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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경 - 개정판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0년 12월
평점 :
오랜만에 앨범을 찾아 펼쳤다. 디지털 카메라를 구입한 이후로 사진을 인화해서 앨범에 정리하는 일이 번거로워 그만뒀지만 그전엔 카메라로 일상의 모습들을 곧잘 담았다. 어색함이 가득 묻어나는 표정과 몸짓의 사진을 보며 그때 그 날을 떠올리곤 했다.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 사진이. 결혼 전과 후 두 번에 걸쳐 남편과 찾았던 해인사. 일주문을 지나고 봉황문, 해탈문을 지나 경내를 둘러보고 나서 여기가 바로 팔만대장경이 있는 곳이라며 그 전각 입구에서 사진을 찍었다. 딴에는 최대한 자연스런 포즈라고 하지만 차렷 자세나 다름없는 모습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인물 뒤로 보이는 전각에 초점을 맞추고 그 속에 고이 모셔져 있을 팔만대장경을 생각했다. 순간 무수히 많은 이들이 떠올랐다. 수기대사와 장균, 근필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초승달이 어스름하게 산중을 밝히는 속에 걸음을 숨 가쁘게 내달아가는 이가 있었다. 그는 한강을 넘은 몽고군이 공격 목표인 부인사 경판전을 향해 성큼 다가왔음을 알린다. 세찬 바람 앞에 언제 꺼질지 모르는 등불이 되어 버린 상황 속에서 부인사의 주지스님과 인근 사찰의 원승들, 민간인 원병들은 목숨을 걸고 판전을 지키기에 나선다. 하지만 10만 기병의 몽고군을 상대하기엔 무리였다. 결국 적의 불화살에 판전은 불길에 휩싸이고 부인사는 사흘밤낮 불타오르고 만다.
대장경을 지키려다 수많은 승려와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강화도로 천도한 고종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교정별감인 최우가 중신들을 비롯한 내관에게도 함구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백성들의 소식이 궁금한 고종이 미행을 고집하기에 이르자 그제야 최우는 고종에게 전황을 전한다. 몽고군이 한강을 건넜고 부인사가 전소되었다는 한 달 전의 소식을 마치 방금 일어난 일인 것처럼 거짓으로. 이에 고종은 몸져눕고 중신들에 대한 노여움이 깊어지자 최우는 대안을 내놓기에 이른다. 불타버린 부인사 대장경을 다시 판각하자고. 예전의 대장경을 능가하는 대장경을 새로 파자고. 그것이 바로 국난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고종의 대장경 판각 불사 소식에 수기대사는 불편한 속내를 드러낸다. 불사는 적의 침입을 막는 도구가 아닐뿐더러 난리를 겪는 백성들에게 또다시 큰 부담을 지우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기대사가 당시 최고의 고승이라 하더라도 왕명을 거역할 순 없었다. 새로운 대장경 판각 불사의 책임자가 되어 어떤 경전을 수록할 것인지에서부터 필생과 각수, 판목의 단계를 거치는 기나긴 대작업에 들어간다. 여기에 전쟁 통에 부모님과 형제를 잃은 장균과 대장경을 지키려다 부인사가 불타오르는 최후의 모습을 목격한 목수 근필을 비롯한 많은 백성들이 대장경 불사에 힘을 합하기에 이른다.
책을 보면서 많이 놀랐고 부끄러웠다. 팔만대장경을 판각하는 과정이 얼마나 복잡하고 까다로운지. 대장경을 판각하는데 쓰는 나무를 고르고 선별하는 과정도 그렇지만 그것을 바닷물에 2년간 담그고 소금물에 삶아 바람에 건조하는 과정을 거치다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대목이었다. 이렇게 정성에 정성을 기울여야 하나의 판각이 완성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을 오직 자신들의 입지와 정치에 이용하려고 했다니, 안타까웠다. 수많은 백성들의 정성과 노력, 희생을 바탕으로 대장경이 탄생하는 과정은 실로 감동적이었다.
우리의 대장경은 ‘아름다움’으로 대표된다. 한 자 한 자 글을 쓸 때마다 절을 하며 정성을 들인 결과 대장경의 글자는 마치 한 사람이 쓴 것처럼 일정하고 오자나 탈자 하나 없이 완벽한 세계 불교 역사상 가장 뛰어난 대장경이라고 한다.
2011년, 올해는 고려대장경의 간행을 시작한지 꼭 천 년이 되는 해라고 한다. 그래서 다가오는 9월부터 45일간 대장경이 보존된 경남 합천 가야산 일대에서 ‘대장경 천년 세계문화축전’이 열린다고 해서 기대가 된다. 예전엔 남편과 나, 둘만의 여행이었지만 올해는 두 아이와 함께 꼭 가보리라. 이번엔 어색한 차렷 자세를 탈피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