로코의 이야기가 담겼으니 당연히 그 얘기도 수록됐으려니...했는데, 어머나 이게 웬일입니까. 세상에 모‘나’코와 모‘로’코를 그만 착각했지 뭐예요? 글자는 한 자 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하나는 유럽에, 하나는 아프리카에 속해있는 나라인데 그런 엄청난 실수를 하다니...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답니다. 허나, 마냥 의기소침해 있을 순 없지요. 이번 참에 정식으로 모로코와 만나면 되니까요. 그죠?




모로코. 아프리카의 북서단에 위치한 이 나라는 제가 무지해서 그렇지 많이 알려진 나라더군요. 그 유명한 잉그리드 버그만과 험프리 보가트 주연의 영화 <카사블랑카>가 바로 모로코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고 하네요. 몰랐던 사실입니다.




‘중세의 도시’ 페스에서 ‘제 2의 인생’을 꿈꾸는 부부 저널리스트란 표지의 문구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호주의 신문사와 방송국에서 일하는 수전나 클라크와 샌디 매커천이 모로코의 페스에서 제2의 삶을 꿈꾸는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수전나와 샌디에게 모로코의 첫 번째 여행은 배탈과 바가지로 그리 유쾌하지 않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들 부부는 여느 나라보다 깊은 인상을 갖게 되는데요. 그때 그들의 마음을 송두리째 뺏은 것이 바로 페스였습니다. 모로코의 문화와 정신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성벽도시 페스. 미로처럼 끝없이 이어질듯한 좁은 골목길과 하루 5번 첨탑에 올라 기도시간을 알리는 무에진의 구성진 가락이 도시 전체에 울려 퍼지는 곳, 페스.  여행을 마치고 호주로 돌아온 수전나와 샌디는 모든 것이 신비롭고 아름다운  이국적인 풍취로 가득한 페스를 잊지 못합니다. 첫 눈에 반한 연인을 그리워하듯 수전나는 하루에도 수시로 페스를 그리워합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 ‘모로코에 집을 한 채 사면 어떨까?’ 샌디는 아내의 이런 터무니없는 의견에 “페스에서 한번 찾아보지 그래?”라며 응원을 보냅니다. 호주에서 비행기로 하루종일 날아가야 도착하는 곳, 프랑스어 몇 마디 외엔 제대로 된 의사소통조차 할 수 없지만 그들의 페스행을 막진 못합니다.




가지 말아야 할 이유는 이처럼 끝도 없었다. 하지만 모로코, 그 중에서도 페스에 집을 구해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좀처럼 머릿속에서 떠날 줄 몰랐다. 그리고 우리는 사고를 쳤다. - 13쪽. 




이후 책은 그들이 페스에 집을 마련해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음에 드는 집을 어렵사리 발견한 그들은 자신들의 집에 ‘리아드 자니’란 이름을 붙입니다. 작은 정원과 분수대를 갖춘 ‘리아드’식의 집은 바닥에 색색의 타일로 퍼즐이나 기하학적인 문양을 모자이크로 정교하게 만든 ‘젤리즈’를 비롯해 전체적인 원형은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하지만 무슬림 달력으로 1292, 서양달력으론 1875년 이후로 보수하지 않은 집이어서 여기저기 많이 훼손된 상태였습니다. 천장은 구멍이 뚫리기 일보직전이었고 하수구 시설은 그야말로 형편없습니다. 아랍식 전통가옥의 형태를 고스란히 유지시키면서 수도며 배관, 전기 시설처럼 생활에도 편리하도록 복원, 수리를 거치는 과정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습니다. 거기다 인부들은 어찌나 느릿느릿한지, 걸핏하면 꾀부리고 추가비용을 요구하는 그들에게 저자는 적당히 응대하고 부추기면서 ‘리아드 자니’는 조금씩 원래의 모습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결국 해내고 말지요.




인샬라! 신의 뜻대로. 책을 읽다보면 곳곳에서 저절로 이런 말이 터져 나옵니다. 낯선 땅에서 두 번째의 삶은 많은 사람들이 꿈꿉니다. 하지만 막상 꿈을 실현할 단계에 이르러 여러 가지 문제점에 맞닥트리면 많은 이들이 포기하고 마는데요. 수전나와 샌디는 집을 복원하는 것에만 치우지지 않습니다. 페스에서 살아가는 위해 그들은 모로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일상을, 결혼이나 할례, 라마단 같은 의식이 치러지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자신과 그들의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그 다름을, 오래도록 이어져온 전통의 가치를 유지하고 지켜나가려는 모습은 인상적이었습니다.




