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프루스트 : 독서에 관하여 위대한 생각 시리즈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유예진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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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잡으면 끝을 본다.’ 예전엔 그랬다. 한 번 읽기 시작한 책은 끝까지 읽어야 된다고, 그걸 당연하게 여겼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읽는 도중에 덮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 처음 기대에 못 미치거나 비슷한 내용의 글이 반복되는 자기계발서, 아무리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을 때인데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후자의 경우였다. 모두 11권인 책은 1권에서부터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깊은 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나’가 두서없이 떠오르는 기억 속에서 헤매고 다니는 것처럼 그것을 지켜보는 책 밖의 나도 기억의 미로에 던져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읽다가 덮고, 읽다가 덮고...를 몇 번 반복하다가 그만 밀쳐두고 말았다. 언젠간 읽겠지...하면서.

 

마르셀 프루스트의 이름이 표지인 <독서에 관하여>가 출간되었을 때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완독하지 못한 씁쓸함. 결코 유쾌하지 않은 경험. 내가 이정도 밖에 안 되나 하는 자괴감 같은 것들이 불쑥 고개를 들었지만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았다. 프루스트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나면 그의 작품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뿔싸! 내가 크게 오해를 했다. 아니, 잘못 알고 접근했다는 게 옳은 표현일 듯하다. <독서에 대하여>는 프루스트의 책읽기에 대한 글이 아니다.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을 쓰기 이전에 번역가와 미술평론가로도 활동했다고 한다. 특히 존 러스킨에게 매료되어 그의 책을 두 권 번역하고 역자 서문을 남겼는데 ‘독서에 관하여’는 러스킨의 <참깨와 백합>, ‘러스킨에 의한 아미앵의 노트르담’은 <아미앵의 성서>에 덧붙인 글이다. 즉, 프루스트가 러스킨의 글을 번역하고 나서 독자들을 위해 책의 내용이나 저자의 의도 같은 걸 설명한 역자 서문과 유명 화가, 미술에 관한 글을 수록된 책이 바로 <독서에 관하여>이다.

 

문제는 이 글, 역자 서문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이다. 일단 서문치고는 글의 분량이 제법 길다. 어린 시절의 책읽기와 일상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으로 시작된 ‘독서에 대하여’는 러스킨의 <참께와 백합>에 수록된 두 개의 강연에 대해 설명한다. 도서관 설립을 지원하기 위해 옛 성현의 경지에 이르는 길은 오직 독서이며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 독서를 주제로 한 ‘왕들의 보물’과 여성은 저마다 마음의 화원을 가지고 있다면서 여성의 교육과 의무, 역할에 대한 강연 ‘여왕들의 정원’에서 드러난 러스킨의 생각과 주장을 짚어주면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더해서 전하고 있다. ‘러스킨에 의한 아미앵의 노트르담’은 아미앵의 여행안내서라고 할 수 있는 <아미앵의 성서>에 붙인 서문인데 본문에서 러스킨이 썼던 표현과 여정에 자신의 경험을 더해서 풀어놓았다. 러스킨과 프루스트가 추천하는 여정이란 어떨지...상상해봤지만 아미앵을 가보지 않은 나로서는 쉽지 않았다.

 

이후로는 샤르댕, 렘브란트, 귀스타브 모로, 모네 같은 당시의 유명 화가와 미술작품에 대한 글이 수록되어 있는데 미술평론가로서의 프루스트를 만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나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감흥을 무척 세밀하고 아름답게 표현해 놓아서 때론 그림이 마치 눈앞에 펼쳐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흑백이지만 본문에 수록된 그림을 살펴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프루스트의 글은 역시 쉽지 않았다. 수식어가 많은 긴 문장에 본문의 문단 나눔도 거의 없다시피 해서 책을 읽다가 한 눈이라도 팔면 다시 되짚어가며 읽어야했다. 본문의 아래에 위치한 각주도 시선을 분산시켜 책의 몰입을 방해했지만 꾹꾹 눌렀다. 러스킨에 매료되어 그의 뒤를 따르듯 했던 프루스트가 자신만의 색깔과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프루스트의 문장은 아직 낯설지만 한편으론 기대가 된다. 이후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다시 만나게 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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