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주의 인물
수잔 최 지음, 박현주 옮김 / 예담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리(Lee)는 헨들리가 폭탄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그를 얼마나 싫어했는지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날것의, 한 번도 파헤쳐보지 않은 생각의 광맥이 폭발로, 순간 훤히 드러나버렸다. - 11쪽.

 

책은 시작부터 초 강경수로 나왔다. 폭탄이 터졌고. 폭발로 인해 누군가(헨들리)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지만. 리(Lee)는 헨들리를 싫어한다. 아니, 미워한다.

 

에이, 뭐야. 답이 나왔네. 리가 범인이네!

딩동댕~!하면 좋겠지만 그러면 이야기가 안된다.

아~니. 그럼 뭐야? 누구냐고.

바로 그 ‘뭐’이자 ‘누구’인지를 찾아내기 위한 책이다. <요주의인물>은.

 

소설의 주인공은 리. 육십 대 후반의 수학자이자 대학교수다. 냉소적이고 사교성이 없는 백발의 교수는 대체로 학생들에게 인기가 없는 법. 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검은 잉크로 채운 몽블랑 만년필을 손에 쥐고 기다렸다. 학생들이 교수실 문을 열고 들어오기를, 그래서 자신에게 상담을 요청하기를. 언제나 교수실 문을 살짝 열어두고서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지만 학생이 리의 방을 찾는 일은 없었다. 학생들은 리를 외면했다. 옆방의 헨들리는 달랐다. 젊음과 빛나는 재능을 겸비한 교수가 머무는 공간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헨들리와 학생들이 이야기를 나누거나 간혹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은 벽 너머의 리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런 날들이 이어지면서 리는 헨들리를 미워하게 됐다.

 

그런 어느 날, 헨들리에게 소포가 하나 배달된다. 두꺼운 마분지로 만든 작은 상자 에는 개봉하면 터지도록 설계된 폭탄이 들어있었다. 연구실에서 혼자서 조용히 상자를 열어보던 헨들리는 엄청난 폭발에 말려들었고 옆방의 리는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폭발로 아수라장이 된 가운데 누군가 처음으로 리의 연구실로 들어왔다. 폭발물 처리반이었다.

 

작은 도시의 대학에서 벌어진 폭발 사건은 미국 전역을 뒤흔들었고 학교 역시 충격으로 어우선했다. 그리고 사건 이틀 후 리에게 발신인이 분명하지 않은 편지가 도착한다. 리를 ‘자네’라 칭하면서 ‘오랫동안 자네를 인정하고 존경해왔다’는 ‘옛날 동료이자 친구’의 편지에 리는 혼란에 빠지고. 어느새 자신이 사건의 ‘요주의인물’이 되어 버린 것을 알게 되는데....

 

누가 폭탄을 보냈는가. 범인의 목적은 무엇인가. 소설은 이 두 가지를 추적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리는 ‘옛날 동료이자 친구’라는 범인을 찾기 위해 지난 과거, 오래전의 친구 게이더와 그의 아내였지만 리와 사랑에 빠져 두 번째 아내가 된 아일린을 비롯한 과거 속의 인물과 일들을 돌아보게 된다. 기회의 땅 미국에서 이민자임을 거부하고 미국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몸부림쳤던 리. 그런 그에게는 가족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40여 년이 지났음에도 미국이란 나라는 자신을 여전히 미국인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지 않는 사실을 깨닫고 좌절한다.

 

소설은 갑작스런 폭발로 아수라장이 된 현실과 리의 과거가 서로 엇갈리고 겹치듯이 진행되는데 템포가 무척 느리다. 폭발 사건의 범인을 추척해 가는 미스터리적인 요소가 있긴 하나 전체적인 작품에서 볼 때 그건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지루할 만큼 길게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다 보면 어느새 다음 굴곡에 다다라 있었다. 미국이란 사회에 스며들고자 했지만 물 위에 뜬 기름처럼 외면당한 이의 좌절과 처절한 회한, 회오와 같은 심리를 저자는 마치 미세한 결을 들여다보듯 세밀하게, 때로는 지나치다 싶을만큼 철저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책의 저자인 수잔 최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한국계 소설가라는 것과 이전에 출간된 작품이 국내에 번역되기도 한 미국 문단에서 주목받는 작가라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됐다. 이것뿐이었다면 난 아마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거다. 읽을 책이 얼마나 많은데, 내 나이에 몇인데, 섣부른 모험은 하고 싶지 않으니까. 하지만 표지를 보는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무성한 잎을 떨구고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나무들이 줄지어 선 거리의 벤치에 지팡이를 짚고 앉은, 검은 안경 외에 누군지조차 알아볼 수 없는 사람. 갑자기 그가 품고 있는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한없이 소슬한 거리에 외로이 앉은 그의 옆에 앉아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싶어졌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결코 쉽지 않은 책이었다. 하지만 ‘참을성 있는 독자에게는 충분한 보상을 주는 작품’이라는 번역자의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며칠 전에 봤던 인터넷 기사에 따르면 소설을 읽으면 뇌의 특정 부위에 변화가 나타난다고 한다. 뇌세포의 변화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마치 소설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느끼게 한다는데 이런 현상은 책을 읽고 나서도 며칠동안 지속된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책을 읽는 내내, 책장을 덮고 나서도, 그리고 지금 이순간도 나는 왠지 삭막하고 스산한 벌판에 외로이 서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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