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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놀이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0년 11월
평점 :
“당신 너무 오래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소?”
어느 날 갑자기 걸려온 의문의 전화. 그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느닷없이 걸려온 전화로 인해 그가 그동안 쌓아온 부와 명예, 평화로운 일상, 승리자로서의 삶은 금이 가기 시작하고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살얼음판이 되고 말았다.
황복만. 건실한 기업의 사장인 그에게는 비밀이 있었다. 자신도 잊고 있을만큼 깊숙한 내면에 꼭꼭 묻어두고 30년 가까이 숨겨둔 비밀. 얼굴을 바꾸고 고향도, 이름까지 버리면서 외면하고자 했던 과거. 바로 ‘배점수’로서의 삶이었다. 그의 가족은 오랜 옛날 큰 벼슬을 지내고 큰 부를 축적한 신씨 가문에 대를 이어 노비였다. 종놈의 자식으로 천대받고 억눌리며 살아야 했다. 그런 어느 날 신씨 집안의 장남인 병철이 그의 여동생에게 폭행을 가하는 모습을 보고 그는 병철에게 반죽음이 되도록 주먹을 날린다. 어린 동생에게 몹쓸 짓을 하기에 휘두른 주먹이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정신이 까무룩 해지도록 지독한 몽둥이 뜸질과 집에서 쫓겨나는 거였다. 농삿일이 아닌 대장일을 배워 대장장이로 살아가는 그는 초등학교 선생인 방 선생을 만나면서 삶의 갈림길에 들어선다.
방 선생 역시 과거엔 종놈의 자식이었지만 그의 아버지가 상전의 아들 대신 살인누명을 쓴 대가로 종살이를 면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감옥생활 중에 중병을 얻어 세상을 뜨면서 유언으로 공부를 하라는 말을 남기자 그 영향인지 황복만을 비롯한 무지한 이에게 글과 숫자를 가르치며 조직을 구성하기에 이른다. 그는 사람들에게 혁명을 일으켜 양반 같은 지주 계급을 처치하여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소리쳤다. 이후 황복만은 인민위원회의 부위원장이 되어 신씨 일족의 남자들에게 날카로운 창을 휘두르며 몰살시키는 폭행을 일삼는다. 그 일로 인해 그의 아내는 몰매를 맞아 죽고 어린 아들은 그때의 충격으로 치유할 수 없는 정신적 장애를 입기에 이른다. 가족의 불행도 무릅쓰고 혁명을 일으켰지만 그들 조직은 결국 쫓기는 신세가 되어 깊은 산으로 숨어들고 그 와중에 조직에서 나와 몸을 숨긴 황복만은 자신의 과거를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버리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간신히 황복만으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번듯하게 성공했건만 30년이 지나서 자신의 목을 조여오는 의문의 남자는 과연 누구이며 복만의 아들 형민에게도 전화를 걸어 아버지 황복만의 과거를 고하는 그의 목적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황해도가 아닌 전라남도 보성의 회정리로 아버지의 과거를 찾으러 간 형민이 목도하게 될 진실은 무엇일까.
의문의 남자에게 걸려온 전화를 시작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이야기가 진행되는 소설은 몰입하여 속도를 내어 읽어갔다. 하지만 소설 속에 벌어진 사건과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모두 우리의 아픈 과거의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었기에 읽는 내내 불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가난한 것이 한이 되어 그것을 폭력으로 풀어내고 그것이 또 다른 복수를 불러오는 이야기는 안타까움이자 슬픔이었다. 아픈 과거의 역사를 만나고 책장을 덮은 내게 한 문장이 다가온다.
죄는 무엇인가. 세월이 이렇게 길게 흘렀는데도 죄는 그대로 남기 마련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