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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덱의 보고서
필립 클로델 지음, 이희수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남아공 월드컵으로 인해 잠잠해지긴 했지만 요근래 ‘서울 불바다’라는 말이 인터넷과 일간지상에 종종 등장하곤 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에서 한 나라의 수도를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발언이 나오다니. 더구나 올해는 한국전쟁 60년을 맞는 해. 한국전쟁 당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조국을 지켰던 학도병들의 실화를 다룬 영화가 개봉되었고 얼마전엔 오랫동안 종군기자로 활약하던 이가 전쟁터가 아닌 외진 망루에서 전쟁 벽화를 그리며 살아가는 내용을 담은 소설도 읽었다. 전쟁을 직접 겪어보지 않은 나로선 이렇게 영화나 소설로 접하는 게 전부이지만 그럴 때마다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지, 그로 인해 사람들이 받는 상처와 고통이 얼마나 큰지 새삼 느끼게 된다.
<브로덱의 보고서>. 제목만 보고 처음엔 소설이 아닌 사회현상이나 세태를 고발하는 형식의 글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검은 형체의 인간이 검은색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며 타자기를 두드리는 모습이, 바로 그 사람을 언제라도 움켜잡을 것처럼 손바닥을 쫘악 편 표지그림이 호기심을 자아냈다. 이 사람이 보고서를 쓰는 인물, 브로덱인가? 그렇다면 그가 쓰는 보고서는 대체 뭐에 관한 거지?
‘내 이름은 브로덱이고 그 일과 무관하다.’ 책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그 일’과 자신은 절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한다. 아니, 무슨 일인지도 말 안했으면서 무조건 난 아니라고 발뺌하다니...뭘 모르는구만.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는 걸 모르나? 언뜻 삐딱한 생각이 들지만 한편으론 더욱 궁금해진다. 도대체 ‘그 일’이 어떤 일이기에, 얼마나 큰 비밀이 숨겨져 있는걸까.
브로덱이 말하는 ‘그 일’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렇다.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의 상처와 혼란이 완전히 사그라들지 않은 때, 사방이 숲으로 둘러싸인 외딴 마을에 낯선 이가 찾아온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타인’이란 의미로 ‘안더러’라 불렀는데 마을에서 한동안 머물던 그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는 일이 벌어진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브로덱에게 지금까지의 일을 기록으로 남기라고 말한다.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은 너 밖에 없다면서. 그후 브로덱은 보고서를 쓰기 시작한다. 시장을 비롯해 마을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그간의 일을 조사하자 사람들은 그를 친절하게 대하면서도 왠지 괴리감을 느끼는 행동을 한다. 있지도 않은 일,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찾아내려고 애쓰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이쯤 되면 궁금증은 더욱 커진다. 안더러는 대체 누구였을까. 왜 이 마을에 왔으며 어떤 특별한 목적이 있었던 걸까. 그 안더러를 마을 사람들은 왜 살해했을까. 그리고 ‘그 일’의 보고서를 왜 브로덱에게 일임했을까. 책을 읽는 내내 이런 의문들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책은 브로덱이 보고서를 써가는 과정을 그대로 따라가는 동시에 그의 과거를 보여준다. 브로덱이 어떻게 해서 마을에서 지내게 됐는지, 전쟁이 한창일때 오떤 일이 벌어졌고 그로 인해 브로덱은 어떤 고통을 당해야 했는지...낱낱이 드러낸다. 그리고 안더러가 마을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드러나게 되는데...
한 권의 소설을 이토록 오래 잡고 있기는 정말 드문 일이다. 소설의 내용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난해거나 복잡한 건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책장을 넘기기가 쉽지 않았던 건 아마도 ‘그 일’의 이면, 어둠에 가려진 사건의 진실, 마을 사람들 모두를 불안에 떨게 했던 진실을 만나기가 불편했던 것 같다. 사람들이 낯선 이방인을 대할 때 호기심과 신선한 자극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가 위험한 존재란 생각이 들 경우엔 지금까지의 태도에서 돌변해서 무리지어 공격할 수도 있다는 사실,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공포와 폭력성을 마주치기가 두려웠다.
이 책을 읽으며 문득 영화 <도그빌>과 <모든 것이 밝혀졌다>란 소설이 떠올랐다. 자신들의 마을에 찾아온 낯선 이에게 인간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얼마나 추악하고 무자비한 폭력을 가할 수 있는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때로 낯선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일도 서슴지 않는 모습이 충격적이었는데 <브로덱의 보고서>를 통해 그때의 느낌, 기분들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필립 클로델. 그를 이 작품을 통해 처음 만났다. 그렇기에 하나의 작품만으로 그를 평가할 수는 없다. 그가 펼쳐보인 세계는 단번에 읽어내고 파악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의 또다른 작품을 만나거나 이 책을 다시 읽어야할 것 같다. 그것도 조만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