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글 쓴 남자, 안개 속의 살인
시마다 소지 지음, 이윤 옮김 / 호미하우스 / 2014년 1월
평점 :
품절


세상은 너무나 넓어서 내가 읽어야 할 책도, 만나야 할 작가도 많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시마다 소지. 그를 처음으로 만났다. <점성술 살인사건>을 비롯해서 <기울어진 저택의 범죄>, <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 등 지금까지 유명한 작품이 많이 출간됐지만 정작 만나지 못했다. 일상 속에서 해야 하는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먼저 해버리는 그릇된 습관이 몸에 배어서일까. 책읽기도 그랬다. 읽어야지,하는 책보다 읽고 싶다,는 책에 먼저 손이 갔다. 새해부터는 책 읽기의 패턴을 좀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고 그 다짐 덕분에 시마다 소지와의 인상적인 만남을 갖게 됐다.

 

짙은 밤안개가 내려앉은 날 밤. 낡은 자전거를 끌고 마을을 순찰하던 다나카 순경은 소스라치게 놀란다. 가로등에 방금 지나간 사람의 얼굴이 비쳤는데 어딘가 이상했다. 한밤중에 검은색의 사각 고글을 쓴 것도 이상했지만 그보다 렌즈 속에 비치는 남자의 눈이 붉게 물들어 있는게 아닌가. 더욱 충격적인 건 고글 안의 피부가 마치 뜨거운 열에 녹아내려 검붉은 근육이 노출된 것처럼 보였다. 어딘가 기괴하고 괴이한 모습이지만 다나카는 그것이 짙은 안개로 인한 환상일거라 여기고 지나치고 만다. 하지만 담배 골목에서 벌어진 담배 가게의 주인이 살해되는 사건이 터지면서 그것이 환상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범행 현장은 포장이 벗겨진 새 담배들로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었다. 그리고 빳빳한 5천 엔짜리 신권이 한 장 발견되는데 지폐의 위쪽에 노란색 줄이 그어져 있는게 것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다. 하지만 현장에서 고글을 쓴 20대의 남자를 봤다는 목격자의 말에 다나카는 좀전에 자신과 마주쳤던 사람을 떠올린다. 수사팀은 담배골목의 나머지 두 가게에서도 노란 줄이 그어진 5천 엔짜리 신권을 발견한다. 그리고 뜻밖의 말을 듣는다. 비오는 날 유령이 담배를 사러 온다고.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노인의 말이지만 무언가 의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유령은 뭐고, 지폐의 노란 색 줄은 도대체 무얼까.

 

한편 ‘나’는 중학교 때 인적이 드문 마을의 숲에서 의문의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한 끔찍한 기억을 갖고 있다. 극심한 공포와 혐오감이 뒤섞인 일은 누구에게 알리지도, 도움을 요청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고스란히 트라우마로 남게 된다. 짙은 어둠에 잠식된 마음은 서서히 병들어가기 시작했는데 특히 안개가 끼는 늦은 밤엔 고글을 쓰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부분적으로 기억이 끊기고 환각과 환청에 시달리게 되는 일도 잦았다. 그러던 어느날 스미요시 화학연구소에서 푸른 섬광과 함께 핵분열의 연쇄반응에서 일어나는 임계사고로 인해 그는 물론 함께 작업하던 사람들이 방사능에 노출되는 피폭을 당하게 되는데...

 

어디에나 떠도는 이야기가 있다. 내가 어릴 적엔 공동묘지였던 곳에 학교를 지어서 비오는 날에는 귀신이 나온다거나 동네에 빈집으로 방치된 집 앞을 지날 때는 원통하게 자살한 원혼의 부름에 홀릴 수 있으니 귀를 막고 지나야 된다...등 상상할 수 있는 갖가지의 괴담들이 있었다. 그런 것처럼 소설도 마을에 떠도는 괴담에 검은 고글을 쓴 피부가 녹아내린 의문의 인물이 벌이는 미스터리한 살인이 아닐까 했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줄곧 이것들이 과연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의문을 품었는데. 그런 것들이 조금씩 가지를 뻗어나가고 서로 연결이 되고 급물살을 어느새 소설은 예상치 못한 결말로 치닫고 있었다.

 

<고글 쓴 남자, 안개 속의 살인>읽는 내내 우울했다. 어딘가 질척한 곳에 발을 딛고 서 있는 것처럼 불쾌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언뜻 발을 빼고 싶지만 그마저도 할 수 없어 오도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못하는 상황이라고나 할까. “당신은, 나인가?”하고 누군가 속삭이는 소리가 맴도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결코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했지만 이젠 인정해야겠다. 시마다 소지, 그에게 완전히 휘둘리고 말았다는 걸. 이 느낌이 사그라들기 전에, 그를 또 한 번 만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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