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 오가와 요코 컬렉션
오가와 요코 지음, 권영주 옮김 / 현대문학 / 2011년 11월
평점 :
품절


 

천재 수학자였지만 불의의 사고로 기억이 80분밖에 지속되지 않았던 사람이 생각납니다. 자신의 한계를 알기에 그는 자신이 입는 옷과 집안 여기저기에 메모지로 도배를 하듯 했지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더 이상 만날 일이 없어 속이 후련하던 수학, 수식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해 준 소설 <박사가 사랑한 수식>. 평범하지 않은 박사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일상을 바라보며 잔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는데요.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저자 오가와 요코의 새로운 이야기가 출간되었습니다.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인데요. 왼손으로 고양이를 안고 오른손에 코끼리의 꼬리를 쥔 소년이 깊은 바다 속을 잠수하는 듯한 모습은 호기심과 함께 이번엔 과연 어떤 이야기일지 기대를 불러 왔습니다.




소년은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붙은 채 태어났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났음을 알리는 첫 울음마저 터뜨리지 못한 아기에게 수술이 행해졌습니다. 원래 붙은 것 마냥 꼭 맞물린 입술은 절개한 다음 정강이 피부를 이식해서 붙였는데요. 그 때문에 소년의 입술에선 솜털이 자랐고 자연히 또래 아이들에게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소년에겐 부모도 친구도 없었어요. 할아버지, 할머니, 남동생이 유일한 가족이었는데요. 그런 소년에게 어느 날 운명적인 만남이 다가왔습니다.




학교 풀장에서 죽은 남자에 대해 알고 싶어 찾아간 버스 회사의 독신자 기숙사. 소년은 그곳 마당에서 ‘회송’버스를 개조해서 살아가는 거구의 남자를 만나는데요. “서두르지 마라. 꼬마야”하고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남자를 통해 소년은 나무로 만든 왕을 쓰러뜨리는 게임, 체스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체스 테이블 아래로 기어들어가 체스말 중 하나인 ‘폰’이란 이름을 한 흑백점박이 고양이를 안고서. 하지만 단 것을 좋아하던 마스터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면서 소년은 큰 상처를 입습니다. 몸집이 커지는 것에 두려움과 공포를 품은 나머지 스스로 성장을 멈추게 된 거지요. 입술은 원래 맞붙어서 태어났던 때처럼 여간해선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어느 날 한 남자가 소년을 찾아옵니다. 그는 소년에게 퍼스픽 해저 체스클럽에서 나무 인형을 조종하며 체스를 해달라고 제안합니다. 누구에게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도 없고 자신의 체스 실력을 뽐낼 수 없는 일이지만 소년은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소년이 체스의 바다에 잠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지요. ‘반상의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알렉산드르 알레힌 인형, ‘리틀 알레힌’이 되어 소년은 우주를 구성하는 입자수보다 많은 10의 123제곱수에 이르는 고 8X8 모눈의 바다를 깊이, 자유롭게 유영하기에 이릅니다. 상대를 제압하고 이기기 위한 체스가 아니라 시를 짓듯 아름다운 체스를 펼치는 ‘반하의 시인’으로 불리게 됩니다.




운명처럼 만난 마스터와 체스를 통해 자신만의 인생과 삶을 펼쳐나간 소년의 이야기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 이 책은 독특하게도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이름’이 없습니다. ‘리틀 알레힌’ ‘마스터’ ‘미라’ ‘늙은 영양’처럼 그저 그를 상징하는 것이 주어졌을 뿐인데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데 전혀 어려움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각각의 인물과 본문에 수시로 등장하는 체스경기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작지만 결코 후퇴하지 않는 용사 ‘폰’을 좋아한 소년. ‘비숍의 기적’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기보를 남긴 리틀 알레힌. 그의 이야기를 만나고 돌아서면서 가슴 한 켠이  따뜻한 온기로 가득차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체스는 모르지만, 킹, 퀸, 비숍, 나이트, 룩, 폰의 역할도 규칙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의 체스 테이블 앞에 앉고 싶어집니다. 오늘밤 폰의 목에는 낡은 은색 방울이 달려 있을까요?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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