나는 페스의 건물들을 사랑한다. 그곳에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도 사랑한다. 나무 한 토막, 벽돌 하나하나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지고, 그 위에 손으로 무늬가 새겨지고 세공되는 곳, 인간의 손길로 집을 짓는 그 땅을 영원히 사랑할 것이다. - 387쪽.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럽과 13킬로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모로코. 그리고 세상에서 유일하게 14세기처럼 살아갈 수 있는 곳, 페스. 이 책을 통해 처음 만났지만 그곳의 신비로움이 왠지 제게도 전해지는 듯합니다. 다만 책에는 모로코와 페스, 저자의 집을 복원하는 과정이 담긴 사진을 중간중간 수록해놓고 있는데요. 몇 군데에 모아둔 사진을 본문의 내용과 관계된 대목에 실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깐깐한 독서본능 - 책 읽기 고수 '파란여우'의 종횡무진 독서기
윤미화 지음 / 21세기북스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른 이의 독서기록이나 서평집을 볼 때마다 의식하지 않아도 내가 읽은 책이 몇 권이나 될지 꼽아보게 된다. 상대방과 나, 저자와 나 사이에 공통점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싶어선데, 저자와 겹치는 책이 한 권도 없을 때부터 다섯 손가락도 안되는 적도 있었다. 해서 <깐깐한 독서본능>을 펼치면서 이번엔 과연 몇 권일까. 세어봤다. 그랬더니 자그마치 10권! 양 손 열 손가락을 꽉 채웠다. 이얏호! 만세!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사실 이 책의 저자는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도 인기 블로거인 파란여우님이다. 그리고 내게 이웃(?)이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 맘대로 이웃을 삼아버린 거라고 할까? 알라딘에 초라한 서재를 꾸리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흥미롭고 좋은 글이 많은 서재를 언제든 내 맘대로 들락거릴 수 있도록 즐겨찾기로 등록해놓는 거였는데, 그런 서재의 주인장 중에 바로 파란여우님이 계시다. 이 책과 나의 독서이력이 겹쳐지는 합일점이 많은 건 아마 그 때문이리라. 그럼 이미 내용을 다 알텐데 뭐하러 또 다시 읽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처음엔 나도 그 점을 염려했다. 그런데 책을 받고 나니 내가 미처 챙겨보지 못한 글이 얼마나 많은지...예전에 봤던 글, 마우스로 휙 하니 스쳐지나가며 봤던 글을 모니터가 아닌 책으로 만나니 기분이 새로웠다.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는 사람 중엔 어느 특정한 분야의 책만을 고집하는 걸 자주 보게 되는데, 저자는 그 반대였다. 자신이 ‘종잡을 수 없는 독서가’라고 밝혔듯이 한국문학, 외국문학, 고전․해석, 인문․사회, 인물․평전, 환경․생패, 문화․예술, 역사․기행, 만화․아동 이렇게 다양한 분야의 책을 골고루 만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제목에 나와있듯 저자는 자신의 독서를 ‘깐깐한 독서’라고 말한다. 한 권의 책을 읽더라도 요모조모 따져보고 뒤집어 보고 다시 생각해보는 책읽기. 그걸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서평공책이었다. 책을 읽을 때면 항상 서평공책을 준비해놓고 틈틈이 기록하면서 책과 더 가깝게,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고 하는데 나도 한때 책 읽으며 공책에 기록했던 적이 있어서 아는데 웬만큼 부지런하지 않으면 못하는 일이다. 그래설까. 이 책으로 다시 만난 파란여우님의 글은 수박겉핥기 식의 독서가 아니라 한 권의 책이라도 저자 자신만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 책을 통해 어떤 걸 생각해보고 느낄 수 있는지, 인상깊게 봤던 점이나 아쉬운 점은 무엇인지 세세하게 꼽고 있었다.




또 한 분야의 책소개가 끝나면 ‘파란여우가 생각하는 책’이라든가 ‘파란여우의 책을 내 것으로 만드는 서평쓰기’, ‘파란여우가 좋아하는 국내도서’. ‘국외도서’, ‘국내작가’.‘국외작가’를 수록해놓아서 흥미롭기도 하고 내가 안 읽었거나 모르는 책, 작가에 관한 대목은 포스트잇으로 표시를 해두기도 했다. 특히 내가 취약한 고전․해석, 인물․평전, 문화․예술 분야는 언제든 찾아볼 수 있도록 노트에 메모했다.




5년간 천 권의 책을 읽었다는 저자의 책을 놓으며 나의 책읽기를 돌아보니 지난 한 해 200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 단순히 책의 수만을 따지면 적지 않은, 많은 책이다. 이런 페이스를 4년 더 유지하면 저자처럼 천 권을 달성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닌 듯하다. 당장 작년의 책읽기만 보더라도 그 중에 정말 내 것으로 만든 책은 얼마나 될까. 저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때론 그에 반박할 수 있도록 깊이 읽은 책은 몇 권이나 될까...의문이 든다. 아마 형편없겠지. 그렇다고 여기서 갑자기 우울해지거나 책읽기를 포기할 순 없다. 지금이야 비록 어중이 떠중이 독서가에 불과하지만 좀 더 많이 생각하고 좀 더 깊이 고민하다보면 언젠가 나도 책읽기의 고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저자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하고 움직이기 위해 책을  연장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책에 많이 ‘찝적’대라고. 실로 확실한 표현이다. 책이여. 어서 오라. 이 내가 사정없이 찝적대주겠노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