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두 갈래로 길게 땋아 내린 머리, 흰 상의. 보이는 건 오로지 뒷모습뿐인데도 왠지 알 것 같다. 단정한 차림새, 뒷목의 가녀린 솜털...에서 여인이 되기 이전의 소녀의 앳된 모습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소설의 내용’이었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이란 제목과 십대의 소녀. 대체 어떤 이야기일까.
책은 양엄마인 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카밀라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아내가 죽은지 2년도 되지 않았지만 젊은 여인과 재혼을 서두르는 양아버지는 카밀라의 어린 시절 물건들을 보낸다. 커다란 박스로 여섯 개나 되는 물건들을 쌓아두고만 있던 카밀라는 며칠 후 하나의 박스에서 손때 묻은 낡은 곰 인형을 발견하고 솟구치는 슬픔에 눈물을 쏟아내고 만다. 그리고 무심코 찾은 극장에서 한 남자, 유이치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카밀라의 출생의 비밀(십대 미혼모에게서 태어난지 6개월 밖에 안 되었을 때 미국인 부모에게 입양되었다)을 모르는 유이치는 어느날 카밀라의 유년의 추억이 담긴 박스를 살펴보면서 카밀라에게 글을 써보라고 말한다. 카밀라가 매일 추억의 물건을 소재로 써내려간 글은 자전소설로 출간되고 이어 그녀는 출판사로부터 책에 수록된 사진을 바탕으로 논픽션을 써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그 제안이 ‘운명이 부르는 소리’라고 여겼던 카밀라는 유이지와 함께 진짜 집, 엄마에게로 돌아가기 위해 길을 나선다. 낡은 사진과 편지 한 장을 들고.
드디어 고향, 진남에 도착한 카밀라는 자신의 진짜 엄마가 다녔다고 짐작되는 학교, 진남여고를 찾는다. 하지만 그녀의 일행을 기다리는 것은 또 다른 비밀이었다. 진짜 엄마의 비밀을 알려줄 인물, 진남여고의 교장은 카밀라의 주장을 거짓으로 치부해버린다. 진남여고의 학생 중에는 순결의식을 치르기 때문에 십대 미혼모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실망한 카밀라는 신문사를 찾아가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고 신문에 게재하는데 이야기하고 이후 친모와 같은 학교를 다녔다는 이가 찾아와 충격적인 얘기를 전해준다. 카밀라의 엄마인 정지은은 분명 진남여고를 다녔으며 오래전에 죽었다는 것. 더 자세한 걸 알고 싶으면 교장을 다시 만나라는 것. 카밀라는 과연 자신의 출생과 친모의 죽음에 관한 진실과 비밀을 알게 될까...
‘카밀라’, ‘지은’, ‘우리’로 나뉘어진 책은 미국과 한국의 남도, 일본과 동남아를 배경으로, 현재와 과거를 오가면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어찌보면 드라마에서 흔히 다루어지는 것이지만 책은 그 이상의 것을 담고 있었다. 정희재(카밀라의 한국이름)의 출생의 비밀과, 그녀의 엄마인 정지은의 이야기가 시점이 수시로 변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서 이야기에 빠져 책을 읽다보면 나중에 다시 앞으로 돌아가 되짚어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정희재의 친부가 누구인지를 추적해가는 분위기 속에서 저자는 자신을 낳은 엄마를 그리워하는 희재와 뱃속에 품은 아이를 마음껏 사랑해줄 수 없었던 지은의 아픔을 말한다. 서로 가깝다고 여겼던 이들이 어느 순간 가장 멀게 느껴질 만큼 돌아서버리게 되는 순간의 안타까움과 슬픔도 저자는 담담한 말투로 전한다. 아픔과 슬픔을 꾹꾹 누르고 쓴 글이어서일까. 그만큼 더 간절하게 와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