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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화를 그리는 화가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김수진 옮김 / 시공사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세상을 살다보면 별의별 일이 다 생긴다. 지극히 사소한 일이 눈덩이처럼 부풀리기도 하고 웬만해선 풀기 어려울 것 같은 심각한 사건이 눈이 녹아내리듯 무마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어떻게 봐야 할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사람이 자신을 죽이겠다는 말을 한다면? 그렇다고 해서 그가 무장강도나 연쇄살인범이냐, 그것도 아니다. 참으로 기이하고 해괴한 일이다. 대체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소설의 주인공은 안드레스 파울케스. 전직 사진기자였는데 전쟁의 한가운데서 현장감 넘치는 사진을 찍는 종군기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손에서 카메라를 내려놓고 찾아간 곳은 지중해의 작은 마을, 해안가 절벽의 버려진 망루였다. 매일 아침마다 팔을 150번 저어 바다로 나갔다가 돌아온 파울케스는 망루의 벽을 마주한다. 그리곤 카메라를 들었던 손에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여러 시대를 걸쳐 일어난 전쟁의 순간을 담은 거대한 전쟁 벽화를.
파도소리와 관광유람선에서 들려오는 엔진과 음악소리를 빼면 고요함만이 가득한 망루에 어느 날 한 남자가 찾아온다. 그의 이름은 이보 마르코비치.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파울케스에게 그는 한 장의 사진을 내민다. 그건 파울케스가 유고슬라비아에서 벌어진 전쟁에 종군기자로 활약할 때 퇴각하는 크로아티아 병사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었는데 당시 ‘전쟁의 상징’으로 여겨질만큼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고 파울케스는 권위있는 상을 수상했다. 그런데 파울케스에게 영광을 안겨다준 사진이 마르코비치에게는 곧 불행의 시작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크로아티아군의 상징이 되버린 마르코비치. 그는 세르비아 군대에 포로로 잡혀 모진 고문을 받는가하면 아내와 아이까지 잔혹하게 살해당하고 만다. 브라질에서 나비가 날갯짓 한 것이 세상 반대편에 허리케인을 몰고 가듯이 오래전에 일어난 우연한 일로 인해 자신의 인생이, 삶이 송두리째 바뀌었기에, 사랑하는 가족에게 끔찍한 불행이 닥쳤기에 마르코비치는 그 원인이 된 사람, 파울케스를 죽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를 찾기 위해 오랫동안 여러 곳을 수소문하던 마르코비치는 결국 알아낸다.
자신에게 크나큰 불행의 씨앗을 안겨준 사람이었지만 마르코비치는 파울케스를 만나자마자 죽일 수 없었다. 이제 전쟁사진이 아닌 전쟁화를 그리는 파울케스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언제부터 눈앞에 펼쳐진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됐느냐고. 당신이 찍었던 죽어가던 여인의 사진은 어찌했냐고. 그녀를 사랑했던 거냐고. 왜 그림을 그리느냐고...
책은 파울케스와 마르코비치, 두 남자가 3일에 걸쳐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생과 사, 전쟁과 삶, 사랑, 예술에 대해 나누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런데 그들의 대화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여느 미스터리 소설처럼 의문의 사건이 벌어지고 그것을 풀어나가는 편이 더 수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렇다고 그들의 대화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더뎌지고 자꾸 멈추게 됐던 건 두 사람이 서로에게 던진 질문들이, 그 화살이 왠지 내게도 향해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나 자신이 마치 제 3자가 되어 무의식중에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마르코비치는 결국 파울케스를 죽이게 될까? 궁금해서 자꾸 뒷장을 들춰보고 싶은 걸 꾹꾹 참느라 정말 힘들었다. 20여 년간 전쟁과 내란의 현장을 누비는 종군기자로 활약했던 아르투로 페레스-레베르테. 그는 자신이 겪었던 전쟁의 참혹함을 이 한 권의 책 <전쟁화를 그리는 화가>를 통해 보여준다. 그가 전하는 이야기를 모두 가슴에 담아내려면 언제든 이 책을 다시 읽어야 될 듯하다.
우연히도 사진을 찍는 인물이 등장하는 소설을 연이어 읽었다. 화려한 도시에 살아가는 색명의 여자 사진작가가 카메라를 통해서 흑백의 세상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펼쳐보이기 위해 고심했다면 파울케스는 참혹한 전쟁터를 누비며 수많은 사진을 찍었지만 그건 어떤 감정도 실리지 않은 순간 포착에 지나지 않았다.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두 작품을 읽으며 내게 세상은 어떤 모습인지, 카메라를 통해서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서툴게나마 내가 담아내고자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