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정확히 언제인지 모르지만 안소니 홉킨스라는 영화배우를 뇌리에 새기게 된 영화가 있었는데 바로 [남아있는 나날]이었다. [양들의 침묵]에서 주인공을 맡았던 조디 포스터보다 소름끼치는 렉터 박사를 실감나게 연기한 안소니 홉킨스가 더욱 인상적이었는데 그에게서 이런 면이 있다니...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는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지 실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남아있는 나날]은 언제든 다시 보고 싶은 영화가 되었는데...그 영화의 원작소설이 있다는 걸 얼마전에 알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자가 영국인이 아니고 일본인이란다. 의외다...라는 느낌과 함께 궁금했다. 그 영화의 원작이 어떨지...




소설의 주인공은 스티븐스라는 인물로 영국의 이름난 저택의 집사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밤이 깊어 잠자리에 들 때까지 주인의 가장 가까이서 저택의 크고 작은 일을 도맡아 해결해오던 그에게 어느 날 주인이 이런 말을 건넨다. 자신이 집을 비우는 내내 집에 갇혀 지낼 게 아니라 어디든 여행을 다녀오라고. 오랫동안 달링턴 홀에서 달링턴 경을 모시다가 지금의 주인인 페러데이 어르신을 모실 때까지 여행 한 번 해보지 못했던 그는 고민하던 끝에 결심을 한다. 처음으로 여행을 떠나보자고. 겸사겸사 예전에 달링턴 홀에서 일했던 켄턴 양에게서 편지가 왔으니 그녀에게 함께 일할 것을 권해보자고.




이후 책은 스티븐스가 6일 동안 서부로 여행을 하며 일어나는 일들이 그가 과거에 달링턴 경을 모실 때를 회상하는 것과 더불어 펼쳐진다. 생애 처음 하는 여행을 통해 그는 장엄하고 웅장하며 아름다운 자연 앞에서 감탄과 감동을 하면서도 곧 자신의 임무에 대한 고민에 빠진다. ‘위대한 집사란 무엇인가.’를 두고 동료들과 열띤 토론을 벌였던 때를 떠올리면서 ‘위대한 집사’란 무엇보다 품위를 지녀야 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다시금 떠올린다. 그리고 자신은 지금까지 품위를 지키면서 최선을 다하는 집사였다는 것을. 사실 그는 주인을 위해 그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어느새 자신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어버린 켄턴 양을 향하는 마음도, 아버지의 임종도 그에겐 주인에 대한 충성보다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스티븐스는 켄턴 양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된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데...




책을 읽는 내내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스티븐스의 삶이, 오직 집사의 임무에만 모든 것을 바쳐온 그였는데, 그런 그에게 남겨진 것은 도대체 뭐지?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매일 반복되는 자잘한 일상의 소중함, 사랑하는 가족과의 단란함과 벽을 쌓아둔 것 같은 삶. 그런 자신의 지난 날을 돌아보는 스티븐스의 모습은 마치 해가 지고 어스름 해지는 무렵이 되어 화창한 낮을 그리워하는 황혼, 그 자체였다.




하지만 희망을 가져본다. 마지막 노인과의 만남에서, 무리지어 즐겁게 지내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새로운 다짐을 하는 스티븐스의 모습이 왠지 예전과 다르다는 걸 느꼈다. 그에겐 앞으로 남아있는 나날이 있으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