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풍론도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남희 옮김 / 박하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올해도, 역시. 눈 구경 한 번 못하고 겨울이 지날 모양이다. 사는 곳이 따뜻한 남쪽 도시인데다 바닷가와 가까운 곳이라 다른 동네에선 눈이 와도 하늘에선 눈송이 하나 떨어지지 않는다. 어쩌다 눈이 오더라도 잠깐 흩뿌리는 정도거나 밤새 조금 내리고 말아서 눈 내리는 날의 정취를 느끼지 못할 때가 많은데. 눈과 인연 없는 동네에서 사는 것의 보상이라도 되려는지 요즘 읽는 책마다 눈, 눈, 눈이다. 이순원의 <첫눈>, 요 뇌스뵈의 <스노우맨>, 히가시노 게이고의 <질풍론도>까지. 눈은 펑펑 내리다 못해 눈 무더기에서 뒹구는 격이 되어 버렸다. 이런 걸 대리만족이라고 해도 되려나?

 

이제 책 이야기를 해보자. 저자는 히가시노 게이고.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다. 사람의 심리를 절묘하게 파헤친 사회파 추리소설부터 일상의 따뜻함이 묻어나는 소설까지 저자의 이름 그 자체가 베스트셀러 보증수표다. 그가 겨울 분위기가 완연한 작품을 내놓았다. 그것이 바로 <질풍론도>. '질풍', 몹시 빠르고 거세게 부는 바람. ‘론도’, 자주 반복되는 주제부와 사이의 삽입부로 이뤄진 음학의 형식으로 경쾌한 춤곡에 쓰인다. 즉, 바람이 거세고 빠르게 리드미컬하게 분다? 이 정도로 해석하면 될 듯하다.

 

소설은 눈이 내리는 고요한 날, 누군가 나무 밑동의 눈을 파서 무언가를 숨기는 것에서 시작된다. 자신이 묻은 것의 위치를 알리기 위해 작은 갈색 테디 베어 인형을 걸어둔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됐다는 걸 확인한 남자는 눈 쌓인 설원을 경쾌하게 활주한다. 그리고 회심의 미소. 남자가 숨긴 것은 과연 무엇일까.

 

한편 다이호대학의 국립감염증 연구소는 조용히 술렁이기 시작한다. 구리바야시 연구원이 연구소의 실험실 금고에 보관 중이던 생물병기가 일부 사라진 걸 알아챈 것. 같은 시각, 도고 부장은 자신에게 도착한 메일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메일 발신자는 연구소에 근무하던 구즈하라. 그는 자신이 담당하고 있던 생물 병기 K-55를 훔쳤고 그것을 의문의 장소에 감췄음을 밝힌다. 문제는 생물병기인 K-55가 지극히 적은 양으로도 호흡기로 감염되어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탄저균을 초미립자로 가공한 것이다. 그래서 만약 외부에 노출될 경우 탄저균보다 더 엄청난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강력한 무기다. 그것을 구즈하라가 훔쳐내어 돌려받고 싶으면 3억 엔을 내놓으라고 만약 자신의 요구를 거스르거나 일정시간이 지나면 물건의 안전은 보장하지 못한다고 협박한다.

 

 

갑작스런 사태에 구리바야시와 도고는 당황한다. 자칫 잘못하면 대량 감염으로 번질 수 있기에 구리바야시는 경찰에 신고할 것을 종용하고 도고 부장은 탄저균을 초미립자로 가공한 것 자체가 불법이기에 조용히 마무리 짓기를 원하는데. 그런 와중에 뜻밖의 연락을 받는다. 구즈하라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요구 금액을 낮춰서라도 구즈하라로부터 K-55를 무사히 건네받는 것이 최선이라 여겼기에 그들은 순간 당황한다. 이제 어떻게 찾지? 눈 쌓인 들판에 나무, 그리고 갈색 테디 베어가 찍힌 사진 몇 장, 이것만 보고 여기가 어딘 줄 알고?

 

K-55 보관용기가 섭씨 10도 이상 되면 깨어지는데다 위치를 나타내는 발신기의 밧데리조차 제한되어 있고 그 전에 K-55를 되찾아야 하는 절대절명의 순간을 맞았다. 도고는 구리바야시에게 특명을 내린다. 어떻게 해서든 K-55를 찾아오라고. 과연 구리바야시는 K-55를 무사히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사건이 터지자마자 범인이 사망해버리는 바람에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지방 한 도시의 스키장, 그것도 사람들의 통행이 제한된 구역의 드넓은 설원의 어딘가에 감춰진 K-55를 구리바야시가 어떻게 찾아낼지에 주목해서 책을 읽어나갔다. 그런데 이야기는 생각했던 것보다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추리소설은 언제나 마지막 순간에 닥칠 대반전을 은근히 기대하며 읽기 마련인데 다소 느슨한 느낌이랄까? 문제의 생물 병기가 외부에 노출되는 순간 인근 사람은 물론 더 먼 곳까지 퍼지는 대재앙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긴장감을 갖게 하는 유일한 요소였다고나 할까? 지금까지 읽었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중에서는 평이한 느낌이 들지만 그래도 이 겨울, 새하얀 설원을 스키, 혹은 스노보드를 타고 리드미컬하고 경쾌하게 활주하는 기분을 책으로나마 만끽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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